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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사 때문에 권고사직...파란만장 '반도체 38년'

[이봉렬 in 싱가포르] 1988-2026 '반도체 노동자'로서 마침표를 찍고, 새 출발 합니다

26.05.06 06:56최종 업데이트 26.05.06 06:56

1988년 10월,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현장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기 중이더라도 취직만 되면 공부 대신 일을 할 수 있었거든요.

삼성그룹에 입사한 후 연수를 받을 때의 모습. 이때부터 저의 반도체 삶이 시작됐습니다.이봉렬

첫 직장 : 시위주동자로 몰려 권고사직을 당하다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지금 생각해도 실소가 터집니다. 3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된 어느 날 교실에 삼성그룹 인사 담당자가 들어와 반 1등부터 10등까지 지원서를 가져가라더군요. 그런데 일주일 전, 이미 현대그룹에서 10등까지 싹 쓸어간 뒤였습니다. 결국 삼성은 어쩔 수 없이 11등부터 20등까지를 데려갔고, 저도 그 어쩔 수 없이 뽑힌 학생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배치된 곳이 기흥의 1메가 D램 웨이퍼를 생산하던 3라인 팹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다들 반도체가 뭔지 어느 정도 알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님께 반도체니 팹이니 하는 용어를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저 전자기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다고만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은 그래도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한 게 자랑스러웠는지 제가 회사에서 팹 완공 기념으로 받은 밥그릇을 38년이 지난 지금도 보관하고 계십니다.

삼성전자가 직원을 학력에 따라 5급(고졸), 4급(전문대졸), 3급(대졸)으로 나누던 시절,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승급할 수 있다고들 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2년이 아니라 3, 4년이 걸려도 승급이 어려운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인사고과를 기다리기보다 졸업장을 따는 게 빠르겠다는 판단에, 교대 근무를 하며 야간 전문대에 지원했습니다. 반도체 팹은 교대 근무 체제라 아침 조로 일하면 저녁에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991년, 시대를 뒤흔든 파도가 저를 덮쳤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고 그 과정에 대학생들이 경찰에 맞아 사망하고 또 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전 학교에서 뜻 맞는 동기들과 시위에 참여했는데, 그때 필요한 유인물을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회사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바로 해고하려 했지만, 명분이 조금 부족했는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인사과 사무실로 출근시키며 사표를 강요했고, 밤마다 같은 부서 선배들이 기숙사로 찾아와 제발 사표를 써달라며 돌아가며 사정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버티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표를 냈습니다. 제 삶의 첫 번째 사표였습니다.

인사과장은 그날로 저를 삼성전자의 협력업체 한 군데로 데려가 취업을 시켜주었습니다. 사표 강요가 문제가 될까 봐 입막음용으로 자리를 구해준 것이었죠. 하지만 반나절 만에 그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 회사 사장에게는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것으로 하겠다고 말하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 후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은 6개월의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 군대에 갔습니다.

두 번째 직장 : 1990년대에 주5일제를 도입한 회사를 내 발로 그만 두다

제대 후 취직한 곳은 모토로라코리아였습니다. 이곳은 팹에서 만든 웨이퍼를 가공하고 포장하는 패키징 회사였는데, 1990년대 초 국내 기업 중 5일제를 시행하는 몇 안 되는 신의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료들도 여유가 넘쳤고 서로에게 다정다감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표를 낼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모토로라코리아처럼 패키징을 주로 하던 아남산업이 웨이퍼 팹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 생활도 만족스러웠지만, 웨이퍼 팹과 패키징은 그 규모부터가 달랐습니다. 아직 젊어서였는지, 조금 더 크고 최신 기술이 적용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는데 곧바로 입사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점심시간, 회사가 중대 발표를 한다며 팀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서울 광장동에 있던 공장을 경기도 파주로 이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파주로 같이 갈 수 없어 사표를 내는 이들에게 퇴직금 외에 별도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발표 네 시간 전에 미리 사표를 낸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 인사팀에서는 발표 당일에 낸 사표부터 유효하다고 인정해주었고, 저는 뜻밖의 위로금까지 챙겨 회사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모토로라코리아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세 번째 직장 : <오마이뉴스> 때문에 잘리다

