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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낯선 간판, 북한이 달라졌다

 

[수양딸 찾아 평양으로 18] 북한 구월산 그리고 포전담당제

16.09.04 15:51l최종 업데이트 16.09.04 18:13l
글·사진: 신은미(eunmishin)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해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과연 박 교수는 인민복을 입을까

오늘(2015년 7월 6일)은 황해도 구월산에 가는 날이다. 단군이 수도를 평양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임꺽정의 이야기도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내가 구월산에 가보고 싶은 이유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북한의 5대 명산인 백두산, 금강산, 칠보산, 묘향산, 구월산 중 유일하게 못 가본 산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 나를 낳아준 조국 한반도의 구석구석을 다 보고싶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 내려오니 아직 약속 시각보다 일러서인지 우리 안내원 김혜영 선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박 교수의 안내원 송영혜 선생이 초조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송 선생, 어디 아파요? 얼굴 빛이 안 좋네."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긴데 박 교수님은 함께 식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놀란 얼굴로 묻는다. 

"아니요. 식사하러 안 왔는데…. 아니, 송 선생, 무슨 일 있어요?" 
"사실은 어젯밤 내내 박 교수님이 인민복 구해 입고 머리에 꽃 달고 오늘 나올 거라는 말이 자꾸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자는 둥 마는 둥하고 내려와 박 교수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머있고 화통한 박 교수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나도 걱정이다. 인민복 상의 단추를 몇 개쯤 풀어헤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위에 꽃을 달고 나타날 상상을 하니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안심시켰다. 

"사람들이 그냥 외국 관광객이 그러고 다니나 보다 생각하면서 지나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곳 사람들의 정서를 잘 아는 나는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송 선생은 여전히 초조해하며 안절부절 못한다. 송 선생을 안심시키려고 말을 건네는 중 승강기 쪽에서 박 교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나는 이곳에서 처음 보는 박 교수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둘둘 말아 핀을 꽂아 단정히 올려붙인 머리와 정장 옷차림이 마치 내게 학부 시절 교양과목을 가르쳤던 엄숙하신 한 교수님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걸음걸이마저도 그 교수님을 쏙 빼닮았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송 선생이 박 교수에게 겨우 말문을 연다. 

"아니, 인민복에 머리에 꽃은 어쩌시고…."

박 교수가 미소를 지으면서 송 선생을 바라보면서 다정스럽게 말한다. 

"이곳 아이들이 풀어헤친 내 머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니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밤새 잠을 못 이뤘어요. 오늘은 아이들이 내게 안기도록 변장을 좀 해봤어요."

두 사람 다 같은 일로, 그러나 다른 이유로 잠을 설친 것이다. 송 선생이 말없이 내게 눈인사를 건네며 박 교수와 함께 호텔을 나선다. 

'소유'는 가장 큰 인센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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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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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교통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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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사리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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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을 지난다. 원산과 개성의 방향을 일러주는 교통표지판이 나오고 한 30~40분 달리니 눈에 익은 사리원시에 들어선다. 이곳도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애육원을 비롯해 어린이들을 위한 공사가 최우선이란다. 

차가 시내를 빠져나와 농촌길을 달리던 중 놀라운 구호가 눈에 들어온다. '나의 포전'이라고 적혀있다. 지금 북한에서는 '포전담당제'라는 제도가 실시되고 있는데 구호가 이를 실감케 한다. 

'포전담당제'란 한마디로 말해 협동농장을 작은 단위로 나눠 한두 가정이 경작해 일부를 국가에 내고 남은 수확량을 경작자가 소유하는 제도다. 마치 경작지가 개인 소유의 땅인 양 수확량의 일부만 세금 납부하듯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자신이 갖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 '포전담당제'를 적극 찬성한다. 왜냐하면 소유보다 더 큰 인센티브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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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땅'임을 강조하는 농촌의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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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농가의 텃밭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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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산 가는 길 주변 협동농장의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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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농촌을 여행하다 보면 텃밭 옥수수 키가 협동농장의 옥수수 키보다 훨씬 크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텃밭이란 자기 집 앞마당을 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작물은 100% 자신의 소유물이다.

