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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은 현실화 될 수 있을까?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은 현실화 될 수 있을까?<연재> 정창현의 ‘김정은시대 북한읽기’ (36)
정창현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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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6  08: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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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어느 분의 인터넷 카페에 올라있는 글 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행적 하나를 발견했다. 2005년 12월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와 관련해 소회를 밝힌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당시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의 준말이다)에서는 매주 목요일인가, 야튼, 날을 정해두고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었다. 또 취재를 핑계삼아 민교협 사무실에 들린 일이 있었다. 머리가 허연 영감님 몇 분이 새파란 젊은이를 앞에 두고 열심히 받아 적기 연습을 하고 계시더라. 허연 머리카락 휘날리시는 분들은 강(정구) 선생을 비롯하야 서울대 최갑수 선생 등등이었으며 그 분들을 상대로 칠판 앞에 선 새파란 강사는 <중앙일보> 정창현 기자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이 잡수신 교수님들이 한낱 기자나부랭이를 불러다가, ‘우리는 배울터이니 너는 나이 먹은 우리 쫌 깨쳐다오.’ 정창현 기자의 강의내용 또한 당시 퍽이나 인상적인 것이었으나 내 맘은 그 노친네들의 학구열에 더 감동했었다.”

까맣게 잊었던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1999년 연말이거나 2000년 초였던 것 같다. 발표주제는 ‘2000년 남북관계 전망’이었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는 당시 발표에 대해 민교협 교수님들은 대부분 회의적 반응으로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친북좌파’로 몰리고 있고, 반공분단구조가 완고한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 더구나 소수파정권인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반론이었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반론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분석과 현실의 거리감

   
▲ 2000년 6월 13일,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공항에서 악수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그러나 ‘남북관계의 구조적인 분석’과 달리 실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한 후 김대중 대통령은 민간 채널과 국가정보원 채널을 통해 북측에 호응을 촉구하고 있었고, 1998년 12월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전략’을 확정했다. 1999년 5월에는 남북당국간 비공개접촉이 있었고, 5월 26~28일에는 월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평양 방문이 성사됐다. 그해 10월에는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보고서’가 채택됐다. 북미간의 물밑접촉에서 대부분의 쟁점사안에 합의가 이뤄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1999년 말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뚜렷해졌고, 2000년에 들어서자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대비한 기획기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2000년 3월 박지원-송호경의 싱가포르 비밀회동을 시작으로 3차례 비밀회담 끝에 4월 8일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졌고, 마침내 2000년 6월 13일 평양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이뤄진 이 악수는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지정학(地政學)을 단숨에 바꿔놓은 대사건이었다. 정상회담 직후 미국 클린턴 대통령,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일본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그리고 러시아연방의 푸틴 대통령은 일제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거나 한국 방문 의사를 밝혔다. 50년 전 6.25전쟁을 통해 한반도 냉전질서를 심어놓고 떠나버린 주변 4강이 한반도 새 질서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첫 남북정상회담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서 일어났다. TV를 통해 두 정상의 악수를 목격한 국민들은 나이와 계층 그리고 좌우를 불문하고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찡’하고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분단 현실에 대한 강력한 현상타파적 에너지로 폭발했다. 이 폭발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지난 50년 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적(敵)’이라고 교육받았던 국민들은 갑자기 김정일 위원장을 환영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됐다. 또 헌법처럼 우리들이 범접하기 힘든 문서나 ‘우리의 소원’ 같은 노래에만 있는 줄 알았던 통일이 우리 맘먹기에 따라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느낌도 갖게 됐다.
 

   
▲ 2007년 10월 2일 4.25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악수를 나누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자료사진 - 민족21]

그리고 7년 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간 남북정상회담이 한 차례 더 열려 남북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안착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구조와 동북아 냉전질서는 예상보다 완고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됐다. 2009년 8월부터 2011년까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이 여러 차례 진행됐지만, ‘통일철학’도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었던 이명박 정부는 헛된 ‘북한붕괴론’에 빠져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바야흐로 남과 북을 모두 설레게 했던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지 14년, 2007년 10.4선언이 발표된 지 7년 만에 한반도는 다시 남북정상회담의 ‘기회’를 맞고 있다.

