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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의료체계?

오늘 데일리서프에 오른 또다른 기사다(오늘 진보누리에는 특이 사항 없는 것 같다).

 

영어도 영어려니와 내가 알기로는 미국 의료 문제는 그 시스템 자체에 있다. 미국지사 정산을 하다보니 정말 사실인데 미국 건강의료보험은 국가사회 공보험이 아니다. 철저히 개인 자력으로 부담한다. 영어를 잘해도 돈없으면 병원에서 죽음이다.

미국 의사 협회에서 의료건강 공보험 시스템같은 좌경사회주의 체제 도입을 반대한 결과란다. 학부 졸업후 4년이나 메디칼 스쿨에서 돈쳐들이고 공부했는데 의사란 것들의 인식 수준이 이렇게 저열하다(Ph.D 꿈도 꾸지마라). 산재,고용,건강,국민연금 해서 4대 공적부조 복지시스템은 이 열악한 코리아에서도 인정되는 것이다. 미국 의사들 인식대로 사회가 굴러간다면 왜 미국이 '요람에서무덤까지'의 국가 영국과 국교 단절 안하는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빨갱이 국가 아닌가!(물론 코리아에도 사민당, 노동당 등 좌파가 정권잡은 서유럽 국가들과의 왜 단교를 주장 안하는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의 저열한 인식의 수구꼴통 또라이들 그득그득하다. 1년에 책 한권도 안읽고 오로지 조중동만 보는!)

 

필요에 따라 실용적으로 땜빵식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복지 시스템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조쥐부쉬가 집권하자마자 수십년간의 기존 정착 복지 시스템이 하나씩 후퇴하고 있다. 이게 바로 철학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실용주의는 철학이 아니다. 개똥철학이 진짜 철학이냐?). 그 큰 나라 미국의 구찌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야만적 복지 시스템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비판에 더해서 언젠가 나도 첨언해야겠다. 아울러 코리아 국민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자리가 나면 터치해야겠다.

 

ps. 지난 대선 이후 '우리가 찍은 후보가 이번에도 안됐다'라고 밝혔던 코리아 의사 협회의 공식 발표가 떠오른다. 그치들 시각에 아무 댓가없이 퍼주는 국경없는의사회 또라이들은 뭐냐? 노벨상 받으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영어 못하면 죽어야 하나”..뉴욕 한인들 울분 토로
2005-04-22 08:17 뉴욕 = 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미국 뉴욕의 플러싱에서 건축일을 하던 문철선씨는 지난해 여름 축구시합 도중 뇌출혈 증세를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한달만에 숨졌다.

위급한 상태였던 문씨가 고통을 겪으면서도 집중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데는 미국 의료시스템 및 의료보험 제도를 잘 알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많은 이민자 단체들은 의사소통의 부재를 문제로 지적했다.

뉴욕이민자연맹을 비롯한 뉴욕지역의 이민자 옹호단체들은 21일 병원들이 통역서비스 제공의무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문씨의 경우처럼 피해를 겪는 사례가 많았다면서 뉴욕시내 4개 병원을 제소했다. 제소된 병원은 문씨가 치료를 받았던 플러싱, 자메이카 병원을 비롯해 브루크데일 대학병원과 세인트 빈센트 스테이튼 아일랜드 병원 등이다.

이들에 제출한 소장에는 뉴욕한인봉사센터를 비롯한 이민자 단체들이 지난 2년간 수집한 병원들의 통역 서비스 부실 사례가 지적돼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전했다. 타임스는 이 사례들은 대부분 한국어 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의 경우라고 설명했다.

한인봉사센터 김광석 회장은 "문씨의 경우 우리에게 미리 연락했더라도 통역서비스를 받아 의사에게 증세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을테고 그랬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 회장은 "뉴욕주 규정은 병원이 사용인구 2% 이상인 언어의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민자들이 병원 응급실에서 겪은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나옐리'라는 여성은 두차례의 자궁외 임신으로 나팔관을 제거했지만 수술에서 회복된 뒤에야 자신이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처지가 됐음을 알게 됐다.

건축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급히 절단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통역이 없어 자신의 7살난 사촌을 통해 의사와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도 이민자 옹호단체 조사원들에게 목격됐다. 소장은 "당시 소년은 '의사들이 자르겠다고 하는 것이 발인지 발가락인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환자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고 밝혔다.

자신을 'N'이라고 밝힌 45세의 한 한국여성은 강도에게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아 플러싱 병원에서 30바늘을 꿰매고 며칠뒤 후속 치료를 위해 이 병원을 다시 찾았으나 병원측은 "치료를 받으려면 사진이 있는 신분증과 95달러를 내야 한다"는 내용이 영어로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돈도 없고 강도에게 빼앗겨 신분증도 없던 이 여성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도 하지 못한채 절망감에 빠졌으나 그후 한인봉사센터의 도움을 받아 '뉴욕범죄피해자기금'에서 나온 치료비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민자 옹호단체들의 제소에 대해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 법무장관의 대변인은 이미 이들 병원의 통역 서비스 부실문제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면서 "우리는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환자들의 의료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뉴욕한인봉사센터 김 회장은 "이번 소송에서 병원측의 법규 위반 판결이 내려지게 되면 문씨와 같은 개별 피해자들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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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김일성이 김좌진 장군을 죽였다에 대해 펌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올라와서 함 퍼본다.  작년초 현대 계열사  사장이 문화일보 짱에 오른지 왜 이리 스탠스가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언론 그자체도 물론 자본이지만 경영하던 인간들(예컨대 mba출신들)은 가급적 아니 절대! 언론이나 정치같은데 관여 안했으면 좋겠다. 내내 profit만 생각했는데 justice 개념이 있을까? 대표적인 인사가 조쥐부쉬다. 국제 환경 기준에서 탈퇴, 제국주의  침략 전쟁, 국제 형사재판소에서 탈퇴... 오히려 부쉬는 경영학 텍스트에서 배운대로 철저히 자국 단기 이익에 급급해 잘하고 있는거다. 물론 경영이라는 것이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만 얽매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 천민 자본주의 재벌만큼 다른 자본도 대게 그렇다. mba 천국이라는 미국의 엔론사 분식회계 부정비리 사건을 보라. 

