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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 너는 누구냐] ② 제국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임페리얼 크루즈’에 은닉됐던 ‘카스라 태프트’
 
[미국아, 너는 누구냐] ② 제국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치달은 미국
 
김갑수 | 2017-02-28 09:31:2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임페리얼 크루즈’에 은닉됐던 ‘카스라 태프트’ 
[미국아, 너는 누구냐] - 2

오늘날 미국은 일본에 북태평양에서 군사력을 키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미국의 이런 시도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명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것은 1905년 7월 5일이었다. 이 사절단에는 당시 미 육군장관 태프트(루스벨트의 후임으로 27대 대통령이 됨)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및 다수의 군인과 민간관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행 가운데는 루스벨트의 딸 21세의 엘리스도 들어 있었다. 그녀는 세속 언론들에게 관심의 표적이 되어 있는 ‘스타’였다. 루스벨트는 ‘제국의 항해’, 즉 임페리얼 크루즈(imperial cruise)를 통해 향후 수세대에 걸쳐 아시아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칠 중대한 정책들을 결정지었다.

루스벨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문과 민간인 살육, 집단수용소를 통해 하와이, 쿠바, 필리핀 같은 약소국을 강점한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전쟁광이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카스라 - 태프트 밀약은 바로 루스벨트의 ‘임페리얼 크루즈’가 성사시킨 핵심 공작 중 하나였다.

1905년 여름, 도쿄와 워싱턴 사이에는 비밀 메시지가 태평양 해저 케이블을 통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미 육군장관 태프트는 일본 총리 카스라와의 극비 회동에서, 일본이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해 들어가도 좋다고 허용하는 비밀 협정서에 서명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 없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루스벨트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당시 전쟁 중이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정직한 중개자’ 역할을 자임했다. 결과 두 교전국은 그 해 여름 포츠머스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년 뒤 루스벨트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이 비밀협약에 대해 전혀 몰랐다. 미일 사이에 음습하게 오간 이 비밀외교 전문은 루스벨트가 사망할 때까지 극비로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고종은 1876년 문호를 개방했고, 첫 서방 수교국으로 미국을 선택했다. 고종은 미국이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다.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 고종은 미 국무부에 이런 말을 전했다. 그는 루스벨트가 조선에 공명정대한 외교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는 고종이 짐작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루스벨트는 일본에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딸 엘리스가 조선에 와서 조미 우호를 위해 축배를 든 지 2개월도 되지 않아 엘리스의 아버지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을 폐쇄했고 조선을 일본군대에게 맡겨 버렸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한 미국 외교관은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치는 쥐들처럼’ 미국이 조선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표현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승인한 첫 번째 나라였다. 고종이 보낸 밀사들이 일본의 만행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청하자, 루스벨트는 조선은 이제 일본의 일부분이니 앞으로는 도쿄를 통해서 탄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조선을 배신함으로써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영토 확장 계획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그리하여 수십 년 뒤에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행한 비밀협약의 결과로 빚어진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05년 이래로 미국은 아시아에서 네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도록 루스벨트의 비밀 사절단에 대한 진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 비밀외교 행각의 의미는 ‘미국은 좋은 나라’라는 신화를 지키기 위해 감춰지고 무시되었던 것이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 주 블랙힐스 마운틴 러쉬모어에는 ‘큰 바위 얼굴’이 있다. 이곳은 관광객이 넘쳐난다. 여기에는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네 명의 미국 대통령 얼굴이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초대 조지 워싱턴, 3대 토마스 제퍼슨,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의 일본 지원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캐럴 쇼(Carole C. Shaw)가 2007년에 출간한 <<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는 루스벨트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사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사실을 밝혔다.

일본에게 전비를 지원한 자본가들은, 미국의 유대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 외에도 3,000만 달러를 지원한 앤드류 카네기를 비롯하여 존 피어몬트 모건 등 미국의 6개 재벌이었다.

미국이 조달한 일본의 전쟁 비용은 약 7억 엔(현재가 14조 원 상당)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2세 캐럴 쇼는, 100여 년 전 우리(미국)가 ‘공공의 선’이란 미명하에 작은 나라(조선)의 국권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 보라. 미국인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카스라-태프트 밀약 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가? 카스라는 조선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고, 태프트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고 화답했다. 영국도 그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고, 대신 일본은 영국의 인도ㆍ버마 등의 지배를 두둔했다.