공개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거론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만남 용의를 묻는 질문에 “남북관계의 발전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며 취임 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남과 북, 남북정상회담 거론

   
▲ 1995년 판문점 북측 지역에 세워진 김일성 주석의 마지막 친필 서명 기념비. 북측 지역 판문점 견학의 필수코스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리고 이번에는 북측이 화답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강조하며 올해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과 관련한 력사적 문건에 생애의 마지막친필을 남기신 20돐이 되는 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여기서 언급한 ‘마지막 친필’은 1994년 당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등 북핵 위기 속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을 말한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당시 서명에 의미를 부여해 1995년 8월 판문점 북측지역에 ‘김일성, 1994.7.7’이라는 친필서명 비석까지 세웠다.

물론 김일성 주석이 7월 7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문서에 서명한 다음날 사망해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의 생애 마지막 친필 20돌을 강조한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한 당국 간 대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선다면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대북압박을 위한 국제공조나 대결의식에 기초한 ‘비방중상’을 중단하고 남북 간 대화와 정상회담을 통해 민족의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3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남북 관계에 대해 “우리는 불안과 분단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해 통일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보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적 석학과 정치 지도자의 칼럼을 게재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가 지난해 12월 31일 공개한 연말 특별 기고문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한 여정(Reinventing the Inter-Korean Relationship)>에서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보수언론도 올해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시대’란 화두를 던질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1월 3일 <조선일보>는 ‘통일이 미래다’란 장문의 기획기사를 실었고, <중앙일보>도 ‘신갑오개혁’이란 신년기획기사를 통해 ‘남북 이젠 대화로’ 갈 것을 촉구했다. 물론 강조점은 달랐다. 조선일보는 북한의 불안정성을 거론하며 ‘통일 대비’를 강조했고, 이에 비해 <중앙일보>는 ‘5.24 완화’를 통한 대화와 교류에 초점을 맞췄다.

조건과 상황은 비관적

그러나 ‘통일시대’를 이야기하고, 남북정상회담을 거론한다고 해서 실제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을 때 그 가능성을 낮게 전망했듯이 지금도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공감하는 바이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처럼 남북관계와 주변정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통일철학’이 있는지 불투명하고,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과 같은 실력 있는 참모진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국가안보실장 따로, 국방부장관 따로, 통일부장관 따로, 국가정보원장 따로 발언 내용이 제각각이다.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한 후 곧이어 김정은 제1위원장을 “신뢰할 수 없다”라고 발언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더구나 1월 3일 통일부가 내놓은 북한의 신년사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남북관계 개선 제안을 담은 북한의 신년사에 대해 대부분 언론과 여야 정치권이 환영입장을 밝히고, 통일부조차도 ‘관망 입장’을 내놓았으나 국가정보원과 국가안보실 등 유관기관 협의를 거친 후 정부의 입장이 돌변했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비핵화를 언급하지 않았고, 구체적 대화제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진정성이 의심되면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접촉과 대화를 제의하면 될 것을 북한의 신년사가 나온 지 이틀만에 비난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박근혜 정부는 남북대화에서 다룰 사안과 북미 또는 6자회담에서 다룰 사안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의구심을 갖는 미국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대북정책에 대한 ‘한미공조’를 이끌어냈고, 북핵문제는 북미 직접대화와 다자회담을 통해 해결하려는 원칙을 견지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지속적으로 ‘선(先) 북한의 비핵화’만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3일 통일부가 내놓은 입장에서도 “무엇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러한 입장은 1월 2일(현지시각) 미 국무부가 “우리가 유일하게 주목하는 바는 비핵화 관련 북한의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라고 평가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과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입장은 3단계로 돼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2단계까지는 비핵화 같은 조건을 걸지 않고 정치 상황과 구분해 추진하겠다는 설명과도 맞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12월 31일 기고문에서도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인 2013년 2월 12일 북한이 제 3차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기조가 유지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시작부터 ‘선(先)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신뢰프로세스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정책일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국가안보실 등 유관기관에서 ‘선(先)북한의 비핵화’를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진정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이 점에 대해 확고한 의사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박근혜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 외에 2000년의 조건과 비교해 보면 올해 남북정상회담 개최 전망은 비관적이다. 개성공단이 우여곡절 끝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NLL논쟁, 종북논란 등 지난 1년간 국내 정치의 주요 이슈들은 남북정상회담과 거리가 멀다. 지난해 어렵게 합의됐던 이산가족상봉 행사는 연기됐고, 금강산관광 재개회담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북핵문제와 평화체제를 논의할 6자회담도 개최 전망이 불투명하다. 남북정상회담 연내 개최를 예상할 수 있는 요인들이 거의 없다. 국내 정국 돌파구용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가설수준이다.