 

축소확대  

김좌진 장군을 김일성이 죽였다고?
문화일보의 어이없는 역사왜곡
2005-04-21 16:27 이호석 (arisan@dailyseop.com)기자
21일 문화일보 '오후여담' 칼럼에 이신우 논설위원이 재미있는 글을 썼다. 제목은 '김일성'.

청산리 전투 대승에 빛나는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배후가 ‘북한의 전직 수령 김일성’인데 이러한 공산주의 빨치산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인정한다면 원한의 죽음을 당한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존재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면서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주내용이다.

그러나 이 위원의 이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용감한 주장이다.

▲ 이호석 기자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김 장군을 암살한 이는 박상실이라는 사람이고 이 사람의 배후에 김봉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김봉환이 암살의 배후임이 진작에 밝혀진 바 있다.

김봉환이 한때 김일성(金一星)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어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과 혼동이 있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으로 판명된 것이다.

물론 암살범들은 모두 한인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김일성 전 주석이 배후가 아닌 것은 분명하거니와 암살의 전후 배경을 살펴보면 일제에 매수된 김봉환이 만주 공산당 조직에 거짓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당 조직이 속아 김 장군의 암살명령을 내리게 됐다는 게 지금까지 드러난 연구성과다.

지난 95년 7월 25일자 중앙일보는 김 장군 암살의 전모를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중앙일보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시리즈물의 37번째 순서로 김 장군 암살의 배후를 다뤘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에서 김 장군의 장례식 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이강훈씨(전 광복회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 장군의 암살범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의 박상실이며 그 배후는 박의 상부조직에 있었던 김봉환이라고 보도했다.

김봉환은 김장군의 암살이 있기 직전에 일경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에 매수돼 결국 조직에 김 장군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올리고 여기에 만주총국이 속아 결국 김장군 암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 김봉환은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결국 김일성 전 주석이 김 장군의 암살 배후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명백히 밝혔다.

김 전 주석이 암살범 배후가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 빚어진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논란과 관련해서도 확인된다.

문광부는 지난 3월의 문화인물로 일제시대 사회주의 여류소설가 강경애(1906~1944)를 선정했다. 그런데 월간조선 2월호는 “강씨가 김좌진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의 동거녀였고 김과 함께 암살을 공모하기까지 했다”고 폭로했다.

작가 이이녕씨 역시 이강훈, 정환일, 임기송 등 김 장군의 측근들을 인터뷰해 펴낸 '일제하 36년-독립운동실록'에서 “강경애와 김봉환 두 사람이 일본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에게 회유당해 박상실을 사주, 김 장군을 암살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문화일보는 불과 3개월여 전에 있은 김 장군 배후논란에도 아랑곳없이 김 전 주석을 암살배후라는 용감한 주장을 한 셈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며 문화일보의 주장처럼 김 전 주석의 항일운동을 인정한다고 해서 김 장군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민족주의 세력의 공동전선 구축에 노력한 김 장군이 기꺼워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문화일보는 아직 지하에서 김 장군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지.

ⓒ 데일리서프라이즈 < 이호석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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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류)파리 68혁명(네이버 즐 펌)

 

 

 

 

파리의 68혁명(1968년 5월혁명)

 

 

68혁명의 발생배경


지난날의 세대간의 갈등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으로 상정되었으나 1960년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 걸치 기성세대의 모든 것에 대한 도전으로서 다시 말해 반체제로서 나타났다.

68년을 기점을 세계적으로 저항운동이 집중된 이유는 동서세계의 냉전으로 인한 획일적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대가,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나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후의 경제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대학교육체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육제도에서의 지식교수는 억압적 성격을 띄고 있었고 그 결과 지식의 수익자는 노동자원으로서 사회속에 통합되거나 혹은 경제 사회체제의 결합에 봉사하는 기술산업요원으로 편입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대학이 지닌 모순이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 대학 내의 문제



당시 프랑스 대학이 과도한 양적인 팽창으로 인한 문제를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 부작용은 학생들에 의해 폭발하게 된다. 68혁명 당시의 학생들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로서 196년 23만명이던 것이 68년이 되면 2배 이상 증가하여 60만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대학당국의 시설과 교수법에서의 대처는 미흡했다. 초대형 강의, 비좁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 교수법, 기숙사 시설 대학교원수의 절대부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졸업 후 사회 진출에 대한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학생수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졸업생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곧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2)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드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구원자였고 그후 프랑스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미제국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나토를 탈퇴하는 등 대미종속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지만 60년대말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의존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펴는 부작용을 낳았다.


3) 2차대전 후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구조적 변동과 소비사회의 도래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을 꼽을 수 있다. 혁명 와중에 나타난 문구들을 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인종차별 등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으며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개과정


당시 프랑스에서는 68년까지의 10년동안 인문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3.5배, 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4배 증가한 상태였으나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대학과 사회 모두 역부족이었다. 대학의 면적은 같은 기간 동안 겨우 2배 증가했을 뿐이며 불투명한 진로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또 전쟁과 공황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의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불만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하기 위해 American Express Bank를 습겨하다 체포된 급진파 학생 6명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3월 22일 다니엘 콩방디를 비롯한 8명의 학생이 낭태르 대학 학부장의 집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점거 6일만에 경찰에 의해 캠퍼스는 봉쇄되고 강사들과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낭테르 대학 폐쇄에 반발한 학생들은 5월 3일 소르본에서 시위를 계속한다 10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다 경찰과 유혈충돌이 일어난다 .그 이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학생들보다 2주정도 늦은 13일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공장을 점거하고 연속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해 천만명의 노동자가 파업하는 등 사회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른다. 27일 CGT등에서는 임금의 10%인상등을 담고 있는 '그르넬 협약'을 맺지만 그 후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다 29일 드골실종사건을 계기로 드골지지시위가 있다. 이후 6월 5일 시위는 막을 내리고 드골정권은 6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진 드골은 대통령을 사임한다.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는 68년의 상황에서 반자본의 기치 아래 학생과 노동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과 청년 노동자는 프랑스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학연대를 실현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이 정치적 좌파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로 통합되기 이전의 학생들은 객관적 거리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관료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병폐를 간파하고 이와의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청년노동자들 역시 노조지도부를 불신하고 있었고 경제주의적인 타성에만 젖어있는 기성노동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5월 22일부터 학생과의 연대를 단절한다. 5월 27일 '그르넬 협약'체결을 공포한 후 연대는 와해된다. 하지만 '그르넬 협약'은 일선 노동자들로부터 거부당하고 파업은 계속된다.


