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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김민기’와 한국가요 ‘별의 순간’

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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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청년 김민기 이야기]⑮

최경식의 설득으로 탄생한 앨범 김민기

한국 포크의 효시, 우리 가요 100대 명반

김지하 영향,시대의 고민·이웃의 고통 품어

앨범 김민기 5개월만에 시판·방송 금지

1971년 9월 1일 양희은의 1집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이 발매됐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꼭 이름을 올리는 앨범이다. 여기에 실린 10곡 가운데 7곡이 번안곡이고 나머지가 우리 포크였다.

2곡은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아침이슬’과 ‘그날’이었고, 나머지 1곡은 고은 작사 김광희 작곡의 ‘세노야’였다.

녹음은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쇠줄 기타로 리듬을 맡았으며, 피아노 반주는 김광희가 맡았다. 다들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객이었지만, 제 노래를 내주고 또 반주까지 해줬다. 그게 당시 포크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이 음반은 김진성 CBS 피디 등 양희은을 아끼는 이들이 당시 잘 팔리던 트로트 가수 이해성, 신태성 씨를 앞세워 킹레코드사를 설득한 결과였다,

양희은의 따끈따끈한 음반을 받아 든 최경식의 머리에 문득, 저 깊은 곳에서 영혼을 울리는 ‘김민기’의 낮고 묵직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양희은의 맑고 높은 목청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소리였다. 그는 곧 김민기를 찾아 나섰다.

예상은 했다. 김민기는 어눌하지만 단호하게 ‘싫다’라고 했다. “희은이가 불렀으면 되지 않았느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경식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는 김민기보다 열여덟이나 많은 대선배였다.

같은 노래라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그 맛과 의미가 달라진다. 외국엔 자작곡 포크 앨범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엔 하나도 없다. 포크는 나와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나의 노래로 전하는 것 아닌가, 우리에게도 그런 앨범이 나올 때도 됐다…. 설득은 집요하게 이어졌고, 김민기는 마침내 손을 들었다.

최경식의 끈질긴 설득이 없었다면 1971년 발매된 앨범 김민기는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사진은 김민기가 YWCA 청개구리집에서 노래하고 있는 모습. 마이크를 기타 가까이 대어주고 있는 양복입은 이가 최경식 피디다.

사진출처: 국제신문

최양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샹송 가수로 알려져있다. 김민기는 최경식의 요청으로 최피디의 여동생 최양숙에게 가을편지의 곡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별의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저서 <인류의 별의 순간>에서 한 말이다. “극적 긴장이 가득한 운명적인 순간이 닥치면 하루 만에, 혹은 한 시간 만에, 심지어는 단 일 분 만에 훗날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한 순간은 개인의 삶에서도 드물고 역사에서도 드물다. 내가… ‘별의 순간’ 혹은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러한 순간들이 부질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사색하는 인간’ 키케로와 ‘제2의 모세’로 추앙받던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이 우왕좌왕하다가 인류사 위대한 전진의 기회를 놓친 것과, ‘냉소적이며 대담한’ 혁명가 레닌은 조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망명지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감으로써 혁명의 완성자가 된 사실을 비교하며 ‘별의 순간’을 설명했다.

김민기는 물론 이들과 달랐다. 우왕좌왕하지도 않았고, 단호하게 결단하지도 않았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그 순간을 잡았을 뿐이지만, 그건 대중가요와 예술가곡 등 우리 노래판에도 ‘별의 순간’이었다.

최경식과 김민기의 담판으로부터 한 달 보름쯤 뒤인 10월 21일 앨범 <김민기>가 발매됐다. 우리 음악가가 작곡하고 노래하고 출시한 첫 포크 음반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1971년은 ‘한국 포크의 원년’이 되었고, 앨범 <김민기>는 한국 포크의 효시가 되었다. 앨범 <김민기>와 함께 우리 음악계에는 자작곡 앨범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한국의 대중음악은 서방 세계와 견줘도 손색없는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최경식은 1958년 부산MBC에서 음악 피디로 사회에 발을 디딘 한국의 1호 음악 전문 피디였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과 깊은 안목, 음악인에 대한 따듯한 배려로 존경을 받던 대중음악계의 맏형이었다. 1960년대에는 ‘재야 대통령’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음악 평론을 기고하던 저항적 음악인이기도 했다. 당대 지식인 운동의 한 축이었던 YMCA ‘시민 논단’을 창립하는 등 민주화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일찍이 김민기 노래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것이 “거리 시위에서 불리면 운동가, 운동장에서 불리면 응원가, 장례식에서 불리면 장송곡, 예배당에서 불리면 찬송가가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고, 또 실제로 그것을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1970년 말 김진성 피디와 함께 김민기를 ‘젊은이의 840 CBS’ 프로그램에 초대해 그의 목소리로 ‘아침이슬’을 세상에 처음 송출한 것도 그였다. 1987년 7월 2일, 5공 정권이 6·29 항복선언을 했다지만 ‘아침이슬’이 여전히 금지곡으로 묶여 있을 때 KBS 라디오 <밤의 플라타너스> 프로에서 이 노래를 17년 만에 처음으로 송출한 것도 그였다.

