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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분단, 일곱 번째 마당

12번 테러와 암살도 '정의로운 바보'를 꺾지 못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 해방과 분단, 일곱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2 오전 12:02:52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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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해방 후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 당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해서 한국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없었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미소공위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서중석 : 미소공위에 기대서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게 현실적이었는가, 이런 논의는 현재적 시각에서 제기될 수 있다고는 본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두 나라 군대가 점령한 지역은 딱 한 군데밖에 없다. 한반도다. 독일하고 오스트리아는 네 나라가 점령했다. 베트남엔 영국군과 장제스의 중국 군대(국부군)가 들어갔다가 나중에 프랑스 군대한테 다 비워줬다. 영국군이나 국부군은 같은 패였다. 거기서 이견이 생길 수가 없었다. 또 인도네시아에선 영국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무장 해제했다. 그러고는 네덜란드 군대가 들어간다. (이와 달리) 한국에만 자본주의 세계를 지휘하는 그야말로 거대 강국으로서 미국이 남한에, 그리고 사회주의 총사령탑으로서 소련이 북한에 들어왔다.

지금 와서 보면, 어떻게 두 나라가 타협하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45년에서 1947년의 일정한 시기까지는 '두 나라가 협력해 한반도에 한국 정부를 세우자', 이런 것에 대해 상당히 노력했음을 수많은 문서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다 무시할 수는 없다.

프레시안 : 생각해볼 만한 다른 지점은 무엇인가.

서중석 : 미소공위 구성 문제다. 미소공위는 군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지금 우리 정부에서도 군인들이 요직을 맡고 있는데, 군인들은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걸 작전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다. 미국과 소련의 군인들 모두 자국의 이해를 실현하는 데 작전으로 임하고, 한국인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하는 사고가 좀 약했다. 그런 점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미소공위를 탓하기 전에 '우리 정치 세력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서중석 :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우파, 중도 좌파는 미소공위가 성사되도록 무척 노력했다. 여운형은 또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기 전에 자율적 정부를 먼저 수립하자. 그런 다음에 미소공위한테 그걸 인정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했다. 자율적 정부라는 건 좌우 합작 정부 아니겠나. (이와 달리) 극우와 극좌는 미소공위 성사 쪽으로 이끌어갔다고 보기 어렵다.

프레시안 : 극좌와 극우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극좌는 겉으로는 미소공위 지지 성명을 연달아 냈다. 적극 협력하겠다고 하니까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반탁 투쟁 세력은 전부 배제하자. 또 친일파는 절대 배제하자', 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친일파가 너무 광범위할 수 있다. 또 반탁 투쟁 세력은 친미 세력 아닌가. 친미 세력의 주류를 배제한다고 하면 미국이 무엇 때문에 미소공위에 나오겠나. 미국이 안심하고 미소공위에서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도록 좌익도 고려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일방적인 주장을 펼쳤다. 참 편협했다고 본다.

극우는 더 문제가 되는 행동을 취했다. 미소공위에 아주 직접적으로 거리를 뒀다. 미국으로선 친미 세력이 미소공위에서 이뤄지는 임시정부의 주력이 돼야 하는 것 아니었겠나. 그런데 (극우는) 미소공위에 협력하지 않았다. 제2차 미소공위에 대해선 극우 세력이 아주 노골적인 공격을 한다. 그러니까 (미국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 하지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소공위가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극좌와 극우가 미소공위에 과연 현명한 태도를 취한 건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선 해도 너무했다. 미소공위가 완전한 성공까진 못 가더라도 적어도 몇 단계는 갔어야 하는 건데, 최소한의 첫 단추도 못 끼운 것 아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좌와 극우의 탓이 크다고 본다. 그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미소공위 또는 미국과 소련을 먼저 비난하는 건 너무 발 빠른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정의로운 바보'들…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 성공 여부만 따져선 안 된다