특징


5월 혁명의 특징은 일상 생활에서의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이 융해되어 표출되었다는 데에 있다.

69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드골의 경제개발정책과 식민지 정책에 반대했다. 즉 소회된 노동의 거부와 제 3세계 수탈의 거부가 68을 이은 두 개의 이념이었다. 68혁명은 자본주의적 노동을 사회주의적 노동을 반 소외의 관점에서 동시에 문제삼았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발전, 그 경제적 진보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혁명은 노동에서 출발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햐려 했던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달리 일상의 삶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통제의 권력에 지나지않는 국가권력 장악을 거부하고 삶의 복구와 확장, 즉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즉 물질적 행복의 추구를 넘어서 자아의 실현이라는 질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 5월 혁명은 프랑스사회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를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상수준에서의 관습과 인습의 엄청난 변화가 이를 말해준다. 68 이후 이성간의 동거와 피임기구의 판매가 자유롭게 되고 사제간의 경어 사용이 폐지된다.

"혁명을 생각할때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라는 슬로건에서는 혁명가들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고 싶어하는가가 아니라 혁명가들이 무엇을 하고 그 일을 할 때 어떻게 느끼는 가를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해방과 사회적 해방이 병행되었다.

68년은 산업사회의 계급갈등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후기산업사회의 탈계급적인 새로운 사회운동이 혼재하여 나타났다. 전통적 노동운동을 넘어 환경운동, 여성운동, 정보운동, 반핵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배계급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해 68을 선거로 봉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혁조치들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업의 감축, 노동자의 경영참가에 따른 공장의 공동관리, 학생 참여에 따른 학교의 공동관리 등이 그것이다.

68혁명의 모두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모두가 토론을 했다. 60년대를 통해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저항하여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영화와 출판물에 있어서도 성과 폭력이 일반화되었으며 마약과 환각제가 공공연하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혁명세대는 성의 자유와 함께 이를 공개적인 담론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세대의 가치관이 가지는 허구성과 위선을 폭로할 수 있었다. 이전에 금지되었던 것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68혁명으로 인해 섹스, 마약, 동성애 같은 모든 금지가 풀리게 되었다. 결국 68세대는 개인적 해방과 함께 사회적 해방을 완성했다. 68혁명은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가치, 새로운 고민,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을 부여했다. 공장에서든 정치에서든 교육에서든 방송에서든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은 무너지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대화에 근거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지위상승과 여성운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인다. 여성운동가들의 저서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이후 낙태와 피임을 합법화시키는데에 또 의료보험의 대상이 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5월에 맛본 자유의 장기적 파급효과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 폭발을 간단히 잊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시에 드러났던 사회적 모순들이 자진해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은 순종시키기 위한 제약과 사회적 지서를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자신들과 전세계 사람들에게 인류의 존엄을 확인시켰다.

68혁명은 상상할수조차 없었던 산업화된 국가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권위와 명성의 상징이었던 드골을 1969년 4월 27일 은퇴시켰다. 또한 권력구조를 능률화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참여의 외관을 부여하는 일군의 개혁이 도입되었으며 종국에는 1981년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68혁명은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통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성과를 얻었다.



68혁명의 정치적 의미


1)애국주의와 국제주의


5월 투쟁의 목표로 했던 비전은 어떠한 국가경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국경을 타도하라"는 구호는 대중적 감정을 표현했다. 전단과 포스터들을 통해 쁘띠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조직적 켐페인이 수행되었다. 이 켐페인은 즉각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세계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5월 사태에 참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생폭동이 강화됨에 따라 파리의 외국인 학생 기숙사는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기숙사들의 민주적 재조직이 요구되었고 고향과 프랑스내에서 모두 해방운동을 지원해 줄 것이 요청되었다.

2개국어로 된 포스터들은 아랍인과 유대인같이 겉으로 보기에 적대적인 집단들이 "당신들의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노동자들의 일자이레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인종주의자의 공격을 빈번히 받았던 프랑스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6월의 기간동안 동지로 받아들여졌다. 총파업은 분열된 노동자들을 변화시켰다 .경영자 측이 이민자들을 구사대로 동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절대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저항자들의 국제주의와는 달리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파리에 오고자 시도했던 많은 젊은이들에 대해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국외추방은 프랑스에서 외국활동가들을 제거하는데 이용되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국경철폐를 위한 행동위원회가 파리에서 건설되어 유럽인들이 혁명을 대륙전체로 확산시킬 것을 촉구했다. 행동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반향이 있었다.


2) 권위주의와 자주관리


총파업의 참여자들 중에는 많은 수의 전문가들, 기술자들, 생산라인 밖의 사무실 요원과 서비스 요원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단결된 노동계급은 이전까지의 분절되고 부분적이었던 생산관을 통합할 수 있었다. 지식의 구획과 그에 상응하는 특권화된 전문가와 경영자에 대한 필요는 희망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공공연히 논박되었다.

