네타냐후만이 아니라 트럼프도 함께 국제법정에 세워야

이란전쟁을 다루는 한국 언론의 보도 방식에는 맹점이 있다. 전쟁의 실체를 한 개인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네타냐후가 핵심 인물임은 분명하다. 가자지구에서 그랬듯 이란을 상대로도 초토화 전략을 먼저 세워놓은 후 이란과 레바논 공격에 앞장섰고 휴전을 방해하며 판을 흔들어왔다. 그래서 더 경계해야 한다. 네타냐후를 중심 괴물로 악마화하게 되면 정작 이 전쟁을 완성하고 있는 ‘절대악’이 안개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트럼프다.

작년 6월 13일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타격했다. 그리고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은 ‘한밤의 망치 작전’으로 포르도와 나탄즈의 핵시설에 결정타를 날렸다. 미국이 마지못해 전쟁에 끌려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문을 열고 미국이 들어가 방점을 찍는 정교한 합작품이었다. 이번 전쟁도 명분은 같았다. 이번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동시에 습격했다. 전선은 넓어졌고 적의는 짙어졌으며 수많은 아이들과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 나갔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으로 전장을 확장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100만 이상의 피란민을 발생시켰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을 향한 비판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발언이 국내 언론보도의 흐름에 자칫 기이한 착시현상을 더할 수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분노가 네타냐후와 이스라엘에만 쏠릴수록 미국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뒤에서 말리다 휩쓸린 조연처럼 보이고, 트럼프는 네타냐후의 꾐에 넘어간 얼간이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전면에 나선 것은 이스라엘인지 몰라도 전쟁을 실질적으로 완성한 것은 미국의 승인과 군사력이다.

1982년 사브라와 샤틸라의 학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 서부를 장악한 상황에서 레바논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들어가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세상은 먼저 민병대의 잔혹함에 분노했지만 그 학살은 이스라엘군의 철저한 통제 아래 벌어졌고, 이스라엘 내부 조사위조차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의 책임을 인정했다. 앞줄에 선 것은 민병대였지만 몸통은 그 뒤에 있었다. 지금 한국 언론이 네타냐후의 얼굴에만 줌을 당길수록 트럼프와 미국은 그 뒤로 은근히 숨어버리고 있다.

1980년대 니카라과 콘트라 전쟁도 맥락은 같다. 마을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살상한 것은 현지 반군인 콘트라였지만 그들에게 총을 쥐어 주고 의회의 제한까지 우회하며 세력을 키운 것은 미국이었다. 손에 피를 묻힌 얼굴은 현지에 있었지만 그 손을 움직인 동력은 워싱턴에 있었다. 제국은 늘 이 방식을 선호한다. 언론이 직접적인 가해자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책임의 본질적인 구조는 흐려진다. 이란전쟁을 네타냐후 개인의 광기로만 설명하게 되면 진짜 사탄은 교활한 비웃음을 흘리며 전쟁책임을 회피할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4월 16일 펜타곤 기도회에서 피트 해그세스 국방장관이 읊어댄 종교적 언어는 이 전쟁의 섬뜩한 배경을 드러낸다. 국가 안보라는 임무에 ‘섭리’와 ‘사명’이라는 포장지를 씌웠다. 구약 성경 에스겔 25장 17절이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악을 행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분노와 응징이 임한다는 요지의 이 구절은 영화 <펄프 픽션>에서 살육을 행하는 자가 무고한 상대를 처단하면서 내뱉은 언사다. 미국은 폭력에 종교라는 외투를 입히면서 도륙행위를 심판의 집행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전쟁범죄와 신의 뜻을 동일시하는 방식은 미국의 면죄부 문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의 실상을 정확히 불러야 한다. 네타냐후의 전쟁만이 아니다.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공동 책임 아래 진행된 전쟁이다. 누가 먼저 판을 깔았는지, 누가 더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누가 실제로 국가권력을 동원해 총력 공격을 기획하고 국제법을 짓밟고 민간인 희생이 예견된 작전을 밀어붙였는지 여부다.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 나아가 침략전쟁의 책임은 둘 다에게 지워져야 한다. 네타냐후는 이미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 대상이다. 트럼프 역시 그 옆자리에 서야 한다.

국내에서 자주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국제형사재판소 제소와 범시민 서명운동에 나서는 것은 그래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이 당장 법적 결과를 낳느냐를 떠나 인류가 최소한 어디에 선을 긋고 무엇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제형사재판소를 향한 요구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탄핵이나 선거 심판은 국내적인 절차일 뿐이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벌어진 대규모 범죄는 별도로 국제 심판대에 세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대국 지도자가 벌인 전쟁은 늘 자국 정치의 소음 속에서 적당히 증발되고 말 것이다.

전례는 여럿이다. 2001년 세르비아의 전직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집단학살과 반인도범죄 혐의로 헤이그 법정에 섰다. 재판 도중 사망해 유죄 확정은 피했으나 국가원수도 국제법정의 피고가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라이베리아의 전직 대통령 찰스 테일러 역시 2012년 전쟁범죄 방조 혐의로 50년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복역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인류 문명의 숭고함을 짓밟은 인간은 그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법망 바깥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원칙은 이미 수백 번도 더 확인됐다.

우리와 관계없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외세의 개입과 전쟁, 민간인 학살과 분단의 역사를 관통해온 우리가 국제법의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처절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시민의 능동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다. 지금 우리는 네타냐후를 향한 손쉬운 분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네타냐후의 얼굴 뒤로 숨는 미국까지 함께 끌어내는 정밀한 분노가 필요할 때다. 그래야만 이 전쟁의 실체도, 책임의 순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문명의 마지노선도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트럼프와 네타냐후를 나란히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