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18'에 해당되는 글 2건

  1. 내부고발의 여파... (4) 2007/01/18
  2. 뚝방의 추억... (5) 2007/01/18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하튼 때를 기억하는건 영 빵점인데,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여직원이 재고용이 안되자,

여러가지 회사의 비리(?)를 어느 시민단체에 고발했고,

그래서 밑빠진 독상이라는 상을 받았다고 언론에서 보도한적이 있다.



어쨌든 그 고발 내용중에 허위출장이라는게 있었다.

시내출장이나 국내출장을 올려서 출장비는 받았는데,

출장을 가지 않았거나, 아니면 날자를 줄여 일찍 돌아 온다거나,

출장인원으로 잡아 놓은 인원보다 적게 간다거나... 뭐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출장비를 좀 남기면 그걸로 갑에 대한 접대비로 쓴다든지,

부서 회식비로 쓴다든지 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일듯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시민단체에서 청렴위로, 그리고 감사원이나 검찰까지 번진듯하다.

회사 내부에서도 분위기 뒤숭숭하고,

다른 연구기관에서도 그 여파로 허위출장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지시가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쨌거나,

산오리한테도 '출장 소명'을 하라는 건이 하나 왔는데,

1년반쯤 전에 저 멀리 나주까지 출장을 갔다 온 건이다.

출근해서 출장결재 올리고 팀원과 같이 10시 29분에 연구원을 나서서

저녁 17시 48분에 연구원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왜 출장소명을 하라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계획보다 적게 간 것도 아니고, 출장인원을 줄인것도 아니고, 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나주까지 갔다 왔는데,

그 짧은 시간안에 가능한 것이었느냐? 뭐 이런 의구심 때문에 소명하라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산에서 10시반에 출발해서 7시간 20분만에 나주를 갔다 올수 있느냐는 그런???

 

그럴 거라 생각하고 소명은 했다.

일산에서 승용차로 공항으로 가고, 공항에서비행기 타고 목로로 갔고,

목포에서 택시타고 나주로 갔다. 그리고 업무협의를 두어시간 하고

다시 타고 갔던 택시를 불러서 목포공항으로,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주차장에 맡겼던 승용차 불러서 타고 되돌아 왔다.

오가는 비행기를 몇시에 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충분히 가능한 스케줄이었고, 그렇게 했다. 근데 그게 소명해야할 내용이라니...

그래서 마지막에는 개인차량 이용과 공항주차비, 목포-나주간 택시이용으로

출장비는 부족했다고 썼다.

(출장계획에는 그런거 없다, 일산-김포도 버스요금, 목포-나주도 버스요금만 올릴수 있고,

그나마 항공료는 그대로 계상했다. 택시비나 주차비는 식비나 일비로 때웠지만, 혼자 가서는

완전부족이고, 둘이 갔으니까 그나마 조금 부족하거나 똔똔 정도로 때울수 있다.)

 

이런 거 소명하라는 건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허위 출장의 결정적인 근거와 증빙이 되었던 것은 회사의 출입카드 시스템이다.

회사는 도난방지를 위해 출입카드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오히려 직원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허위로 출장을 올리고, 그 출장비를 다른데다 쓴 인간들은 처벌도 받고,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출장 갔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와서 밀린 일처리하고

야근까지 했던 친구들은 출장안가고 일찍 돌아왔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도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식구를 잡고 있는 꼴이 된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출입기록은 노동조합의 합의가 있어야 유출을 할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노동조합은 합의해 줄수 없다고 했는데, 회사는 일방적으로 자료를 내줬다.

그런데, 이걸 노동조합도 마구잡이로 반대할수 없었던게,

허위출장이란게 있으니 도덕적이지 않은 것을 감싼다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었으니까..

 

이 건과 관련해서 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

며칠동안은 계약서류철 200여개를 일일이 뒤져서 숫자를 찾아내는 짓거리도 했다.

서류먼지가 책상과 바지를 한참이나 더럽히고, 목이 매캐해 지고,

그 숫자들을 엑셀 파일에 쳐 넣느라고 화면과 서류철만 뒤지고 보고 했더니,

눈이 더 어질어질할 노릇이다.

어딘가 한곳에 문제가 생기면, 줄줄이 관련 없는 사람들도 함께 갖가지 시달림을 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첨에는 내부고발자를 좋게 얘기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그친구가 오히려 문제'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에구....

그러게 첨부터 문제가 불거질때 잘잘못을 좀 잘 가려서

불만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것이지,

일 다 터지고 벌어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근데, 이 일은 언제쯤 끝날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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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7:17 2007/01/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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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방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8 16:31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이 안양천 뚝방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산오리도 그 동네서 오래 살았으니,

추억이 많다...