1968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파이의 더 많은 몫을 분배받기 위해 파업을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르넬협약에 대한 그들의 압도적 거부, 지주관리에 대한 많은 제안들, 소유권 폐지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들이 그것이다 총파업기간중 많은 공장들을 점거했으며 경영진 없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강자에 대한 복종으로 더 많은 재화를 얻고자 하는 대신 그들의 직무와 삶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를 원하는 프랑스 노동자의 깊은 열망을 나타내준다. 자주관리는 프랑스의 집중화 권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율과 직접 참여에 기반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 주었다. 자주관리는 소비사회의 수동성과는 대조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했다. 자주관리는 지식의 구획과는 대조적으로 집단구성과 개인적 기술들의 공유를 요구했다. 그르넬 협약을 거부하고 파업을 계속한 기층노동자들은 좀더 많은 임금이나 좀 더 좋은 작업조건이 아니라 더 이상 복종적인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동기에서 파업을 지속하였다. 즉 이들은 생산현장에서의 권력관계 재편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통해 자율적으로 공장을 운영해갔다. 이런 자주관리는 대학에서 기원한 것으로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하는 데모크라시'를 내세워 대학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대학의 결정권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6월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프랑스 혁명은 꼬뮌을 추구한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이후의 역사에서 보면 계급간의 싸움에 있어 서전에 불과하다. 5월의 노동자투쟁은 학생의 카드제시로 시작하여 드골의 또다른 카드제시로 끝났다. 그러나 5월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전후 제국주의의 경제적 세계체제의 막바지에서 프랑스자본주의가 부딪친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둘러 싼 대립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했다고 보기 힘들게 한다.

5월혁명은 선진자본주의국 내부의 진정한 투쟁이 공장점거반란으로 들고 일어선 노동자대중과 지배계급·국가권력사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대중 내부의 혁명파와 질서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폭로했다. 즉 노동자에게 자기 자신들 속의 질서파, 조합적·회의적 개량파를 무력화하지 않고서는 지배계급·국가권력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었다.

또하나 혁명의 전위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르조아적 노동자당과 싸울수 있어야 하며 조합주의적인 켐페인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 즉 사회변혁적이고 또 저이체제의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으로서 68혁명은 결코 성공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처음부터 68혁명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68은 분명 그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단절시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문화와 가족제도 대중문화의 측면에서 변화의 모습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68혁명의 성격중 일부이다.

그러나 68을 재평가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계급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켰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48년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 이래로 프랑스에 있어서 120년만에 노동자중심성, 반자본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명백히 계급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혹자들이 지나치게 68의 일상성에 침잠한 나머지 보고 있지 못하는 부분이 아니었는가 한다.

68세대들이 이제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68혁명을 주도했던 세대. 그러나 사실 정권을 잡은 68세대들은 이미 그 때의 주역들과는 많이 멀어져 제도권으로 편입해간 인물들이 아닌가.

우리가 볼 것은 지금의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들이 외쳤던 말들을 현재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던 부르주아 혁명은 68년에 재전위되면서 프랑스를 주목케 했다. 다시한번 대혁명의 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지금. 다시 우리는 '실업자 운동'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 본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꿈은 아직 접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까치, 1997.

요미우리 신문사,『20세기의 드라마 3』,새로운 사람들.

월러스틴,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신진욱 외, 『학회평론』11호, 1995.

"68혁명 이후 한세대", 카피레프트 모임, 『읽을 거리』2호, 1998.

노동자연대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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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여고생 충격 유머

전에 딴지일보ddanzi.com에서 본 유머인데 지금 찾을 수가 없다. 한 순진한 여고생이 충격먹는 내용인데 기억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나도 어릴 때 이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고딩 때는 아니고...).

 

여학생 Q: 상담 선생님, 저는 ㅎㅎ여고 2학년 학생입니다. 얼마전에 친구 집에 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라는 것을 봤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지금도 밥도 잘 못먹고 있어요. 짐승같은 그 모습이 사람이 너무 불결한 것 같아요. 그때 그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막 매스껍고 그래요.

우리 부모님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런 짓을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엄마 아빠도 이상하게 보이고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어떻하죠, 선생님?

 

 

상담선생님 A: 학생,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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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랑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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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해산... 그리고

http://www.youtube.com/watch?v=-6G7MkBMVxE&search=beatles

http://www.youtube.com/watch?v=Xra3UKhbG1o&search=beatles

[MV] The Beatles - Get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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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Back (Rooftop Concert) - The Bea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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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 - Get Back (Let It Be...Naked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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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장부터 결성이 아니라 해산을 논하나? 하겠다. 원래 그런게 재밌는거다. 비틀즈의 경우도 해산이 쏠쏠하다. 중심축인 John과 Paul의 갈등이 비틀즈를 사상 유례없이 만개하게 하였다.

 

John과 Paul은 비틀즈의 정식 데뷔 4년전인 58년도에 처음 만났다. 당시 John의 카리스마 밴드에 Paul이 가입했쥐. 존이 참 고민을 많이 했단다. 내가 이 밴드에서 왕인데 이 얼굴 Elvis 비슷하게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더구나 15살부터 작곡을 하던 이 노마를 밴드에 넣을 것인가... 받으면 팀이 강화될꺼 같구 반면에 나의 아성에 개길꺼 같구....

 

바로 그거다. 비틀즈는 John과 Paul의 경쟁 긴장관계 속에서 사상 유례없이 꽃펴왔다.

결국 John은 Paul을 받았으며 Paul을 쫓아 John도 열심히 작곡하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고의 작곡 컴비인 Lennon-McCartney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둘의 최초의 갈등은 1965년 말. 롤링스톤지 평가 멘트대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앨범일지도 모르는' Rubber Soul 앨범 시절 처음 표면화된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타 리프곡인 John의 작곡 Day Tripper를 싱글 A면으로 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Paul의 작곡 We can work it out이 역시 A면 가오로 급부상하였다. 팽팽한 양측의 세싸움 결과 더블 A사이드 싱글로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2곡이 모두 1위하였고 미국에서는 We can work it out이 1위, Day Tripper가 빌보드 5위를 차지했다. 2곡 모두 Rubber Soul 앨범 전체를 규정하는 걸작들이다. 좌우간 이렇게 신경전이 불거졌다.

 

1966년의 '롹 역사상 가장 실험/혁명적인 앨범' Revolver에서는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Paul의 재능과 더욱 깊히 자아를 성찰하는 John의 개성의 차가 더욱 두드러졌다.