최경식의 주도로 1971년 11월 발매된 앨범 김민기 표지사진. 표지 바탕이 하얀색이다. 한국 포크의 효시로 꼽히며 100대 명반 중 상위권에 속하는 음반이다.

사진은 2025년 11월 발매한 앨범 김민기 복각 LP 판 이미지. 출처 :학전 제공

앨범 <김민기>의 수록곡 10곡 가운데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두 곡을 제외하면 모두 김민기가 짓고 부른 노래였다. 김민기의 노래 8곡 가운데 ‘친구’는 1968년에, ‘아침이슬’ ‘아하, 누가 그렇게’ ‘꽃 피우는 아이’ ‘길’ ‘그날’ ‘종이연’ ‘눈길’ 등 다른 곡은 1970~1971년 시대의 격동 속에서 탄생했다.

이 앨범이 ‘한국 포크의 효시’로 인정받는 것은 단지 시기적으로 앞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록된 곡들의 예술적 수준이 팝의 원조 국가 노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2007년 <경향신문>과 음악 전문 웹진 가슴네트워크(이하 ‘웹진’)가 공동 기획하고 웹진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이 음반이 평론가 52인 중 35인의 추천을 받아 3위에 올랐을 때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음반은 당시까지 서구 모던 포크의 번안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의 이른바 통기타 가요가 한국 젊은이들의 정신과 감성을 표현하는 음악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고, 스스로 작사 작곡하고 노래 부르는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음반이며, 대중가요가 그저 그런 사랑과 이별, 눈물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는 예술적 산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 음반이기도 한 까닭이다.”

음악평론가들이 대체로 인정하듯이 국내 대중음악계에 형식적인 면(연주, 편곡)에서 혁명을 가져온 건 신중현과 그가 이끌던 ‘신중현과 엽전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에 록과 흑인음악을 도입하고 또 재해석해 한국 대중음악의 풍토를 흔들었다. 그러나 노랫말, 감성, 메시지, 가락과 장단 등 노래의 내용적인 면에서 혁명을 가져온 건 김민기였다. 그런 내용을 앨범 하나에 집약한 것이 그의 1집 <김민기>였다. 단순히 사랑과 이별 같은 흔한 주제가 아닌 철학적 사색과 시대적 고민을 담은 시적인 노랫말이나 메시지도 대중음악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김민기의 노래들은 확인했고 또 일깨웠다.

당시 음악평론가와 포크를 사랑하는 이들은 환호했다. 해방이 되고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가요는 여전히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남의 다리나 긁는’ 번안 포크에 진력이 나 있었다. 나와 우리의 지금 이야기를 노래하고 또 듣고 싶었다. 한대수가 잠깐 맛만 보이고 사라진, 그런 노래들이 가능성이 아니라 굳건한 실체로 눈앞에 나타났다.

특히 환호한 것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암울한 시대 벗이 되고, 힘이 되어줄 우리의 노래가 드디어 내 곁으로 왔다. 골리앗과 맞선 다윗의 심정으로 그 시대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는 든든한 무기였다. 그동안 이들이 시위에 나설 때 부른 노래들이란 구전가요인 ‘해방가’, 찬송가 풍의 번안곡 ‘우리 승리하리라’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들에게는 서로를 격려하고 앞서 나아가도록 고무할 노래가 절실했다. 김민기의 노래는 시위에선 총이자 총알이었다.

노래들 가운데 ‘아하 누가 그렇게’는,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의 꿈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돼 불렸다. ‘그날’은 ‘꽃이 한 송이도 없는, 아니 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꽃밭(현실)’을 고발하고, ‘꽃 피우는 아이’는 ‘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아이도 앓아누운’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됐다.

기지촌 혼혈아의 절망을 그린 ‘종이연’은 당시의 민족적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김민기가 앞으로 가게 될 길, 그의 노래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예고편이기도 했다.

‘혼혈아’는 한국전쟁 이후 외세에 의해 난자된 우리의 몸과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 속에서 태어났지만, 이웃들이 감싸기는커녕 치부로 여겨 숨기고 따돌림을 당했다. 어쩌면 ‘나 대신 역사적 운명을 진 이들이었지만’ 정부는 물론 이웃들조차 그들을 ‘문둥이’ 보듯 했다.