아남반도체에 입사 후 제 손으로 첫 장비를 설치하고 기념으로 클린룸 안에서 방진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이봉렬

아남산업에 합류했을 때는 이제 막 팹을 짓기 시작하던 단계였습니다.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된 경력직들이 각자의 능력치를 풀가동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저는 전공인 기계 설계를 살려 팹 내부 장비 레이아웃을 그렸습니다. 지금도 팹 전체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건 그때의 경험 덕분입니다. 이후 펌프나 스크러버 등 보조 장비를 담당하다가, 팹 완공 후에는 반도체 8대 공정 중 하나인 금속 배선팀에 속해 일했습니다.

3년도 채 못 채우고 떠났던 이전 회사들과 달리, 아남산업에서는 회사 이름이 동부아남반도체를 거쳐 DB하이텍으로 바뀔 때까지 9년 넘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부실한 민방위 교육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본 소방방재청에서 회사에 항의 전화를 한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쓰는 시민기자일 때는 방송 출연 요청이 오면 카메라를 들고 클린룸까지 들어가게 해주며 지원하던 회사가, 그날 이후로는 제가 쓰는 기사에 트집 잡으며 저를 불온한 인물로 몰아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DB하이텍 최초의 노조 결성에 제가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자, 감당하기 힘든 업무를 맡기며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을 버텼지만, 저 하나 때문에 조직까지 바꾸는 것을 보고 결국 근속 10년을 석 달 앞두고 세 번째 사표를 냈습니다.

DB하이텍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게 만든 오마이뉴스 기사. 하지만 싱가포르에 와서도 기사는 계속 썼습니다.오마이뉴스

네 번째 직장 : 싱가포르의 반도체 장비 회사, 한국인 사장에게 월급도 못 받고 그만두다

삼성전자와 DB하이텍에서 사표를 강요받은 저를 받아줄 국내 반도체 회사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결국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먼저 싱가포르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소개로 싱가포르의 한 반도체 소부장 업체에 취업했습니다. 반도체 장비와 부품을 중개하고 셋업까지 담당하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사장이 문제였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는 싱가포르에서 축구단을 인수하고 연예인과 싱가포르 국가대표팀을 후원할 정도로 기세등등했지만, 방만한 운영 끝에 회사가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협력업체 대금을 제때 주지 못해 수많은 소송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8년 정도 몸담았던 그곳에 네 번째 사표를 던졌습니다.

다섯 번째 직장 : 드디어 내 회사를 차렸으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다

퇴사 후 제 이름을 건 개인 회사를 차렸습니다. 싱가포르는 창업 절차가 까다롭지 않았고, 선후배들이 도와준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3년 정도 사업을 이어가며 수익도 꽤 좋았습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첫째 대학 등록금과 둘째 고등학교 학비를 모두 해결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다 삼성전자 시절 함께 일했던 동기에게 뼈아픈 사기를 당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해외를 떠돌던 옛 동기에게 프랑스에 있는 반도체 팹 관련 업무를 맡겼는데, 3개월 뒤 그는 제게 거짓말을 하고 그 업체와 직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사업 아이템을 뺏긴 것보다 20년 지기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여섯 번째 직장 : 반도체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기에 사표를 내다

상심해 있을 때, 싱가포르 STM에서 팀장으로 일하던 친구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험한 사업 그만두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고요. DB하이텍 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 친구는 제가 사업가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고민은 딱 3초면 충분했습니다. 회사를 정리하고 입사한 STM은 유럽계 기업으로, 세계 10대 시스템 반도체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다시 시작한 직장 생활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일을 반복해야 했지만, 적어도 월급은 제날짜에 꼬박꼬박 들어왔으니까요. 사업할 때의 불안함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한국인 동료들과 의지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입사 10년을 채웠고,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래 다닌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다닌 회사를 되돌아보면 삼성전자는 설계와 생산을 다 하는 메모리 종합반도체(IDM), 모토로라는 반도체 웨이퍼를 테스트하고 조립하는 후고정(OSAT), DB하이텍은 팹리스로부터 주문받은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 그리고 STM은 시스템반도체 회사입니다. 거기에 반도체 소부장 회사도 다녔고, 개인 사업도 해 봤으니, 팹리스 정도를 제외하고 큰 틀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분야를 깊게는 모르지만 반도체 관련해서 얕지만 넓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걸로 반도체 특별과외 기사도 쓰고, 가끔 강연도 할 수 있었죠.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직원을 회사는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이봉렬