 

공연을 완전히 중단한 후

1967년 '비틀즈의 농축된 재능이 만들어낸 불가사의'인 Sgt. Pepper~ 앨범을 만든다. 이 앨범의 피날레 곡인 A day in the Life는 비틀즈 최고의 걸작곡으로 평가되는 노래로 John과 Paul의 합동작인데 이는 작곡을 같이 한게 아니라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곡을 기술적으로 합친 것에 불과했다. 이후 매니져인 Brian Epstein이 overdose로 죽는다. 이 때부터 워커홀릭인 Paul의 독주가 시작된다. 반면 게으른 John은 Yoko 주위를 겉돈다.

 

1968년 '비틀즈의 섬광이 극치에 달한 더블 앨범' white album에서 이제 이들의 결속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Rubber Soul/Revolver 2장을 합친 듯 30곡의 명곡을 쏟아냈지만 그 곡들은 각 멤버의 솔로곡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멤버는 단지 세션 연주가의 역할에 불과했다.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 맨날 싸워댔는데 정작 팀을 떠나겠다고 한 것은 드러머 Ringo였다).

 

69년 공연을 다시 재개하기 위해 시작한 Get Back 프로젝트를 통해 멤버들간의 관계는 오히려 완전히 파탄났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Paul의 Get Back의 꿈은 결국 해산하도록 내버려둬라Let it be가 되었다. 결국 공연도 못하고 런던 애플 옥상에서 게릴라 콘서트 비슷하게 하는걸로 대체되었다. 69.1.30 옥상 공연은 팀의 마지막 결속의 활동이다. 그런만큼 최상의 컨디션 상태 연주를 보여주었다.

 

69년 중순 이제 아주 내놓은 제목의 Ballad of John n Yoko라는 싱글을 녹음하는데 오히려 John, Paul 둘이만 만나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고 녹음했다. 이곡이 노래로써는 둘간의 실질적인 마지막 협력이리라...(나중에 John은 자신의 솔로곡 Give Peace a Chance에서 그 고마움의 표시로 작곡 크레딧을 Lennon-McCartney로 달았다).

 

1969년말 '해산 직전이라고는 그룹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걸작' Abbey Road가 폴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비틀즈의 실질적 마지막 앨범이다. 서로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느낀 만큼 멤버들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앨범의 B면은 하나의 opereta를 창조했다. 반면 이에 대해 존은 서로 다른 곡을 하나로 묶은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좌우간 앨범으로는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으로 마지막 곡 제목도 공교롭게 the end이다(그러나 실제 마지막 곡은 히든트랙 Her Majasty이다)

 

1970년 방치되던 Get Back 프로젝트의 잔여물이 앨범 Let it be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멤버들 중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고 방치되던 것이었다. Get back은 포기되고 걸맞게 Let it be로 명명되었다. 형식적인 마지막 앨범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중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녹음한 George Harrison 작곡의 I ME MINE은 그나마 존이 참가하지도 않았다. 역시 앨범 수록곡 중 The long n winding road는 비틀즈의 마지막 싱글로 70년 20번째 빌보드 1위곡이다. 마치 비틀즈의 역정을 정리하는 듯 하다. 공식적인 마지막 노래이다. 그랬다.

 

 

ps.

비틀즈의 5대 명반에 대한 찬사는 침이 마를만큼 해도 모자라지 않다. 물론 전작 초기4장 앨범도 롹큰롤 폼을 규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5대명반은 마스터 피스들이다. 도저히 버릴 곡들이라고는 없는, 마치 히트곡 모음집을 연상케하는 Rubber Soul (65)/ Revolver (66) 그리고 그와 비슷한 두장짜리 더블 앨범 white album(68), 개인적으로 꺼리나 67년 Sgt.Pepper 앨범은 당시 녹음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한 시의적절함이 있었으며 실질적 마지막 앨범 abbey road(69)는 opreta 도입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진보적이었다.

 

최근 스톤즈를 좀 들어봤다. 롤링스톤즈의 명반으로 이하의 것들을 뽑는다.

 

    AFTERMATH  1966
    Between the Buttons 1967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BEGGARS BANQUET  1968
    LET IT BLEED -   1969
    Sticky Fingers -   1971   
    Exile on Main St. - 1972

 

어떻게 비틀즈와 비교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과거 스톤즈 곡들중 엄청 뛰어난 레퍼토리들은 satisfaction, get off my cloud, paint it black, jumpin jack flash, sympathy for devil, honky tonk woman, gimme shelter, brown sugar 등 몇곡 안된다. 위의 앨범들 중에도 후진 곡들 많이 있다. 비틀즈처럼 전곡이 다 뛰어난 음반 만들기가 그렇게 힘든거다.

 

롤링 스톤즈의 최고 명반으로는 스톤즈판 2장짜리 white album으로 평가받는 Exile on Main St.을 친다. 음... 충분히 그 가치를 대접받을 만한 명반이다.

 

개인적으로 롤링 스톤즈 앨범 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좋아한다. 비틀즈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사아키델릭 앨범 모방작 아류라고 엄청 욕먹었던 앨범이지만 앨범 그 자체로는 잘 만든 작품이다. 스톤즈로서는 새로운 참신한 시도이다.

 

롤링스톤즈의 최고 명반을 LET IT BLEED 69년작이라고 생각한다. Get Yer Ya-Ya`S Out! 1970년 실황앨범과 같이 들으면 좋다. monkey man같은 곡 스타일은 Cream 지향적 연주이다.

