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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빨갱이였을까

조현 2014. 02. 25
조회수 1408 추천수 0
 

 

 

거룩한 순교자의 교회1-1.jpg» 거룩한 순교자의 교회.

 

남미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주무대다. 세계 가톨릭 신자의 절반이 몰려 있고, 개신교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륙이다. 따라서 종교 간 경쟁이 가열되는 현장이다. 특히 군부독재의 억압과 자본 수탈, 빈부 격차의 심화로 고통받는 빈자들과 피압박민들을 지원하고 나선 해방신학의 기수들이 1960년대 이후 십자가의 길을 자처한 땅이기도 하다.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비판하고 나선 이 지역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더욱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식 개신교와 유럽식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한국 그리스도교는 비슷한 역사의 고난을 헤쳐 나온 남미 쪽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교육훈련원이 남미 신학 현장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에큐메니컬 신학생 해외훈련’에 동행하게 되었다. 지난 3일부터 15일까지 12박13일간이었다. 교육훈련원은 지난 5년간 장로회신학대(장신대), 감리교신학대(감신대), 한신대 등 6개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공동수업을 진행하며 매 학기 해외 교회 현장을 방문해왔다. 이번엔 장신대, 호남신학대, 감신대 신학생 12명이 남미 동포 1.5세인 멕시코장신대 홍인식(56) 교수를 지도교수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교회와 공동체, 신학계를 둘러보았다. 탐방 현장을 중심으로 ‘남미 해방신학’ 시리즈를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해방신학은 추상적인 하늘의 신을 땅으로 모셨다. 신 예수가 인간으로 내려온 것처럼. 그들에게 신앙과 현실, 천국과 지상이 분리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보수 우익들은 비판 종교인에 대한 종북몰이와 함께 ‘종교인의 현실참여’ 에 대해 비난했다. 남미에서 해방신학 실천자들도 독재자와 그 옹위 세력에 의해 살해와 고문과 같은 고난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왜 많은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약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런 고난 속으로 걸어들어갔을까. 

 

소공동체-최승욱 사진-1.jpg» 소공동체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 마을주민들.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31시간 만에 도착한 브라질 상파울루는 70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탐방단이 처음 찾은 곳은 상파울루에서 차로 두시간 거리인 자르징안젤라시의 산마르티네스교회(거룩한 순교자의 교회)였다. 1960년대 말부터 성직자들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민촌으로 들어가 설립해 해방신학의 실천 현장이 된 기초공동체 중 하나다.

 

 이 소공동체는 지금도 8000여개의 천막이 있는 빈민촌에서 60여만명이 모여 사는 이 도시의 센터 격이다. 공동체의 소예배당으로 들어가니 여느 예배당과는 사뭇 다르다. 허름하고 낮은 탁자 앞에 의자들이 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누구는 위에 있고 누구는 아래에 있거나,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배우는 게 아니라 빙 둘러앉아 대화하는 소공동체 정신을 보여준다. 

 

자이메 신부 싱글사진-1.jpg» 자이메 신부.

 공동체 책임자인 자이메 크로우(68) 신부가 맞는다. 자상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다. 철저한 보수적 신앙을 고수하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된 그는 1969년 브라질에 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사독재와 빈곤이었다. 그는 군사독재의 탄압에 의해 죽어가고, 굶주리는 빈자들에게 ‘그래도 신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시대 상황은 어두웠지만 교회는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할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 초대 브라질주교회의 의장으로 제2회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브라질 빈곤층의 대부 엘데르 카마라 주교가 있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빈자와 피억압자들을 지켰기에 ‘희망의 추기경’으로 불린 상파울루대교구장 에바리스투 아릉스 추기경이 있었다. 

 

 자이메 신부는 “교회가 기초공동체·인권·노동·빈민 사목 4가지를 우선 선택하도록 한 아릉스 추기경의 뜻에 동참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곳은 연간 10만명당 120명이 살해돼 전세계에서 살인율이 1위인 지역이었다. 

 “경찰서 하나 없는 이곳에서 경찰이 하는 거라곤 말썽이 생기면 총을 들고 와 사람들을 쏴 죽이고 가버리는 것이 다였죠. 인구 60만명의 도시에 병원 하나가 없어 응급조처만 하면 살 수 있는 환자들도 쉽게 죽어갔어요.” 

 

 가난·폭력·마약·살인으로 점철된 아수라장 이야기를 그가 먼 나라 일인 양 들려준다. 그 시절은 기도 없이 버티기 어려운 때였다.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독재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남미의 군사첩보기관 지도자들이 모여 반정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소탕하기로 한 콘도르 작전은 미국의 묵인 및 동조 아래 남미에서 5만명의 희생과 3만명의 행방불명, 40만명의 투옥으로 이어졌다. 1964~78년 엘살바도르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 등 성직자 72명이 암살당했다. 

 노조 지도자였던 자이메 신부의 절친한 친구도 암살당했다. 요한바오로2세가 등장한 뒤 교황청마저 해방신학을 공산주의로 매도하며 탄압에 나섰다. 한때 현지의 고통을 무시한 십자군식 처사에 남미의 추기경 50명이 연서명으로 반대하기도 했지만, 요한바오로2세는 남미의 교구 분할 등을 통해 해방신학을 와해시켜갔다.

 

자이메 신부-완성-1.jpg» 교황 프란치스코 사진 아래 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된 남미의 순교자들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는 소공동체의 벽. 자이메 신부가 가리킨 인물은 노조지도자이자 그의 친구로 지난 79년 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된 산토 디 아스다 실바.

 

 그러나 자이메 신부는 이 빈민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을 넘어 루터회,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장로교 등 개신교 교회들과 손잡고 지역문제를 해결했다. 이 지역에서만 기초공동체가 16개로 늘었고, 공동체에선 성서를 함께 읽고 재봉과 제빵, 미용 등 기술을 가르치고 심리치료를 해갔다. 

 이 예배당 벽엔 아마존 열대림에서 노예노동과 인권침해, 환경 훼손 등에 저항하다 암살당한 도로시 스탱 수녀와 로메로 대주교를 비롯한 순교자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 사진들 위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이 있다.

 “이제 살인율은 10만명당 25명으로 낮아졌어요. 2008년엔 250병상 규모의 시립병원이 세워졌지요.”

 자이메 신부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햇살이 비친다. 느리지만 가느다란 희망을 그와 빈민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자르징안젤라(브라질)/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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