완전히 꺼진 불은 아니다

다만 불씨 자체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프레시안>과의 대담에서 남북대화를 위해 막후접촉의 필요성을 조언했다.

“대통령이 물밑 접촉과 막후 접촉을 구분해서 북한과 막후접촉을 통해 관계 개선을 타진했으면 좋겠다. 물밑접촉은 비(非)정부 행위자를 통해 북측과 소통을 하는 것인데, 비정부 행위자이기 때문에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물밑 접촉은 안 해도 좋다. 하지만 국정원, 통일부, 청와대 관계자 등 정부 당국자들이 북측과 막후에서 접촉을 할 필요는 있다. 막후에서라도 뭐가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대응을 할 것 아닌가? 대통령이 대북 막후 접촉을 시작해서 장성택 문제를 비롯해 경제개방 문제 어떻게 할 것인지 북한에 직접 물어보고 협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북한과 입장 정리하고 나중에 그것을 통일부가 공개적으로 하면 된다. 지금 이러한 과정이 없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의 구분을 따르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물밑접촉(민간채널)과 막후접촉(정부채널)을 동시에 가동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이명박 정부 때도 민간과 정부채널이 동시에 동원됐다. 박근혜 정부도 이러한 채널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4월 16일 국회 상임위원회 민주통합당 간사단과의 만찬에서 “대북 대화 창구가 필요한데, 여기 저기 줄을 대려는 사람이 있으나 그 사람들이 어떤 정부 사람들인지 알 수 없어 비선라인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북한과 대화채널을 국가정보원 등 공식라인을 통해 열어가겠다”는 의미라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같은 언급과 지난 정부 시기의 경험을 통해 볼 때 박근혜 정부는 물밑접촉단계에서 막후접촉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남북 간의 공방만으로 남북정상회담 성사여부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예측할 수 있는 단서는 있다.

11월 박근혜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발언에 대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진정으로 정상회담을 바란다면 올바른 예의부터 갖춰야 한다”며 “필요한 때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도 답변했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마련을 강조했다. 남이나 북이나 신뢰와 분위기 조성을 남북정상회담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상호신뢰와 함께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라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적어도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핵해결의 가닥이 잡혀야 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는 국내적 지지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북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은 북미대화가 진전되는 조건에서 정상회담에 나왔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은 북미대화와 6자회담이 재개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남북관계에서 보면 북측이 연기된 이산가족상봉 행사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남측이 금강산관광 재개회담에 적극성을 띠어야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북미대화, 6자회담 재개가 정상회담 성사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핵심 단서인 것이다. 남북 간 막후접촉을 통한 합의도 6자회담 재개가 뒷받침돼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구조적으로 보면 어렵지만, 올해 6자회담이 재개되고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상황적 측면에서 보면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중간선거가 있는 11월 이전까지 ‘가능성으로의 남북정상회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남북정상회담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남북정상회담은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현안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화방식이다. 특히 북한은 최고지도자 중심의 ‘유일영도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남북 정상이 만나 풀기 어려운 여러 현안을 일시에 해결하는 것이 남북 간 가장 빠른 분쟁해결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의 하나로 정상회담을 구상하거나 추진해왔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일 수는 없다. 다만,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호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일관된 정책’을 내놓아야 ‘냉전적 정치구조’를 넘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년 남북관계에 나타난 초라한 성적표를 단지 북한 탓으로 돌리는 변명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능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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