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반 3일 전의 취봉 노스님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누군가 "너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승의 눈으로 이승을 바라봅시다.
송광사 취봉(1898~1983) 노스님 이야기입니다.
피어난 꽃은 반드시 시들어서 떨어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죽음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 삶에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먼 곳의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죽음을 당하게 되면 주민등록증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없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뜻밖에 찾아온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스스로의 죽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슬프고 원통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준비 없이 맞아야 하는 죽음 그 자체보다 더 슬프고 원통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순간들은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흐름입니다. 삶만을 보고 죽음은 눈감아 버리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라 반쪽의 삶일 뿐이지요. 죽음에 깨어있는 삶은 집착이 없고 평화로우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함께합니다.
호스피스 교육의 목적도 그렇지요. 이것은 임종하는 이를 돕는 일일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이를 통해 죽음을 배워서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 데 있어요. 죽음에 대해 깨어 있게 해 주는 임종자야말로 삶의 가장 큰 스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광사에 취봉 스님이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송광사 주지를 네 번이나 맡으신 스님이신데 공과 사가 아주 분명하셨던 분이십니다.
절일로 나들이하시면 남은 차비는 반드시 절에 되돌려 주셨고 몸이 노쇠해 대중과 함께 공양을 못 드실 때도 대중 스님들의 상에 오르지 않은 음식은 잡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여든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앞서 지장전에서 몸소 당신의 사십구재를 지내셨습니다. 절에서는 이런 의식을 예수재(預修齋) 또는 역수재(逆修齋)라 하는데,
저승의 내가 이승의 나를 지켜 보고 생각하고 참회하는 의식입니다.
스님께서는 보시던 책은 도서관에 기증하시고 입으시던 낡은 옷가지들은 다 태우셨습니다. 몇 점 안 되는, 쓰시던 물건들도 모두 다른 이들에게 주셨습니다.
사십구재의 끝날인 단칠일(斷七日)을 마치시고는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모두 불러 모아 봉투를 돌렸습니다. 일하는 이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자 노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 송광사에서 취봉 스님 제사를 모시는 제자들
“이 사람들아, 내가 죽으면 자네들이 고생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스님께서는 열반하시기 앞서 제자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방안에 모인 제자들을 둘러보신 스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문을 여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제자로 삼아만 놓고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다. 세상을 떠나기 앞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구나”
하시고는 첫번째 제자를 불러 앞으로 나와 앉게 했습니다. 물끄러미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시던 스님께서는 빈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철썩! 하고 사랑하는 제자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명초(名草)라는 풀이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풀인데 이 풀을 먹으면 스스로의 이름뿐만 아니라 온갖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만다고 하지요.
우리가 죽어 저승에 태어나도 이와 같을 것이니, 모든 기억이 말끔히 사라졌을 때 누군가 “너는 누구인가?”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죽고 또 죽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죽음에 깨어 있지 못할 때마다 취봉 노스님의 자비의 손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석현장 스님(전남 보성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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