그러니 나 같아도 협동농장보다 내 집 마당 텃밭에 더 신경을 쓸 것이다. 협동농장에서 있는 힘껏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내게 돌아오는 게 적다고 생각된다면, 아무리 사상교육을 받고 당원들이 깃발을 흔들어대면서 생산을 독려한다고 해도 근로의욕을 고취시키지 못할 것이다. 

아마 북한 당국도 이를 이해해 '포전담당제'를 도입한 것이 아닌가 예상해본다. 요즘 들어 북한의 식량 문제가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분명 이 제도가 한몫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협동농장 옥수수의 키가 텃밭 옥수수의 키와 같아지는 날, 이 제도는 완전한 성공을 이룬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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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르 익어가는 협동농장의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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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협동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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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개인의 상행위, 국가에 속해 있지만 자율적 경영과 이윤이 보장되는 기업활동, 농촌의 포전담당제 등의 변화는 북한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덧붙여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경제발전으로 인해 생기는 소득의 격차다. 생산수단의 소유가 불가능한 북한에서 원천적인 빈부의 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소득의 격차는 분명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관료주의와 함께 생성될 수 있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다. 이를 잘 극복한다면 이러한 변화들과 함께 북한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북한 5대 명산' 구월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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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과일군과 사리원을 오가는 북한의 지방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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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차는 황해도의 지방도로를 따라 구월산으로 향한다. 도로에는 버스들이 종종 눈에 띈다. 지방과 지방 또는 지방과 평양을 연결하는 시외버스들이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2011년 10월, 첫 북한관광을 왔을 때는 시외버스를 거의 보지 못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뿐만 아니라 짐도 상당히 많이 실려있다. 아마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활발한 상업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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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이용하는 북한의 지방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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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이용하는 북한의 지방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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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북한의 지방에서는 자전거가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엄청난 양의 짐을 싣고 자전거를 끌며 언덕을 걸어 오르는 모습은 보기에도 힘겹지만, 곡예하듯 꼬부랑 내리막 언덕길을 흙먼지 일으키며 빠르게 내려오는 모습엔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황해도 재령군, 신천군, 삼천군을 지나 멀리 구월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구월산 20km'라고 적힌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자 도로가 말끔히 포장돼 있다. 산 정상까지 모두 포장도로를 만들어놨다고 한다. 내가 본 북한의 산 중 도로를 가장 잘 닦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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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안에서 바라본 구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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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산 월정사를 찾은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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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현지 해설원의 설명을 들은 후 안내도를 보니 구월산을 하루에 다 보기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오늘 저녁 평양으로 돌아가야 하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둘러보는 수밖에. 입구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월정사를 먼저 찾는다. 

경내에 들어서자 한 외국인이 사진 촬영을 하다말고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말을 붙인다. 이럴 때 "남한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 씁쓸한 마음으로 미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북한 사람의 모습은 아닌데 코리안 언어를 사용해서 의아해했다"라고 말한다. 

이 외국인의 눈에는 내가 북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 말을 한다 해도 내가 이곳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하다. 나는 그에게 답해줬다. "겉모습은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그는 잘 이해하고 있다면서 남과 북은 하나라고 덧붙인다. 그는 "코리아의 문화에 심취해 있다, 그래서 머나먼 극동의 산 속 절을 찾아왔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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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절모를 쓴 구월산 월정사 주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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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성불사를 찾았을 때 주지 스님은 노란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웃음을 참으면서 <성불사의 밤>을 함께 부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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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님께서 종종걸음으로 반갑게 다가온다. 그런데 스님이 쓰고 계신 중절모를 보고 웃음이 나와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2013년 8월의 성불사가 생각난다. 샛노란 가죽구두를 신고 <성불사의 밤>을 부르던 주지스님 때문에 웃음을 참아가며 함께 노래 불렀던 내 모습이. 

중절모를 쓰신 주지스님이 월정사의 유래에 대해 말씀해주신다. 우리의 역사와 종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나 수도하는 스님 같진 않다. 원래는 공학을 전공했는데 역사에 관심이 많아 다시 대학에 입학해 조선 역사를 공부했다고 한다. 

