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드 대학교의 심리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최근 베르그루엔 연구소의 알렉스 골라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핑커는 2011년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다음 책의 주제는 ‘새로운 깨달음’이다. 아래 인터뷰에서 핑커는 최근 테러와 총기 난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폭력은 하락 추세라고 설명한다.
일단 세계화와 같은 요인이 있다. 국가들이 더 긴밀하게 엮이고 있어서, 한 국가의 안녕이 다른 국가의 안녕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정복과 침략보다는 사업을 하는 게 더 이득이 된 것이다. 즉 살아있는 인간이 죽은 인간보다 더 가치가 있는, 혹은 제품을 사는 게 훔치는 것보다 더 쉬운 세상이다.
다른 요인은 가치 체계의 변화다. 종교, 국수주의, 언어 등을 놓고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은 모든 국가가 영토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휴머니즘을 향한 트렌드가 있다. 그 궁극적 목표는 여성과 어린이의 건강이다.
내가 세계적이라는 말을 썼지만 지구 전체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부족적 존재라, 예전의 나쁜 상태로 돌아가자는 유혹은 늘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과 후반을 비교해 보면 휴머니즘을 향한 추세가 명확히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열렬히 세계 인권 선언 서명을 원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명을 궁극적 선으로 보고 보호하고 지원하려 하는 밀레니엄 개발 목표, 지속 가능 발전 목표 등의 프로그램은 어떤가?
국제적 폭력의 감소에 기여한 다른 요인은 여러 기관들의 행동의 변화다. U.N.과 NATO, 아프리카 연합, EU가 소프트 파워를 행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만들게 된다. 그들의 규준은 공격적이지 않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다른 문제지만, 그건 억제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규준에는 이제는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지 않는다, 다른 국가를 정복하지 않는다는 게 포함된다. 물론 언제나 지켜지는 건 아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할 때 우린 그 반례를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국가들 간의 보다 평화로운 공존에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마저도 자신이 이런 규준을 어겼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크림 반도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들어가길 원했다고 주장한다.
푸틴이 크림 반도 주민들의 의지에 따랐다는 건 픽션이다. 세계의 산업화된 다른 국가들이 다 함께 러시아의 행동을 규탄하고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이 규준이 늘 지켜지지는 않지만 지금도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국제적 폭력의 감소를 이야기할 때, 폭력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 있지만, 일반 범죄와 제도적 폭력도 있다. 전쟁 지대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저런 방식 외의 다른 형태로 살해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니 폭력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일반 범죄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일반 범죄도 상당히 줄었다. 중세 이후 범죄율은 현저히 줄었다가 1960년대 무렵에 반짝 늘었지만, 1990년부터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제도적 폭력의 예로는 체벌, 사형, 동성애 범죄화가 있다. 서구에서는 이것은 현저히 줄었다.
-무역으로 인해 타인에게 범죄를 저질러서 얻을 이득이 줄었다는 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아주 이건 아주 실용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무역을 계속해야만 평화를 가질 수 있을까? 즉, 그게 도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평화를 위한 평화를 가지는 게 가능할까? 이것이 임마누엘 칸트가 유명한 저서 ‘영구 평화론’에서 다룬 주제다.
아이러닉하게도 칸트의 글은 아주 실용적이었다. 그는 두 국가 간에 무역이 존재한다면 서로 공격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했다. 그가 공화주의(혹은 어쩌면 지금의 민주주의)를 포용한 것 역시 실용적인 이유였다. 바로 평화 유지다.
그러나 역사적 질문과 실제 질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왜 범죄율이 줄었는지 살피고, 우리가 어떤 가치에 따라 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하는 도덕적 질문을 생각했다. 물론 나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구상의 사람 전부가 모든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라는 가치에 따라 살아갈 거라는 생각은 좀 비현실적이다. 점점 늘어나는 인도주의적 노력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것 중에는 실용적 계산이 있다. 도덕과는 무관한 실제 이득 때문에 싸움을 멈추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이상이다. 현재 최고의 선(善)이 삶이 죽음보다 낫고, 교육이 무지보다 낫고, 건강이 질병보다 낫다는 느슨한 인도주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게 뒤집힐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황금기를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 암흑기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이런 기준과 가치가 계속 유지될까?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보코 하람과 IS 같은 집단들의 위협은 과장되었다. 내전의 사망자는 지난 해에 증가했지만, 그래도 2000년의 사망자 수로 돌아간 것뿐이다. 우리가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이룬 진전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있긴 하지만 민주화도 마찬가지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일어나는 내전들은 주로 사하라 사막 아래 아프리카 서부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난다. 물론 우리가 세운 기준이 뒤집힐 수 있다. 질병이 돌아올 수 있고, 종교는 이미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낸 진전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진전도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시리아에 있다면 전세계 내전의 총 개수가 줄어들었다는 걸 안다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 예를 들면 9/11 같은 사건이 이 모델을 뒤집을 수도 있을까?
