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김민기>의 노래들은 노랫말, 메시지, 선율, 감성, 음악적 구조에서 혁명적이었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으로도 한국 대중음악계의 이정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대중가요는 일제부터 내려온 노래들이나, 이른바 ‘선진국’ 노래들이 대종을 이뤘다. 한편엔 트로트, 다른 한편엔 모던 팝이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 대중은 지금 여기의 삶과 동떨어진 이들 노래를 통해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하거나, 욕망을 내뱉었다. 특히 ‘사랑 타령’은 당시 가요의 절대 문법이었다.
앨범 <김민기> 수록곡은 이런 노래들과 비교하면, 중고교 음악 교과서에 실린 노래 같았다(실제로 먼 훗날 ‘아침이슬’과 ‘작은 연못’은 중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는 물론 애상의 맥락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유행가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을 법한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시대에 대한 고민, 이웃의 고통 따위로 채워져 있었다.
당시 ‘인간의 노래’을 꿈꾸던 가수 권진원에게 이 앨범은 하나의 전율이었다. “(사랑이란 말이 이 음반에는)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였다.”
이 앨범 발매 뒤 김민기가 가장 자주 듣던 질문 가운데 하나도 ‘어떻게 당신의 노랫말엔 사랑이란 말이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친구들이 그렇게 끌려가고 구속되고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고 있는데,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어떻게 그런 노래를 할 수 있겠어요.”
‘조개껍질 운운’하는 노래는 윤형주의 ‘라라라’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노래는 1969년 여름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만난 여성들을, 속된 표현으로 ‘꼬실’ 속셈으로 윤형주가 지었다는 게 가요계의 속설이었다. ‘라라라’는 1970년대 청춘들이 생각 없이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 당시를 대표하던 한국의 유행가였다. 윤형주가 제목도 붙이지 않아 처음엔 노래의 도입부를 그대로 인용해 제목으로 삼았다. 1972년 윤형주의 첫 앨범 ‘그님’이 나올 때쯤에야 ‘라라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풍토에서 나름대로 파격적인 가창과 메시지를 선보인 송창식, 조영남, 이장희의 노래도 크게 보아 ‘사랑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김민기와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이들이었다. 송창식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형’이었고, 조영남은 민기가 인정하는 술친구이자 선배였다. 이장희와는 이른바 ‘지음(知音)’의 관계였다. 이들은 ‘청개구리’ 행사에도 참여했고, 양희은 등 후배들이 오비스캐빈이나 금수강산 무대에서 용돈을 벌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김민기가 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주던 이들이었다.
앨범 <김민기>의 기획자이자 제작자, 그리고 ‘물주’이기도 했던 최경식은 이 앨범 재킷에 이런 발매사를 올렸다. 젊은 시절이나 말년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김민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한 글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언젠가 방송국에서 민기에게 내가 ‘김민기 논(論)’을 쓰겠다고 했더니 김민기가 ‘김민기 놈?’ 하고 되물어 거기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던 일이 생각난다. 민기는 그렇게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쓸쓸한 친구다.
그의 노래 속엔 대체로 콧대 높고 줏대 있는 ‘젊은 한국’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며 오래 기다려야 하는 스튜디오 밖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기타로 조용히 클래식 소품을 연습해 보던 그의 모습이나, 어느 날 오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빡 비를 맞아 뼛속까지 젖었을 그가 맨발로 내 사무실에 걸어 들어오던 일(그는 금붕어처럼 뻐끔하니 입을 벌린 구두를 버리고 왔다고 했다)이며, 뭇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국산품 노래를 고집하던 일 등등. 그러한 그의 일상생활은 그의 음악 속에 미화되거나 위장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 순수하게 구현돼 있다.
이번 첫 디스크를 위해 특별히 음악적인 헌신을 보여준 정성조 쿼텟과 김광희 양에게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한마디로 민기는 ‘복도 많은 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앞으로가 그의 가능성과 창조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본격적인 ‘김민기 논’은 그때 그날로 미루기로 하겠고, 끝으로 이 디스크가 민기의 참가치나 숨은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은 분에게 권한다.”
최경식이 본격적으로 ‘김민기 논’을 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김민기는 불온한 ‘놈’으로 정권에 찍혔고, 앨범 <김민기>는 발매는 물론 시판, 방송도 금지됐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정권 아래서 김민기는 저의 이름으로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최경식은 유신체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79년 미국으로 아예 떠나버렸으니 더 논할 수도 없었다.
발매 금지의 직접적인 이유는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받아, 신입생들에게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와 번안곡 ‘우리 승리하리라’, 그리고 구전가요 ‘해방가’를 가르친 것이었다. ‘해방가’는 학생 데모 때 불리던 몇 안 되는 구전가요였고, ‘우리 승리하리라’는 본래 찬송가로 불렸지만, 미국의 피트 시거가 포크 송으로 편곡하면서 반전 민중가요로 불렸다. 정권의 코털을 뽑은 노래는 김민기의 ‘꽃 피우는 아이’였다. 노랫말 가운데 ‘무궁화꽃이 피지 못하는’ 대목에 자극을 받은 정보기관이 발매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음반사를 압박해 시중에 깔린 음반을 모두 회수해 파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이 노래는 무궁화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는 불모의 시대를 비판한 반정부 가요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했다. 레코드사가 초판을 500부만 찍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유신정권은 대중예술에 대한 더 엄격한 통제를 위해 ‘공연 활동 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김민기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있던 모든 노래가 ‘공식적인’ 금지곡으로 낙인찍힌 것은 이때였다. 이전까지의 발매 금지, 방송 금지 따위의 조처는 권력과 그 부역자들의 자의적인 처분이었다. ‘가요계 정화’ 이후 당국은 변칙적으로 발매되고 유통되는 음반까지도 색출해 파쇄했다. 앨범 <김민기>에 대한 2차 확인 사살이었다.
최경식은 앨범 제작 당시 CBS의 음악 담당 부서 책임자였다. 앨범 재킷의 크레딧 칸에 기획 제작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의 이름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김민기는 오랫동안 팔자에도 없는 ‘저작권 소송’을 벌여야 했다.
앨범 <김민기>가 불과 5개월 만에 판매 금지되자, 이 앨범은 오랫동안 지하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됐다. 1987년 김민기의 노래가 해금되자, 그 지인은 자신이 앨범의 제작자라며 다른 레코드사에 저작권을 팔았고, 이 레코드사는 김민기의 뜻과 무관하게 CD로 복각해 앨범 <김민기>를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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