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18 대선을 앞두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고정간첩 김낙중을 또다시 붙잡았다며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산삼과 녹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의 집 장독대 밑에서 달러 뭉치가 발견됐다고도 밝혔다.
10월 6일 발표될 남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선실 사건)의 관련자로 부각될 김낙중은 산삼·녹용과 장독대 달러 같은 인상적인 표현들과 함께 거물급 간첩으로 부각됐다. 안기부 발표문에 기초한 그해 9월 8일 자 <조선일보> 보도다.
"김씨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옛 연락부) 소속 거물 공작원이며, 90년 2월부터 92년 4월까지 세 차례 서울에 남파돼 1년 4개월간 서울 관악구 봉천동 등지에서 잠복하면서 비밀 지도부를 구성한 임모 등으로부터 수시로 공작지령을 하달받아 간첩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김씨가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은 모두 2백 10만 달러(한화 16억 상당)로 이 중 쓰고 남은 1백만 달러가 그의 집 장독대 밑에서 발견됐다. 이 공작금은 간첩사건 사상 최대 규모이다."
그해 4월 16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3월의 서울시 짜장면 평균값은 1590원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위 공작금 16억 원에 4나 5를 곱해야 현재 가치가 대략 도출된다. 그런 돈의 절반 가까이가 그 집 장독대 밑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기부가 발표한 김낙중의 혐의는 그 돈을 갖고 민중당도 지원하고 세미나도 열고 양심수 석방 및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도 벌이고 대학생 통일논문 현상모집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 자체는 간첩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대법원은 무기징역 선고를 확정지었다.
김낙중의 통일운동... 그는 북한과도 충돌했다
김낙중은 훗날 전방지대가 될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서 1931년에 출생했다. 할머니까지 식모살이를 해야 했던 가난한 소작농 집에서 태어난 그는 상당히 독특한 학생이었다.
<사림> 2003년 제19호에 실린 장숙경 교수의 '김낙중의 삶을 통해 본 분단과 평화, 그 영원한 평행선'에 따르면, 결핵에 걸려 중학교를 휴학한 김낙중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일요일마다 서울 새문안교회와 조계사(당시의 태고사)와 사상가 함석헌 집을 골고루 찾아다녔다. 주중에는 기독교 신학서와 불경과 철학서적 등을 읽었다.
그는 생활력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미군부대 취사부에 근무하며 주경야독을 해서 스물한 살 때인 1952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그런 뒤, 자기만의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눈물을 탐색하겠다며 통일 퍼포먼스를 벌인 일이 그 시작이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1954년 2월, 그는 삭발을 하고 흰옷을 입고 탐루(探淚)라고 쓴 등불을 들고 광복동 거리를 다니며 이렇게 외쳤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전선에서 피를 토하며 죄 없이 쓰러져 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하여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무력북진 반대, 평화통일 만세! 무력북진 반대, 평화통일 만세!' 그의 첫 평화통일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휴학 이후로 많이 읽었던 책들의 영향을 받은 통일운동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북진통일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 1인 시위 때문에 그는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그의 통일운동은 계속됐다. 대학을 자퇴한 뒤인 1955년 6월 25일, '고려민족' 통일 로드맵과 통일정부 조직도와 통일정부 조약문 등을 담은 <수립안>이라는 자료를 들고 그는 임진강을 건넜다. 김일성을 설득해 통일운동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미군 보트를 타고 월북한 그는 그러나 그곳에서 간첩조작의 희생양이 됐다. 그는 자신이 미제 간첩이며, <수립안>은 한·미 당국이 작성했다는 허위 자백을 해야 했다. 북한 당국은 그를 간첩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소중지처분을 받고 1956년 6월 20일 남쪽으로 추방된 그는 이번에는 미군수사대에 붙들리고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간첩죄 무죄 및 국가보안법 유죄를 받고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그는 4·19혁명 뒤에 대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고 법적 부담을 덜었다.
그는 출소 3개월 뒤인 1957년 9월 고려대 경제학과에 편입해 1960년에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 뒤 1961년 10월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에 화를 입었다.
1962년 4월, 육군방첩대가 그를 연행했다. 북한의 무상의료와 자신의 월북 경로를 친구에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슨 지령을 받게 하려고 월북 경로를 이야기해주었느냐?"는 추궁이 가해졌다. 이때는 간첩 혐의는 인정되지 않고 반공법 위반죄가 인정돼 징역 3년 6개월을 받았다.
김낙중은 36세 때인 1967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 적을 뒀다. 이는 1973년에 고려대 NH회 사건(고려대 민우지 사건)에 연루돼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원인이 됐다. 그는 고대 학생들이 민족주의(Nationalism)와 인간주의(Humanism)를 내걸고 간첩활동을 했다고 포장된 이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됐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그가 NH회를 이끌고 반정부 봉기를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그는 7년 형을 받았다.
1980년대는 그에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때는 집필과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1989년에는 국회 통일정책특별위원회 공청회에서 '3차 7개년 계획에 의한 4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스물넷 때 <수립안>을 품고 북한 당국을 설득하고자 임진강을 건넜던 그가 58세 때는 7개년 계획 통일방안을 들고 남한 국회를 설득하고자 한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의 통일운동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기만의 신념과 더불어 특유의 개성이다. 그의 조직 생활은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조직이 있을 때는 무난히 수행됐다. 자신이 주도하는 세미나나 자신이 지원하는 정당 활동에는 그의 열정이 발휘됐다.
대부분의 남한 통일운동가들이 북한 당국의 정책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 데 비해, 그는 북한과도 충돌해 미제 간첩으로 몰렸다. 북한이라는 조직과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 어느 정부에도 순응하지 않는 그가 북한 지령을 받고 통일운동을 했다는 수사 결과는 그의 인생 궤적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철학대로 통일운동을 하는 인물이었다.
조작된 간첩사건... 판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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