 


Rolling Stones / Let It Bleed
01   Let It Bleed 
02   Love In Vain 
03   Midnight Rambler 
04   Gimmie Shelter 
05   You Got The Silver 
06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07   Live With Me 
08   Monkey Man 
09   Country Honk 

Rolling Stones / Get Yer Ya-Ya`S Out! (Live)
01   Jumpin` Jack Flash 
02   Carol 
03   Stray Cat Blues 
04   Love In Vain 
05   Midnight Rambler 
06   Sympathy For The Devil 
07   Live With Me 
08   Little Queenie 
09   Honky Tonk Women 
10   Street Fighting Man 

 

이 앨범은 레온 러셀, 알 쿠퍼, 라이 쿠더, 지미 밀러 등 롤링 스톤즈 앨범 사상 가장 화려한 게스트들이 등장하는 수작이다.
또 하나의 롤링 스톤즈다운 명곡으로 기억될 'Gimme Shelter'에서는 소울적인 뉘앙스도 감지되고 있는데, 코러스 부분에서 이들은 살인과 능욕, 그리고 사랑 등을 매우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라이 쿠더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 'Love In Vain', 피들 연주가 시골적인 풍경을 잘 표현해주는 'Country Honk', 키쓰 리처드의 베이스와 레온 러셀의 피아노, 그리고 바비 키스(Bobby Keys)의 테너 색소폰 연주 등을 들을 수 있는 경쾌한 'Live With Me' -레온 러셀의 혼 어레인지도 좋다-, 이안 스튜어트의 피아노가 사이드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키스의 슬라이드 기타 솔로 역시 구수하게 다가오는 타이틀곡 'Let It Bleed', 브라이언 존스가 퍼커션을 연주한 폭력적인 남녀차별주의적 송가 'Midnight Rambler' -리듬이 점차적으로 빨라지며 흥분도를 더하는 것이 인상적-, 키쓰 리처드가 보컬과 기타를 함께 맡고 있는 'You Got The Silver', 탬버린과 비브라폰 등을 삽입하고 있는 재즈적 업템포의 'Monkey Man', 그리고 CF에 삽입되어 익숙한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Version 2)'에서는 알 쿠퍼가 피아노부터 프렌치 혼, 오르간까지 도맡아 연주하고 있으며 런던 바흐 성가대까지 가세시키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한편 이 앨범이 공개될 즈음 이미 비틀즈는 와해와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롤링 스톤즈는 세계 최고의 로큰롤 밴드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앨범을 끝으로 브라이언 존스가 그룹을 떠난다. 그는 멤버들과의, 더 정확히는 믹 재거 및 키스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가 두드러져 결국 팀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는 밴드를 탈퇴한지 불과 한 달만에 죽고 말아 주변을 가슴아프게 하기도 했다. 


첫 포문을 여는 전미 챠트 1위 곡 brown Suger는 이들의 라이브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곡으로(이들의 공연을 보면 이 곡이 나올 때 가장 화려한 스테이지가 연출된다) Keith Richards의 발군의 리듬기타 베킹을 중심으로 어쿠스틱 기타, 섹스폰, 피아노가 혼연일체를 이루며 흥겨운 로큰롤을 만들어 낸다. 이어지는 sway는 brown sugar보다 템포가 한층 느려지긴 했지만 흑인 블루스의 향취가 그윽한 곡으로 특히 곡 후반부 Mick Taylor의 발군의 기타 솔로를 들을 수 있다. Pearl Jam 의 alive의 후반부 기타솔로와 비견될 만하다. Rolling Stones의 곡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사실은 Rolling Stones이기 때문에 가능한) 록발라드 wild horses는 필자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다. 노을이 비껴가는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유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는 듯한 여운을 주는 곡이랄까. 공격적이고 거칠 것만 같은,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 연출자 Mick Jagger의 보컬 역량을 이 곡에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명곡 can’t you here me knocking은 록큰롤풍으로 흐르다가 곡 중반부부터 B. keyes의 흐느적거리는 섹스폰이 재즈적 빚깔이 내는가 싶더니 이내 Mick Taylor의 진득한 블루스 기타톤이 끼어든다. 기타와 섹스폰이 섞여 마치 서로를 애무하는 듯한 모양새로 곡을 마친다. 이 곡 중반부를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적 무드를 연상케 하는 곡이다. 이어지는 곡 you gotta move는 블루스 풍의 한층 느려지고 단순해진 사운드의 곡으로 뭔가에 도취된 듯한 보컬과 슬라이더 기타가 절묘한 어우러짐을 연출해 낸다. 분위기를 또 다시 바꿔 이어지는 btich는 터프하고 거칠 것 없는 전형적인 Rolling Stones표 음악이다. 보컬, 관악기, 슬라이더 기타, 그리고 타악기가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지면서 익사이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Rolling Stones가 왜 록큰롤의 천재인가를 말해준다. Mick Jagger의 호소력 짙은 보컬이 돋보이는 l got the blues는 브라스의 반복적인 멜로디라인이 가히 일품으로 곡 중간 Billy Preston의 하몬드 오르간 연주는 곡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 준다. 거장 Ry Cooder가 참여해 멋드러진 슬라이더 기타 연주를 선보인 sister morphine은 일설에 의하면 당시 Mick Jagger와 연인으로 마약에 찌들어 있던 Marianne Faithful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라 한다. 상큼한 컨트리풍의 곡 dead flower는 이 앨범 전체를 지배하던 흑인 블루스 필이 완전히 가신 곡으로 블루스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내 팬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듯 한 곡이다. 곡이 경쾌하고 부담이 없다. 마지막 곡 moonlight mile은 Stones팬들에게 she’s rainbow나 2000 light years from home과 함께 이들 최고의 사이키델릭록으로 받드는 곡이다. 특히 후반부의 웅장한 스케일의 현악연주는 아트록과 클레식의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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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성폭력 피해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 증명해야”라고 또 삽질

대충 마초 법관들 개념없는건 알지만...

 

왜 항거불능을 입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협의지만 폭행 협박 입증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나아가 항거불능 판단하는데 있어 사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고려한다.

 

행위 당시만 판단하면 되는거 아닌가!

 

흥분하고 신음소리내고 하는거 왜 고려하지 않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관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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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 
  
 
 김삼권 기자 quanny@jinbo.net 
 
 법원이 미성년 정신지체 장애여성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일고 있다.


