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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간디와 킹 목사에 비견될 위대한 지도자"

[전문번역] 로이터 통신 추모기사 "내전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위인"

이승선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2-06 오후 4:34:21

 

5일(현지시간) 95세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의 일생에 대해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가장 놀라워 하는 점은 그가 증오심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다. <뉴욕타임스>는 만델라의 추모 기사에서 "지난 2007년 이번 추모 기사에 반영하기 위한 인터뷰에서 바로 그 질문을 했다"면서 "끔찍한 고통을 겪은 뒤에도 어떻게 증오심을 통제할 수 있느냐"고 만델라에게 물었을 때 그가 "질문 같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한 당시 답변을 공개했다. 그의 답변은 "증오는 마음을 짓누른다. 생각을 방해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력이 없다"였다.

<뉴욕타임스>는 "젊은 시절을 제외하고 만델라는 조국을 분열시킨 인종차별에 대한 증오심을 진정으로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만델라는 20세기 전세계를 통틀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과 비견될 만한 위대한 지도자이며, 정치인(politician)이 아니라 위대한 정치가(statesman)'였다"고 추모했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복잡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6일 <로이터> 통신이 '추모기사'로 전한 그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지금 남아공이 겪고 있는 심각한 불평등 등 사회적 문제들의 책임을 만델라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로이터> 통신의 '추모기사'를 전문번역한 것이다(☞
원문보기)<편집자>
 

▲ 전세계에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 마지막 시기였던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만델라. ⓒAP=연합뉴스


인종차별 종식과 화해에 자신을 바쳤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인종차별의 굴레에서 다인종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는 평화와 화해의 상징,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소수 백인이 지배하던 시절 반정부 투쟁으로 30년 가까운 옥살이를 했지만, 만델라는 그가 가진 명성과 카리스마를 인종차별 종식에 쏟아부었고, 결과적으로 내전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다.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상처를 치유할 때가 왔다. 우리를 갈라놓은 분열을 넘어설 순간이 왔다"면서 "마침내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이뤘다"고 역설했다.

1993년 만델라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를 3년전 석방하고 인종차별 종식 협상에 응한 백인 지도자 F.W. 데 클레르크와 공동 수상이었다. 만델라는 세계를 상대로 정치적 억압에서부터 에이즈 퇴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을 위한 투사로서 돋보이는 역할을 했다.

만델라는 86세 생일을 앞두고 그를 추앙하는 국민들에게 "이제 날 부르지 말라. 내가 찾을 것"이라면서 2004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공직에서 물러났어도 그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공적 인물이었다. 자유와 존중, 인권에 대한 흔들림없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빛을 발한 것이다.

1963년 반역죄로 기소돼 자기 변호를 할 때나, 늙어가는 노정치인으로 세계 지도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할 때나, 그는 절제된 어조와 종종 익살스러운 유머를 섞어가며 엄격한 도덕성의 표상으로 감화를 주었다.

남아공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디네 고르디머는 "만델라는 남아공 국민에게는 어디에서건 시대의 중심"이었다고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목숨 바칠 각오"

만델라는 장기간 옥살이를 하던 시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수감자였으며, 남아공 국민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지도자였다.

1963년 중범죄로 기소된 '리보니아 재판(반정부 인사들이 체포된 장소가 리보니아. 편집자)'에서 만델라가 피고인 석에서 한 진술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나는 백인의 지배에 저항하며 투쟁했고, 흑인의 지배에 대항해 투쟁했다."

"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꿔왔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사회를 소망해왔다."

"이것이 내가 삶의 목적이며, 필생의 목표로 삼은 이상이다.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상이다."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아프리카인만 거주한 지역)의 템부 부족장의 최고위 참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도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는 백인 지배에 저항하는 투쟁에 일생을 바치기로 했다. 엘리트 흑인 대학인 포트하레대에서 들어갔으나 졸업 직전인 1940년 자퇴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운동에 투신해 1944년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와 함께 청년동맹 조직을 결성했다.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변호사가 되었다. 그가 운영한 변호사 사무실은 당시 흑인을 변호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1952년 그와 동지들은 공산주의활동금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9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 무장 투쟁 나선 최초의 인물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해 무장 저항투쟁에 나선 최초의 인물이며, 1961년 줄루에서 '민족의 창'이라는 ANC의 무장조직을 결성하며 지하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남아공을 떠나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게릴라전을 연구하고 ANC에 대한 지지세력을 구축했다.

1962년 귀국한 뒤 만델라는 체포돼 선동과 불법 출국 혐의로 5년형에 처해졌다. 복역 중 그는 파괴활동과 정부 전복 기도 혐의로 다른 반 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들과 함께 리보니아 재판에 회부됐다.

적대세력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만델라는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남아공 흑인들이 인종차별 정책으로 압제와 폭력, 강제이주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동족들로부터 격리됐다.