“헬로 아저씨 따라갔다는 엄마/ 철길 저편엔 무슨 소리일까/ 하늘나라 올라갈 나팔 소리인가?” 등이 서늘해지는 대목이다. 노래 속의 아이는 하늘로 퍼지는 나팔 소리처럼, 이 참혹한 나라와 시대에서 떠나고 싶다. 그것만이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종이연’의 원래 제목은 ‘혼혈아’였다. 당시 검열 기구였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윤)이 이 제목을 거부해, 노랫말에 나오는 여러 낱말 가운데 하나인 ‘종이연’을 제목으로 삼았다. 예윤은 1975년 등장한, 한국 문화예술의 저승사자, 공연윤리위원회의 역할을 맡았던 이른바 ‘민간 자율기구’였다.

그 시대에 버려진 아이는 혼혈인만이 아니었다. 당시 ‘공돌이’ ‘공순이’라고 멸시하던, 주변부로 내몰린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도 그 부류에 속했다. 김민기는 그곳에서 ‘시대의 전형’을 찾았고, 그것을 노래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음악적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그가 그런 작업을 의식적으로 혹은 의지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그는 타고나기를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가 그곳에 동화되고, 하나 됐다. 이런 품성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계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1971년 말 선배 화가 오윤의 손에 이끌려 참여한 ‘폰트라’(poem on the trash, ‘쓰레기 더미 위의 시’를 줄여 만든 명칭)라는 이름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이 모임을 이끌던 미학자 김윤수, 시인 김지하, 화가 오윤 등의 영향 속에서, 그는 의식적으로 시대의 전형과 민족적 형식을 찾아 나섰다.

김민기 3집 표지사진. 김지하의 요청으로 만든 금관의 예수 삽입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수록되어 있다. 폰트라 회원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들은 뒤 오윤이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소개하자, 누군가 폰트라 그 자체라고 하고, 김지하는 음유시인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앨범 <김민기>의 노래들은 노랫말, 메시지, 선율, 감성, 음악적 구조에서 혁명적이었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으로도 한국 대중음악계의 이정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대중가요는 일제부터 내려온 노래들이나, 이른바 ‘선진국’ 노래들이 대종을 이뤘다. 한편엔 트로트, 다른 한편엔 모던 팝이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 대중은 지금 여기의 삶과 동떨어진 이들 노래를 통해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하거나, 욕망을 내뱉었다. 특히 ‘사랑 타령’은 당시 가요의 절대 문법이었다.

앨범 <김민기> 수록곡은 이런 노래들과 비교하면, 중고교 음악 교과서에 실린 노래 같았다(실제로 먼 훗날 ‘아침이슬’과 ‘작은 연못’은 중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는 물론 애상의 맥락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유행가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을 법한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시대에 대한 고민, 이웃의 고통 따위로 채워져 있었다.

당시 ‘인간의 노래’을 꿈꾸던 가수 권진원에게 이 앨범은 하나의 전율이었다. “(사랑이란 말이 이 음반에는)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였다.”

이 앨범 발매 뒤 김민기가 가장 자주 듣던 질문 가운데 하나도 ‘어떻게 당신의 노랫말엔 사랑이란 말이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친구들이 그렇게 끌려가고 구속되고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고 있는데,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어떻게 그런 노래를 할 수 있겠어요.”

‘조개껍질 운운’하는 노래는 윤형주의 ‘라라라’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노래는 1969년 여름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만난 여성들을, 속된 표현으로 ‘꼬실’ 속셈으로 윤형주가 지었다는 게 가요계의 속설이었다. ‘라라라’는 1970년대 청춘들이 생각 없이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 당시를 대표하던 한국의 유행가였다. 윤형주가 제목도 붙이지 않아 처음엔 노래의 도입부를 그대로 인용해 제목으로 삼았다. 1972년 윤형주의 첫 앨범 ‘그님’이 나올 때쯤에야 ‘라라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풍토에서 나름대로 파격적인 가창과 메시지를 선보인 송창식, 조영남, 이장희의 노래도 크게 보아 ‘사랑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김민기와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이들이었다. 송창식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형’이었고, 조영남은 민기가 인정하는 술친구이자 선배였다. 이장희와는 이른바 ‘지음(知音)’의 관계였다. 이들은 ‘청개구리’ 행사에도 참여했고, 양희은 등 후배들이 오비스캐빈이나 금수강산 무대에서 용돈을 벌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김민기가 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주던 이들이었다.

앨범 <김민기>의 기획자이자 제작자, 그리고 ‘물주’이기도 했던 최경식은 이 앨범 재킷에 이런 발매사를 올렸다. 젊은 시절이나 말년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김민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한 글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언젠가 방송국에서 민기에게 내가 ‘김민기 논(論)’을 쓰겠다고 했더니 김민기가 ‘김민기 놈?’ 하고 되물어 거기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생각난다. 민기는 그렇게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쓸쓸한 친구다.