법원, “성폭력 피해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 증명해야”


부산고등법원 형사2부는 20일, 99년부터 03년까지 동거녀의 딸(99년 당시 14세)을 8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 모 씨에 대해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며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선고에서 역시 재판부는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에관한법률(성폭력특별법) 제8조를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성폭력특별법 제8조는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자는 형법 제 297조(강간) 또는 제 298조(강제추행)에 정한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였다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며 ‘항거불능 상태’에 대해 “이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는 심신 상실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피해자가 정신지체 장애인이지만 초등학교 3-4학년의 지능이 있고, 학습능력만 떨어질 뿐 사회적 성숙도는 다른 학생과 비슷하기 때문에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해자에 대한 정신감정결과를 언급하며 “윗사람의 성행위 요구에 대해 충분히 반항하거나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떨어짐으로써 성폭행을 쉽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지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장애여성 특수성 고려되지 않은 무지의 소치”


법원의 이번 선고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부산여성장애인연대, 부산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장애인 관련 단체들은 “이번 결정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신희원 한국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무지의 소치이자 장애여성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법원이 성폭력특별법 제 8조, ‘항거불능 상태’를 고무줄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원이 정신지체 장애여성의 경우에는 건강한 신체 상태를, 반대로 신체 장애여성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이유를 들며 ‘항거불능 상태’를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있다”며 “이 조항은 장애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항이 아닌 독소조항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신 소장은 또 “성폭력특별법에 정신지체 장애인이 ‘항거불능 상태’라는 것이 명시되거나, ‘항거불능 상태’에 대한 언급을 삭제해야 한다”며 성폭력특별법 개정 필요성을 지적했다.


신희원 소장은 법원이 이번 결정의 근거로 이용한 정신감정에 대해서도 “국가기관인 보건복지부의 판단에 근거해 이미 정신지체장애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법원은 또 다른 진단을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국여성장애인연합회를 비롯한 장애여성 단체들은 21일 이번 결정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2005년04월20일 22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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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몽드 ‘김일성 항일투쟁 인정해야’ 뒤늦게 인터넷 가열

학교갔다가 밤늦게 집에 왔더니 재밌는 기사가 올라왔더구나.

 

김일성은 해방전 항일투사, 해방후는 사상 유래없는 독재자 정도로 팩트 확정하면 될 것 같다.

 

어떤 초딩이 리플 붙이기를

그래, 해방전 항일투사였다는거 인정하고 교과서에도 실을테니 해방후 어떤 독재 행적을 했는지 교과서에 같이 올리자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후자는 교과서에 올릴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걸 가지고 고딩 용어로 논의의 실익, 구별의 실익이 없다고 한다.

 

금년에 할지 모르겠지만 과거사 청산법? 규명법? 만드는데 있어

그럼 좌익 과거사도 같이 캐자고 하는 일단의 초딩 무리가 있다. 웃기는 소리다.

 

과거 국가보안법은 뭐했나? 오바해서 무자비하게 단죄하고 다 끝난 일이다. 고문 끝에 옥사한 빨갱이들 무덤 한번 더 파자는 말이냐? 그게 무신 의미가 있을까?  이런걸 가지고 고딩 용어로 논의의 실익, 구별의 실익이 없다고 한다.

 

굳이 하나 들자면 소장파 장교 박정희의 과거사를 새로 조명하는 실익이 있다. 어떻게 좌익했는지, 어떻게 동료들 팔아먹고 저만 살았는지, 어떻게 변절했는지 등등등...

 

머리가 달려있으면 미리 보고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좀 하고 살았으면 한다. 꼭 찍어먹어봐야 아나?

 

 

르 몽드 ‘김일성 항일투쟁 인정해야’ 뒤늦게 인터넷 가열
네티즌, ‘르 몽드’가 한국을 무시한다며 친일청산 논쟁 한창
2005-04-20 17:24 김선애 (iyamm@dailyseop.com)기자
프랑스의 유력일간지인 '르 몽드'가 지난 14일 특집으로 다룬 '남한, 슬픔과 연민'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뒤늦게 인터넷 토론방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네티즌의 눈길을 잡아 붙든 주요 이슈는 "남한이 김일성 항일투쟁을 인정해야 한다"는 부분.

이 기사는 지난 15일 연합뉴스가 속보로 보도했으며 대부분의 일간 매체들이 받아 다음날 신문에 게재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르몽드'에 실린 기사의 일부만을 다뤘기 때문에 강만길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의 발언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 대자보는 “연합뉴스는 전체기사의 맥락을 무시하고 극히 일부분만 소개해 기사의 본질을 왜곡했다”고 강조하면서 15일 르 몽드의 기사 전문을 소개하면서 인터넷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대자보에 의하면 '르 몽드'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한국의 과거사청산의 진행과정으로 해방이후 친일청산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분단 이후 친일파가 그대로 지배세력이 됐고, 이후 친일경력의 박정희 장군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여전히 정치·경제계를 지배하게 된 엘리트계층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이 일본에 협력한 과거를 씻어내기에 바빴던 때문이라는 것이다.

▲ 지난 14일 프랑스의 르몽드 지에 실린 한국 관련 기사 화면 
르 몽드는 한국이 과거사청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한국이 희생자였음은 분명하지만 한국이 책임져야 할 부분(권력층, 재벌부터 평범한 협력자까지의 내부 협력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한국정부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당혹스러운 역사적인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밝힌 르몽드는 이어 “(해방 이후) 반공 프로파간다에 의해 수십년 동안 외면되고 비하되었던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이제는 교과서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문제의 본질은 연합뉴스가 르 몽드의 기사 본질을 왜곡했다는 점이지만 네티즌은 프랑스의 나치처벌 과정과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을 비교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논쟁의 시작은 ‘촛불사랑’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네티즌이 17일 마이클럽 블로그에 쓴 ‘르 몽드가 한국을 비웃네요’라는 글을 네티즌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토론방으로 실어나르면서 부터이다.

‘촛불사랑’은 “르 몽드는 한국에 드골이 없었음을 비웃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드골은 정권을 잡은 후 미·영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치에게 부역한 세력을 숙청했다. 이는 이승만정권과 분명히 대조되는 경우이며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했다.

덧붙여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통해 (한국의) 드골이 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세를 위협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타파하기 위해 극우 반공주의를 표방했던 것”이라며 “르몽드는 이념이 다른 한 인간의 항일투쟁도 받아들이기 힘든 나라가 친일의 거두로 자리잡고 있으며 국부로 추앙받는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겠느냐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촛불사랑’의 글은 19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에 주요이슈로 떠오르면서 네티즌의 공방이 본격화 되었다.