스님께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절의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신다. 그러나 스님의 관심은 안내보다 남편과 내게 있었다. 지난번 평양의 경흥관 대동강맥줏집에서 만난 동포들처럼 신상에 대한 온갖 질문을 퍼붓는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사는지, 무얼 하는지 등등.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되레 동포의 정만 가득 느낀다. 묻지도 않은 것까지 말해드리면서 월정사 누각 '만세루' 마룻바닥에 걸터 앉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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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산 월정사 주지 스님이 주신 살구를 받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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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스님께서 1분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잠시 후 호박잎 비슷한 큰 잎사귀에 살구를 잔뜩 담아 건네주신다. 방금 따 오셨단다. 가슴이 뭉클하다. 사찰 관람을 온 게 아니라 시골 친척집에 다녀가는 기분으로 절을 떠난다. 

점심식사를 위해 계곡을 찾아 평평한 바위 위에 앉는다. 생수병을 반으로 잘라 잔을 만들어 대동강맥주를 채운다. 이 시간을 서로 축복하며 건배한다. 같은 정서와 같은 행동들…. 남이든 북이든 우리는 같은 DNA임을 수시로 확인한다. 펼쳐놓은 도시락과 살구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가 한 폭의 그림으로 남는 느낌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흥얼거리던 남편이 돌아와 불평을 늘어놓는다. 

"야아~, 여기서 도시락을 먹다니. 여보, 물 속에 가재가 득실 거리고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녀. 저거 잡아다 매운탕 끓이고 나뭇잎 주워서 연기 피우면서 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데... 아!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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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산 계곡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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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김혜영 선생이 웃으며 말한다.

"하하,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잘 아시는군요." 

우리는 구월산 정상을 향해 달려간다. 겉에서 보기에 구월산은 그리 험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면 오를수록 숲이 장엄하게 우거져 있다. 산길따라 탐스럽게 영글은 산열매는 가던 길을 멈추도록 유혹한다. 참으로 깊고도 풍요로운 산이다. 잘 닦아놓은 산길 사이사이에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우람한 바위들이 역사 속 선조들의 채취를 묵언으로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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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월산 정상을 등지고. 좌측 중앙이 황해도 안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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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정상 가까이 다다르자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가 나타난다. 헌병으로 보이는 한 병사가 다가오더니 "이곳은 군사지역이라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다"고 한다. 김혜영 선생이 간청을 해보지만 "보고 받지 못했다"면서 통과를 불허한다. 우리는 구월산 정상을 눈앞에 두고 아쉽게 하산한다. 차를 근처 전망대에 세운다. 

전망대 아래로 평야와 함께 낮은 동산들이 펼쳐져 있다. 안악군이라고 한다. 아!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고구려의 안악 고분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갑자기 시각이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간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산에는 열매가 풍성하고 산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는 곡식이 가득하다. 기름진 평야 옆 바다에는 온갖 물고기가 득실거린다. 단군이 선조들을 이끌고 인간에게 이로운 세상을 펼치며 만세를 누릴만 하다. 고구려의 고분들이 이곳에 남아 있으니 필시 여기서 자손만대를 이어갔으리. 산도, 하늘도, 구름도,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나에게 읊어주는 듯하다. 나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부끄러운 후손의 삶을 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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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용호 운전기사가 따다준 북녘의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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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1/100도 둘러보지 못했지만, 어느새 구월산 정기를 듬뿍 받으며 하산한다. 차가 재령평야를 가로질러 평양으로 향한다. 길가엔 울긋불긋 들꽃들이 피어있다. 리용호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더니 꽃을 꺾어다 내게 안겨준다. 북녘땅 들판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 한포기도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 화사하게 피어난 들꽃송이를 어찌 온실에서 자란 백만 송이의 장미에 비할까.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구월산의 풍취를 담아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사진을 올렸다. 통일을 염원하는 댓글들이 순식간에 달린다. 어떤 페이스북 친구는 아버님을 그리면서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구월산 아래 황해도 신천군이 저희 아버님의 고향입니다. 한국 전쟁 때 신천대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아버님 생전에도 구월산 이야기를 하시곤 했답니다. 아버님 고향인데...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눈을 감지 못하셨을 그분의 아버님을 생각하니 북녘땅을 한가로이 관광이나 하고 다니는 나는 이내 죄책감에 휩싸인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수양손자 의성이의 유치원에 간다. 의성이를 볼 마음에 한껏 기쁘다가도 석별의 정을 나눌 생각에 이내 슬픔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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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북한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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