그런데 얼마 전 다섯 번째 사표를 낼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 전조는 3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마이뉴스에 반도체 관련 글을 쓰며 STM 직원임을 밝힌 게 화근이 되어 인사팀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회사 측은 제 활동을 예의주시해 왔으나 간섭하지 않았는데, 제가 소속을 밝히는 순간 제 글이 회사의 공식 입장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며 다시는 소속을 밝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습니다. 어길 시 해고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요.

그 서약서를 쓴 후로도 반도체 관련 기사를 계속 썼지만 한 번도 STM 직원이라는 걸 밝히진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올해 초, 인사팀에서 갑자기 절 부르더니 제가 쓴 글 몇 개를 보여줬습니다. 반도체 팹이 호남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쓴 글이었습니다. 인사팀에서는 제가 그런 글을 쓴 이유를 물었고, 전 그런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를 되물었습니다. 인사팀은 앞으로 그런 글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고, 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맞섰습니다.

인사팀은 결국 절 부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STM의 한국의 고객사에서 제가 쓴 글을 이유로 항의를 해왔다는 겁니다(인사팀에서는 회사 이름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는 굳이 밝히진 않겠습니다). STM 직원이라는 걸 밝히지 않고 글을 썼지만, 그 반도체 회사는 제가 STM직원이라는 걸 알고, 그런 글을 쓰지 못하도록 제가 아닌 회사에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그날의 면담 이후 전 해당 회사와 반도체 관련한 글을 일부러 더 많이 쏟아냈습니다. 그 정도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거였죠.

사실 이렇게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건 진작부터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월에 한국에 살 집도 계약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사표를 내고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한 후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터지니 오기가 생겨 오히려 퇴사를 미뤘습니다. 이런 류의 압박에 못 이겨 나가는 모양새도 싫었고, 차라리 해고를 당한다면 제 삶에 더 강렬한 서사가 생길 거란 생각에 버텼습니다.

그리고 3월에 휴가를 내고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퇴사 전이었지만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면 해고 통지서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확신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만난 인사팀장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법률 검토 결과 그 정도로는 해고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회사를 봐서라도 그런 글을 쓰는 걸 멈춰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쓸 예정이고, 곧 관련해서 책도 나올 것이라고 답하며 그 자리에서 사표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계획했던 일이었고, 10년 넘게 다닌 회사에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자 인사팀장의 얼굴이 확 피더군요.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두 달은 더 일해야 하는 규정도 무시하고 당장 그만두게 해주겠답니다. 하지만 제가 속한 팀에서 인수인계를 위해 최소한 2주는 필요하다고 해서 3월 말까지 일하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동료들이 축하연을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주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가는 건 모두의 소망이니까요.

STM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했더니, 딸들이 집에 이런 걸 붙여 놓고 상패까지 만들어 주며 축하해 줬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이봉렬

1988년에 시작된 저의 반도체 대장정은 이렇게 2026년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다섯 번의 사표 중 세 번이 권고사직이라니, 그것도 모두 제가 쓴 글 때문이라니 참으로 굴곡진 인생입니다. 이제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를 받아줄 반도체 회사는 없겠지만, 저 역시 미련은 없습니다. 아이들도 독립했으니 큰 짐도 내려놓았습니다.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게 인생이기에,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글을 썼다는 이유로 잘렸으니, 억울해서라도 앞으로 더 치열하게 써볼 생각도 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다지 화려하진 않았어도, 크게 부끄러울 것 없는 반도체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오늘 이후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저를 마주친다면, 고생 많았다고 토닥토닥 한번 해줄 수 있죠? 전 그거면 됩니다.

#이봉렬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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