프레시안 : 이는 미소공위 시기 좌우 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물음표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이런 견해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분단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 됐고 따라서 이승만의 단정 노선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중석 : 많은 분단 세력은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을 비난한다. 1950년대엔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에 참여한) 이 사람들이 요시찰인 명부에 들어가고 그랬다. 감시 대상이었다. (정부에서 이들을) 아주 사갈시했다. 비국민 취급을 했다. 일제 때 비국민이면 얼마나 무서운 거였나. 국민들한테 완전히 따돌림을 당할 수 있는 존재였던 거다. 그렇게까지 몰아세우고 그랬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많은 정치학자가 '실패한 것 아니냐', 이렇게 써놓고 그랬다. 난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성공 여부만 따지는 게 맞는 건가. 그렇게 따지면 일제 때 독립 운동이란 게 언제 성공할 수 있었나? (예컨대) 3.1운동, 참 엄청난 민족적 의의가 있지 않나. 헌법 전문에도 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성공 여부만 놓고 따진다면) '그건 실패를 거듭한 것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수많은 독립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성공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으로서 일본과 싸우고, 그러다 죽고 처형당하고 고문당해서 몸이 망가지면서도 싸우고 또 싸운 것 아닌가.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것과 관련해 '우리한테는 무엇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가지고 얘기해선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난 모든 독립 운동가에 대해 단재의 이야기가 맞다고 본다. 당장에 성공하길 바랐다면, 강력한 일본에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바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재산 전부 탕진해가면서, 자식들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독립 운동에 그야말로 몸을 던져서 그 많은 고초를 겪고 죽음에 이르고 한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의, 그것 때문 아닌가. 그 사람들이 분단 국가, 분단 정부를 꿈에라도 생각이나 했겠나.

프레시안 : 오늘날 한국이 있을 수 있는 건 그런 '정의로운 바보' 조상들 덕분이다.

서중석 : 해방 이후도 난 마찬가지라고 본다.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은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었다. (성공 여부부터 따지기 전에) 뭐가 옳은가, 이 문제도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사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지만, 양자를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거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좌우 합작, 남북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통일 독립 운동이라고 했다. 독립 운동의 연장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합작만이 민족의 살길임을 아주 강한 신념으로, 쉬지 않고 역설했다. '38선을 경계로 북에 소련군, 남에 미군이 있는 상황에서 친미·반소 혹은 친소·반미로 나가면, 그래서 어느 일방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만 관철하려 한다면 통일 정부가 어떻게 가능하겠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두 나라의 호의에 감사하되, 우리 주체적으로 합작을 하고 스스로 중심이 돼서 임시정부를 미소공위가 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주장했다. 아울러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도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주장을 해선 절대 안 된다', 이런 논리도 강하게 폈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이런 이야기다. '한반도는 예전부터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접합하는 지역 아니냐. 이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세력이 들어와 있다. 이처럼 중요한 지역에서 자기 당파 이해만 관철하려 하면 내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고 외적으로는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불신을 강하게 사 절대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우리가 친미·친소 정책을 견지함과 동시에 내부에서 경쟁은 하더라도 좌우 합작을 이뤄내면,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경쟁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다. 한반도를 잃지 않으려고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우리를 지원할 거다. 지정학적 요인을 패배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진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걸 여운형과 김규식, 특히 여운형이 아주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 1945년 8월 16일, 휘문중에서 해방의 감격을 담아 연설하는 여운형.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소장


12번의 테러와 암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프레시안 : 좌우 합작에 앞장선 이들은 좌익과 우익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특히 여운형은 거듭 테러를 당했다.

서중석 : 좌우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을 아주 지독할 정도로 공격했다. 합작 노선을 마구 흔들어댄 거다. 여운형은 여러 차례 테러를 당한다. 예컨대 1946년 10월 7일은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한 좌우 양쪽 대표가 모여 기자들한테 공식 발표를 하는 날이었는데, 이날 아침 여운형은 갑자기 테러를 당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갈 수가 없었다. 그 테러는 틀림없이 좌익에서 한 걸로 보고 있다. '여운형처럼 중요한 인물이 그 자리에서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면 합작에 반대하는 우리는 뭐가 되느냐', 이래서 여운형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테러를 해버린 거다. 여운형은 12번 테러를 당하다 결국 암살된다. 대부분의 테러를 극우가 했다고 보나, 몇 번은 좌익에서도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장례식에 참 많은 사람이 울면서 모여들었다. 그렇게 인파가 몰렸는데, 남로당은 꽃다발조차 보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 당시 써놓은 글이 있다. (남로당은) 처음에 (여운형이 남로당 노선을 따르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모시겠다고 했었다. 세상에, 자기 당의 영수로 모시겠다던 사람이 분단의 길목에서 그야말로 억울하게 죽은 건데 아무리 기분 나빠도 꽃다발 정도는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와 달리) 북한에선 상당히 조의를 표했다.

프레시안 : 김규식도 고초를 겪었다.