 

산오리네 집은 행인이 살던 뚝방은 아니었고, 칼산이다.

71년도 여름에 서울로 왔는데, 아버지가 영등포국민학교에 넣어줬다.

칼산에서 문래동의 영등포 국민학교까지 3형제가 걸어서 등하교를 했는데,

지금 걸어가라 해도 한시간은 더 걸릴 거리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학교 가는데 한시간 반씩 걸어가고, 다시 집에 오는데 한시간 반 걷고...

아마도 산오리가 조금 잘 걷는다면 이때 단련한 것이 아닐라나 모르겠네..

 

 




논둑길을 지나서(이당시 논둑길이 지금 목동아파트 14단지 부근이다)

안양천 뚝방을 올라가서 뚝위로 한참을 걸어가서

행인네 집 근처의 안양천 아래에 구름다리가 하나 있었다.

안양천 물이야 장마철 빼고 나면 항상 어른들이라면 걸어서도 건널 정도의

깊이와 폭이었으니 20~30미터쯤 되는 다리였던 거 같다.

양쪽에 쇠줄을 걸고, 그 아래에는 빈 드럼통을 몇게 받쳐 놓고,

다리바닥은 나무 판자를 어설프게 올려 놓은 모양새다.

그러니 건너 갈때 다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장난치고 놀기 좋은 다리였다.

 

그 다리는 물론 정부에서 만들어준 다리는 아니었나 보다.

다리 입구에 조그만 움막(요즘 이동식  화장실 만한)을 지어 놓고,

다리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돈을 받고 있었다.

한번 건너는데 5원이었던가?...

(그다음해 중학생이 되었을때 시내버스 교통비가 10원인가 15원이었으니까 결코 싼편은 아니었다.)

아마 한달치로 끊으면 몇십원 됐던거 같은데, 얼마였는지 기억이 없다.

이 다리는 안양천 뚝방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문래동이나 도림동의 공장으로 넘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기에 아침 출근시간이면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름 방학때나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가다 보면,

어라, 다리가 없어졌다. 큰 비 와서 다리를 쓸고 내려가 버린거다.

그러면 또 그 다리 다시 만들어질때까지 오목교까지 걸어내려 가거나,

고척동까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가기도....

 

겨울방학 시작할때 쯤이나 2월 봄방학 전에는

군데군데 조금씩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얼음 아래 붕어들이 놀고 있었다는....

그때까지는 안양천이 그나마 물고기 정도는 살정도는 되었었나 보다.

산오리는 안양천에서 목욕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 전 몇해까지는 안양천에서 여름에

수영을 하고 놀고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긴 안양천 뚝방을 따라서 서너줄의 판자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칼산에 올라가서 보면 그건 예술이었다.

서울 중심가에서 쫓아내니까 쫓겨 와서 집단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거나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변두리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주거지였을텐데,

그래도 줄을 맞춰서 지었으니까 위에서 보면 멋있어 보였다.

학교 갔다 오다가 심심하면 뚝방위를 걷는것이 아니라,

뚝방 아래의 동네 좁은길을 걸어서 왔다.

문앞에 내놓은 연탄재를 차기도 하고,  동네 개 똥구멍을 차기도 하고...

그 동네 지나다니면서 행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화장실도 가끔은 애용하고...

 

74년인지 75년인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안난다.

엄청 큰 물난리가 났는데, 안양천이 넘칠 지경에 이르렀고, 지금 목동아파트가 들어선

논바닥은 완전히 잠겨서 커다란 바다가 되었다.

안양천 뚝방으로 물구경을 갔는데, 뚝방아래 사람들이 온통 가재도구를 꺼내들고선

뚝 위로 피난을 올라 오고 있었다.

뚝방아래 집들 가운데 낮은 쪽의 집들은 절반이 물에 잠겼다.

그 동네에 살던 우리 친척 한사람이 애를 낳았는데, 물이 집에 잠겼으니

갖난애기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뭔지 모르고 물구경에다, 집에는 손님들이 왔으니 그저 좋아 했었다는...

당시에 물이 안양천을 넘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소문에 의하면, 문래동 쪽의 뚝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거였다.

문래동쪽으로 둑이 터지면 공장들의 피해가 막심할테니까

아예 목동과 신정동 쪽의 뚝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실인지 소문인지는 모르겟다.

물 내리고 다시 안양천 건너 문래동으로 갔더니, 그동네도 어른 가슴만큼은 물이 잠겼는데,

당시에 수세식 변소 없었으니까 온통 똥물로 물이 잠겼던 선을 선명하게 그려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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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6:31 2007/01/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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