루스벨트는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하고, 큰아들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함으로써 1차대전과 2차대전에 각각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버지가 된다. 아무튼 루스벨트는 딸 엘리스에 이어 아들 둘까지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희생시킨 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루스벨트가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제국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치달은 미국

미국의 펜타곤은 2차대전에서부터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대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미국은 2차대전 중 기존의 육군성과 해군성을 통합하여 국방성을 신설하고 펜타곤 건물을 신축했다.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국방성 건물이 따로 독립해 서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못했다.

초대 국방장관으로 제임스 포레스털이 부임했다. 훗날 그는 툭하면 ‘빨갱이’를 입에 담고 사는 광인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는 외마디를 남기고 자살한 사람이다.

우리는 미국을 가리켜 ‘제국주의 국가’라고도 하고 ‘패권주의 국가’라고도 한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은 ‘군국주의 국가’라고 한다면 조금 생소한 느낌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본군국주의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 보았어도 미국군국주의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캐럴의 역저 『전쟁의 집』(HOUSE OF WAR, 동녘)에는 미국 군국주의라는 표현이 숱하게 나온다. 일일이 세지는 않았지만 최소 수십 번 이상 이런 표현이 구사된다. 물론 제국주의나 패권주의라는 표현도 함께 쓰이기는 한다. 무엇보다도 미국으로 하여금 이런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얻도록 한 결정적인 요인은 핵무기다.

우리가 알듯이 미국은 1898년 대 스페인 전쟁 이후 명백히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그리고 1차대전을 겪으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후 미국은 거의 유일패권을 행사했으며 소련의 해체 이후 이런 지위는 부동화(不動化)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최근 들어 무섭게 성장한 중국과 전열을 정비한 러시아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1943년 9월 11일은 미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이 착공된 날이다. 미국은 이 날로부터 군국주의로 치닫기 시작했다는 암시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동시에 미국은 이 날로부터 ‘영구전쟁경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확히 60년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펜타곤은 60년 전 건물 착공 시각과 분 단위까지도 거의 일치하는 아침 시각에 아메리칸 항공 77편의 습격을 받고 파괴된다. 이 날로부터 미국의 군국주의는 노골화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9.11 때문에 군사폭력화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군사폭력화는 기실 펜타곤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집요하게 준비되었다. 이런 관점은 새로우면서도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결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곳에서 역사상 가장 비도덕적이고도 명분 없는 전쟁을 저질렀다.

군국주의란 무엇인가? 군사력에 의한 국위 신장과 대외 발전을 국가의 주요 목표로 두는 주의를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군국주의 국가이다. 또한 군국주의는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최상위에 두고 사회 구조나 국민의 생활, 사고 양식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는 사상과 행동 양식을 뜻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군국주의 국가이다.

군국주의 국가는 군사조직의 '명령과 복종' 원리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호전적인 정책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역시 미국은 군국주의 국가이다. 군국주의는 국제적 위기를 과장하거나 스스로 국제긴장을 조성하며 국민 층의 비판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반군국주의자들을 공상적인 평화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이렇게 보아도 미국은 도저히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미국을 군국주의로 치닫게 한 결정적인 실체는 펜타곤이다. 펜타곤은 미국 대통령의 심리를 조종하며 때로는 그의 명령을 무시한다. 펜타곤은 미국 내 연 면적 1위 건물이었다가 1973년 신축된 뉴욕 무역센터 건물에 밀려 2위 건물이 되었는데, 습격당하기 한 시간 전 먼저 당한 뉴욕 무역센터 건물이 내려앉았기 때문에 한 시간 동안 1위 건물 지위로 복귀했다가 파괴된 셈이다.

“이라크 전쟁을 위한 명분들은 하나씩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량살상무기는 없었고 사담 후세인은 9.11테러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떠벌리던 이라크 민주화도 허상이었다. 석유 저장고의 확보가 전쟁의 진짜 이유였지만 그것마저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미국의 근본적인 복수심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풀리지 않았던 것이 그 근본적인 이유였다.”(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709쪽)

<전쟁의 집> 저자는 어느 날 어린 딸을 데리고 베트남전쟁기념관에 들렀다고 한다. 그는 딸에게, “이게 우리나라(미국) 전사자 명단이란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딸 아이가 되물었다.

“베트남 전쟁인데 베트남 전사자는요?”

우리는 군국주의와 함께 ‘광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된 초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은 광기에 휩싸여 자살했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네오콘 중에는 포레스털과 비슷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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