서중석 : 극우 세력으로부터 참 여러 차례 비난을 받는다. 예컨대 1947년 1월에 하지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정은 '미소공위를 다시 열 테니 이제는 반탁 투쟁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거듭 당부했다. (그런데 극우는) 외려 반탁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맹렬히 반탁 투쟁을 하는데, 그때 김규식을 아주 심하게 공격했다. 미군정 자료를 보면, 김규식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매장하려는 짓을 우익에서 꾸미고 있다는 내용마저 나온다.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힌 인물 아닌가. 그렇게 3영수 중 한 분으로 떠받들다가도, '반탁 투쟁만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단정 운동에 유리하다'고 볼 때는 사정없이 빨갱이로 몰아버린다는 것은 참 한국 현실이 어떤가를 얘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극과 극의 대결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생각할 대목이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국내에 사회주의가 1920년부터 들어왔다고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그때부터 한국에선 극과 극의 대결이 나타난다. 일제 때 좌파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조직이 조선공산당이었다.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대종을 이뤘다. 그 시기에 그런 곳은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련은 공산 국가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에서도 공산당이 그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은 없었다. 이건 일제 통치가 워낙 악랄하고 억압적이었기 때문에 반대 세력 사이에서도 강하고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곳이 세를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지주·부르주아 세력의 대종은 친일파와 민족 개량주의자, 이쪽으로 기울어버렸다. 특히 일제 말에 각계를 대표한다는 인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나. 친일 정도가 아니지 않나. 일제의 침략 전쟁, 군국주의에 편승해 그 앞잡이가 되고 황국 신민화에 앞장서지 않았나. 이러니 일제 때 너무 심한 극과 극의 대결이 나타난 거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이 신망을 얻었다. 한국인들이 건준과 여운형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겠나.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는 데 있어 여운형의 노력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운형의 인기가 그렇게 높았던 거다. 그러나 제일 강력한 조직은 조선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민당, 이승만 쪽과 극과 극의 대결을 하는 것 아닌가.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극단적인 점은 비슷하다. 이승만 정권은 지금으로 따지면 중도적 혁신계로 볼 수 있는 조봉암이나 진보당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 체제는 그보다도 훨씬 더 심한 1인 독재 정권이었다. 일제 시대 이래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중도파, 균형 감각을 가진 합리적 보수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될 수 없었다. 이런 점도 우리 근현대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난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게 심한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합작을 죽을 때까지 추진했던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같은 사람들이 중요한 활동을 했다고 평가한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 노선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달려오게 만든 '한반도의 힘'

프레시안 : 합작 노선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가.

서중석 : 남북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남북기본합의서(1991년)가 말해주듯이, 남북은 1990년대에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지만) 교류하고 대화하고 협력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2000년에는 드디어 정상 회담이 열리고 6.15선언까지 나오는 것 아닌가. 정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거다. 이 정상 회담을 전후해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얼마나 주시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당시 남북 정상 회담은 세계 주요 언론의 톱뉴스였다.

서중석 : 그랬다. (사실 그 무렵) 중국하고 북한은 무지하게 사이가 나빴다. 왜냐하면 (1990년) 소련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것만 해도 북한으로선 참을 수가 없는데, 1992년에는 중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않았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김일성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당혹하고 화를 내고 그랬던 거다. 그러면서 아주 냉랭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6.15정상회담 정보를 중국은 빨리 알았다. 그에 따라 6.15정상회담 직전부터 중국에서 고위 사절이 오고 김정일이 장쩌민을 찾아가고 또 중국에서 고위 사절단이 오면서 큰 원조가 중국으로부터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도 바로 움직였다. 푸틴 대통령이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했다. 러시아도 대한민국을 승인하면서 한때 북한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었나. 그런데 (6.15정상회담을 보며)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던 거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이었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으로 가서 김정일과 손을 맞잡는 사진이 우리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나오지 않았나. 그러면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됐다. 그 후 미국이 권력 교체기에 들어가고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방북이) 안 되긴 했지만, 하여튼 미국 국무장관이 달려가고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질 뻔했다는 것, 이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에 못지않게 큰일이 북한과 일본 사이에 있었다. 북한과 일본은 지구에서 제일 사이 나쁜 나라 중 하나다. 이 둘은 정말 사이가 나쁘다. 남한과 일본이 사이 나쁜 건 저리 가라다. 그런데 일본이 6.15정상회담이 이뤄질 무렵부터 갑자기 쌀을 줬다. 그러고는 2002년에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직접 방문해 김정일과 정상 회담을 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곧 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이 격앙되는 일)만 발생하지 않았으면 국교가 정상화되고 북한이 엄청나게 달라질 거라고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았나.

프레시안 : 6.15정상회담을 즈음해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참 바쁘게 움직였다.

서중석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난 김정일이나 북한이 대단해서가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남한과 북한이 협력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고 한반도가 단결할 걸로 보이니까 강대국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거다. 지정학적으로 워낙 중요한 곳 아닌가, 세계 4대 강대국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접합하고 있는 곳이 또 어디 있나. (한반도) 하나밖에 없다. 이건 해방 직후하고 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남북 관계를 맺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를 해줬는가, 이것을 우리가 계속 생각하면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난 이 점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김덕련 기자,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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