그는 케이프타운 근처의 유형지 로벤 섬 감옥에 갇혀 18년 동안 있다가 본토 감옥으로 이송됐다. 1976년 대규모 흑인 집단거주지 소웨토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감옥에 갇혀있었다. 1980년 도처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협상에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만델라를 협상 대상자로 지목했다.

수감 말년 그는 당시 P.W 보타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 데 클레르크를 만났다. 1990년 2월 11일 만델라는 빅터 버스터 감옥에서 걸어나왔다. 당시 부인 위니와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27년만에 석방된 만델라 "71세에 새 삶 시작"

만델라는 "마침내 저 문들을 통해 걸어나오면서 나는 71세의 나이에도 내 삶이 새로 시작하고 있다고 느꼈다. 1만 일의 투옥 생활이 마침내 끝났다"고 그 날의 소감을 기록했다.

만델라가 석방된 이후 4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폭력으로 사망했다. 사망자는 대부분 ANC 지지자와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만든 흑인 우파 인카타자유당을 지지하는 줄루족들 사이의 충돌로 발생했다. 여기에 우파 백인들도 민주화 운동을 막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만델라는 1993년 백인 암살범에 의해 유명한 공산당 지도자 크리스 하니가 살해되자 인종갈등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국에 방송된 TV 연설을 통해 자제를 호소했다. 그 해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는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ANC와 당시 정권과의 협상은 1991년부터 시작됐다. 그 결실은 1994년 남아공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4.27 총선이었다. 투표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한 폭력도 벌어졌다. 요하네스버그 흑인거주지에서는 총격전이 발생했고, 줄루족이 장악한 콰줄루 나탈 지역에서는 내전 수준의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전국을 돌면서 그를 추앙하는 흑인들을 끌어들이고, 백인들에게도 새로운 남아공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선거 결과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1994년 5월 10일 프레토리아에서 거행된 그의 대통령 취임식은 모든 인종의 해방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만델라는 화해를 통치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만난 교도관들을 불러 차를 함께 마시고, 1995년 한때 백인 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아공 럭비 국가대표팀의 상의를 입고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럭비월드컵 결승전을 참관하면서 백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화해를 위한 만델라의 노력의 상징이었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상호간에 저질러진 범죄들을 조사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내분으로 분열된 다른 나라들에게도 모델이 되었다.

장기집권 유혹 뿌리치고, 에이즈 퇴치 등에 나서

만델라는 경제 분야에서는 애매모호한 정책으로 자주 비판을 받았지만, 아프리카의 장기독재라는 관행을 떨치고 스스로 권력을 이양했다. 만델라는 그저 물러나 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아공의 에이즈 위기에 맞써 싸우는데 힘을 쏟았다.

후임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에이즈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때, 만델라는 에이즈 감염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에이즈에 대한 만델라의 투쟁은 개인적인 일이 되기도 했다. 2005년 초 그는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마저 에이즈로 잃었다.

또 오랜 투쟁생활의 부담 탓인지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동지였던 부인 위니와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1996년 남아공 국민은 두 사람의 이혼하는 아픔을 함께 했다. 하지만 1998년 80세 생일을 맞아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의 사망으로 홀로 된 그라사 마셸과 재혼했다.

지인들은 만델라를 그의 출신 부족에서 위대한 인물을 상징하는 이름인 '마디바'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미와 친철, 관심과 품위에 찬사를 보냈다.

개인적 아픔과 남아공의 아픈 현실

만델라는 투옥생활의 버릇을 깨지 못해 새벽 4시와 5시 사이에 잠을 깼다. 기상한 뒤 운동과 독서를 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고, 흡연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젊은 시절 아마추어 복싱선수였던 만델라는 훈련으로 체득한 수양과 기술이 감옥생활을 버티고, 석방 후 정치 투쟁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됐다고 종종 말했다.

하지만 수감생활과 고령의 나이는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 만델라는 결핵으로 치료를 받았고, 석회 채석장 노역 후유증으로 나중에 눈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2001년에는 전립선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력을 여전히 강했다.

그 해 9월 그는 기자들에게 "암이 이겨봤자 나는 더 큰 승리자가 될 것"이라면서 "저 세상에 가게 되면 첫번째 할 일은 회원증 갱신을 위해 ANC 사무소를 찾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남아공 국민 대부분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 '무지개 나라'라는 다인종 국가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만델라가 관용과 화해로 이룬 유산이 최근 위협을 받고 있다. ANC 내부의 파벌 싸움과 사회 전반적으로 갈등이 커졌다. 남아공은 정치적인 해방을 얻었지만, 여전히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만델라가 세계무대에서 주목을 받은 마지막 모습은 2010년 겨울을 맞은 남아공에서 털모자를 쓰고 골프카트를 탄 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 모인 9만 여명의 관중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하던 때였다. 남아공 월드컵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 이 나라에서 열린 최대의 국제적 행사였다.

그는 퇴임 직전 남아공 TV 연설에서 "국민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국민이 결정할 몫"이라면서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박한 기여를 한 평범한 남아공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 이승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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