그의 노래 속엔 대체로 콧대 높고 줏대 있는 ‘젊은 한국’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며 오래 기다려야 하는 스튜디오 밖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기타로 조용히 클래식 소품을 연습해 보던 그의 모습이나, 어느 날 오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빡 비를 맞아 뼛속까지 젖었을 그가 맨발로 내 사무실에 걸어 들어오던 일(그는 금붕어처럼 뻐끔하니 입을 벌린 구두를 버리고 왔다고 했다)이며, 뭇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국산품 노래를 고집하던 일 등등. 그러한 그의 일상생활은 그의 음악 속에 미화되거나 위장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구현돼 있다.

이번 첫 디스크를 위해 특별히 음악적인 헌신을 보여준 정성조 쿼텟과 김광희 양에게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한마디로 민기는 ‘복도 많은 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앞으로가 그의 가능성과 창조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본격적인 ‘김민기 논’은 그때 그날로 미루기로 하겠고, 끝으로 이 디스크가 민기의 참가치나 숨은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은 분에게 권한다.”

최경식이 본격적으로 ‘김민기 논’을 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김민기는 불온한 ‘놈’으로 정권에 찍혔고, 앨범 <김민기>는 발매는 물론 시판, 방송도 금지됐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정권 아래서 김민기는 저의 이름으로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최경식은 유신체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79년 미국으로 아예 떠나버렸으니 더 논할 수도 없었다.

발매 금지의 직접적인 이유는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받아, 신입생들에게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와 번안곡 ‘우리 승리하리라’, 그리고 구전가요 ‘해방가’를 가르친 것이었다. ‘해방가’는 학생 데모 때 불리던 몇 안 되는 구전가요였고, ‘우리 승리하리라’는 본래 찬송가로 불렸지만, 미국의 피트 시거가 포크 송으로 편곡하면서 반전 민중가요로 불렸다. 정권의 코털을 뽑은 노래는 김민기의 ‘꽃 피우는 아이’였다. 노랫말 가운데 ‘무궁화꽃이 피지 못하는’ 대목에 자극을 받은 정보기관이 발매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음반사를 압박해 시중에 깔린 음반을 모두 회수해 파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이 노래는 무궁화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는 불모의 시대를 비판한 반정부 가요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했다. 레코드사가 초판을 500부만 찍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유신정권은 대중예술에 대한 더 엄격한 통제를 위해 ‘공연 활동 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김민기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있던 모든 노래가 ‘공식적인’ 금지곡으로 낙인찍힌 것은 이때였다. 이전까지의 발매 금지, 방송 금지 따위의 조처는 권력과 그 부역자들의 자의적인 처분이었다. ‘가요계 정화’ 이후 당국은 변칙적으로 발매되고 유통되는 음반까지도 색출해 파쇄했다. 앨범 <김민기>에 대한 2차 확인 사살이었다.

최경식은 앨범 제작 당시 CBS의 음악 담당 부서 책임자였다. 앨범 재킷의 크레딧 칸에 기획 제작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의 이름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김민기는 오랫동안 팔자에도 없는 ‘저작권 소송’을 벌여야 했다.

앨범 <김민기>가 불과 5개월 만에 판매 금지되자, 이 앨범은 오랫동안 지하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됐다. 1987년 김민기의 노래가 해금되자, 그 지인은 자신이 앨범의 제작자라며 다른 레코드사에 저작권을 팔았고, 이 레코드사는 김민기의 뜻과 무관하게 CD로 복각해 앨범 <김민기>를 출시했다.

1987년 무단 복각해 만든 불법 앨범 김민기 표지사진. 앨범 바탕이 하얀색이 아니라 보랏빛이 나는게 특징이다..

김민기는 ‘저작권 침해’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참지 않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 창작자를 능멸하고 죽이는 짓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 그는 ‘가짜 제작자’와 레코드사에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고, 장구하고도 지긋지긋한 재판 끝에 이 해적판 CD의 발매와 판매를 중단시켰다.

1971년 앨범 출시와 함께 김민기는 장안의 명사가 되었다. ‘청개구리 홀’을 드나드는 가수 지망생이나 일반 청소년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그는 경이로운 존재가 되었다. 오비스캐빈이나 금수강산 등 상업적인 무대에 서는 가수들 사이에서도 김민기는 이제 그 뒤를 따라야 할 존재가 되었다. 당시 포크에선 최고라고 자부하던 송창식이 괜히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김민기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면 나는 아예 데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아카이브K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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