첫째, 개인의 폭력 경험은 정책 결정과는 무관하다. 만약 그 방향으로 간다면, 오늘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지구 온난화를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 3자 관찰자들에겐 어떤 영향이 있을까?
우리가 각 사건들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게 입증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 점을 악용했다. 테러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누구든 굉장히 낮다. 그러나 테러 공격이 엄청나게 많이 보도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테러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이성적인 일이다. 테러가 세계 문제에 있어 외교 정책을 지배하게 하는 것은 실수다. 일상의 테러가 미치는 해악은 바로 반응에 있다. 모든 테러 시도의 97%는 실패로 끝나니, 테러는 성공적인 수단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두라.
-무슬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유럽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중도주의 당들이 문제가 없는 척하면 – 독일 연합 정부가 어느 정도 그렇게 했다 – 우파 정당들이 득표를 늘릴 기회를 주는 셈이라는 걸 우린 보았다. 동화되지 못할 위험, 여성 혐오와 테러리즘을 더 키울 위험이 있다. 만약 중도주의 정당들이 공개적으로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문제를 이야기하며 유권자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주요 정치의 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의 헤게모니가 우리 모두를 해칠 것이다. 만약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방법이 도널드 트럼프나 마린 르 펜이 되는 거라는 생각이 퍼지면 그건 위험한 유혹이 된다.
-유럽과 미국에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유럽은 아직도 종교와 수세기 전에 정한 국경으로 갈라진 국가의 ‘부족적’ 영향을 받는다. 미국은 종교적 관용의 역사를 지닌 단일 국가다.
그렇다, 그것이 차이점 중 하나다. 미국에는 급진적 이슬람화가 훨씬 적은 이유 중 하나가 그게 아닌가 생각한다. 스페인 인, 프랑스 인, 독일인이 되는 것보다 미국인이 되는 게 더 쉽다.
-유럽 우파의 주장 중 하나는 이슬람은 평화롭지 않으며 서구식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당신은 대부분의 분쟁은 지금도 아프리카 서부와 파키스탄에 걸쳐 일어난다고 언급했다. 이 지역은 거의 전부 무슬림 국가들이다. 무슬림 국가들이 기독교 전통이 있는 곳보다 폭력에 취약하다는 말인가?
현재 진행 중인 대부분의 전쟁들의 한쪽에는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슬람권의 전쟁 비율이 높아진 것은 맞지만, 이슬람권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비율은 낮아졌다.
역사적으로는 기독교 국가들이 끔찍한 정복을 저질렀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인데,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 때 벌어졌던 잔혹 행위를 생각하면 그런 주장을 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지난 세기에 일어났던 유익한 추세가 아직 이슬람권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주장은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일반화, 특히 이슬람의 맥락에서의 일반화는 아주 위험하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를 보라.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 국가고, 평화롭고, 시리아, 말리 같은 나라들이 지금 겪는 문제는 전혀 없다.
게다가 도그마와 정체성을 섞으면 그 어떤 분쟁도 더 심해진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키우기 때문이다. 또한 과격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식의 지하드는 죽음을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것으로 봐 버린다. 그러므로 충돌 중인 무장 대원들은 다른 세속적인 이익이 걸려 있을 때의 충돌에서와는 완전히 다르게 행동한다. 나는 이 전쟁들이 순수히 종교적이지는 않다는데 동의 하지만, 충돌 안에 종교적 견해가 있으면 충돌을 억누르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된 적도 없었다.
허핑턴포스트US의 The World Is Not As Bad As We Think, Says Harvard Psychologist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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