아이디 ‘아수라백작’은 ‘르몽드는 하나의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라는 글을 통해 “(우리나라에도)드골보다 더 역량있는 독림운동인사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드골과 자유프랑스 정부에 있었던 것 만큼의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었다. 우리는 35년이나 일제하에 있었으며, 미군정은 신점령군으로 친일인사를 행정부에 기용했다. 이승만이 집권한 후 자신의 정권욕의 반의 반만 이라도 친일 청산에 노력했더라면 미래세계정세를 바로 읽고 민족발전에 기여한 국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보연’은 “남한의 친일청산이 프랑스나 북한을 본받지 못했다고 비분강개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북한이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현직대통령과 전직대통령을 욕할 수 있는 자유도 누리기 때문이다”라며 “중요한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아픈역사를 겪지 말아야 하는 교훈이며 과거 우리 국민을 교살하고 문화재를 약탈한 프랑스가 우리를 깔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확고한 애국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뿌니’는 “우리나라와 프랑스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프랑스는 강대국이었고 2차대전 중 단 몇 년동안 점령당한 것에 불과했고, 우리나라는 쇠잔하고 망해가는 전근대적인 조선이란 국가가 36년간이란 일제통치를 거쳐 겨우 반쪽짜리 독립을 이루었고, 6·25전쟁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이승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으며 이에대해 ‘당근쥬스’는 “점령기간이 짧았으면 청산했으리라고 장담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은 것이 6.25동란 후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반민특위가 동란후에 있었나?”라고 반박했다.

‘로미오’는 “자그마치 36년간이나 일제가 지배했다. 그 긴 기간을 일제점령하에서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일제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걸 접어두고 무조건 처벌하자고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은 이에 직·간접적으로 얽혀들 것이다. 목적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청산과정에서 발생가능한 감정적 요인 등을 배제하지 못하고 처벌과 배격위주로만 흐른다면 이는 민족분열에 버금가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라고 썼다.

이에대해 ‘도라도라’는 “점령 기간은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눈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국민은 통제되고 바보였으니까. 그런데 일단 지금 국민들은 알거 다 알고 눈을 떠서 똑똑하다. 그런데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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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 노조에 관한 퍼온 글(진보누리)

오늘은 이슈가 없어서 진보누리에서 글퍼온다. 조만간 산별노조 시스템으로의 재편 당위성에 대해 함 쓰기로 하구...

 

솔직히 오늘 이슈는 김대중 숨겨놓은 딸 얘기인 것 같은데1967년 마초 국가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이 지금 이슈가 될까? 남자의 아랫도리 허리하학에 대해 무진장 관대하던 당시 빡통은 장관이 집무실에서 여자불러 빠구리트고 있어도 넘어갔다고 한다. 그 이후도 계속 코리아는 요정 정치하던 나라였다.

 

사후에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도 숨겨놓은.... 드러나긴 했는데 당시 에치켓으로 그냥 넘어간다... 요즘도 그러면 곤난해

 

 

 

 

Name      양한승  (2005-02-08 22:32:24, Hit : 354, Vote : 9)
 
 
Subject  
   산별노조와 당총 혁신
 
 

전노투가 큰 일을 했다. 한국의 모든 유력 언론매체가 민주노총 사태를 다루며 국민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대개 보수 여야정당이 제출한 의제를 가지고 사회적 소란을 만들었던 공중파 방송은 부랴부랴 긴급 심야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집중 조명에 나섰다. 물론 노동조합의 부패와 폭력 이야기가 핵심 소재다. 단상을 점거했던 전노투 회원들의 공로다. 덕분에 국민파 등 집권노조 온건지도부는 미디어 권력의 시혜를 받아 얼굴을 팔고 있다. 그들은 보기 좋게 편집된 카메라 인지도를 활용하여 돈을 벌고 있는 탈랜트와 다름 없다.   

한편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이러한 안방 여론의 힘을 얻어 재도전에 나섰다. 이번엔 목을 걸고 자본의 이익관철 기구인 노사정위에 올인(All In) 할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허나, 전노투가 나서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마당이니 민주노총은 전노투의 의견을 들어 노사정 교섭 이전의 노노간 사회적 타협안을 먼저 마련해주었으면 한다. 중재안을 감히 제시한다면, 노사정위 참여를 2010년까지 유예하고 사전에 한국노총과 통합하여 정규직/비정규직/실업자 등을 포괄한 대산별노조로 조직을 완전히 변경하는 게 시대적 요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5년의 유예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변화를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데, 이 글에서는 웬만한 전쟁보다 참혹한 30년 주기의 대공황에 걸려 있다는 점과 좌파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읽고 있다는 단정만 전한다.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세엔 오히려 사회적 교섭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진보좌파 세력이 보수우파의 적대적 비토를 받지 않고 국정책임을 전면적으로 위임받을 수 있다. 이 때는 노사정위가 계급운동의 훌륭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기업별 노조를 강제해온 각종 규제장치가 자연스럽게 붕괴될 거라는 기대감도 있다.

다른 한편, 민주노총은 내부 민주성을 확고히 다져야 한다. 지도부를 조합원 총투표로 뽑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그 권위를 가지고 이번과 같이 전체 노동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책사안에서 대의원들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대회는 월권에 가까우며, 설혹 일각에서 주장하는 조합원 총투표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참고용이 되기 십상이다. 상식적으로 지도부 선출의 권위보다 조직의 정책결정이 더 권위를 인정받는 일은 없다. 산별노조에 대한 필자의 평소 주장을 요약해 첨부하면서, 올해가 어쩌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이 자리를 잡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보낸다.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이번 일에서 목도하듯 당 정책위와 노동위, 노동부문 최고위원 등 그 어느 하나 입장 천명을 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의 신뢰를 크게 저버렸다. 지도부의 성격은 곧 조직의 성격이다. 지금과 같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여기에 미련을 두고 있다가 중요한 시기를 놓쳤는지도. 이 글의 '산별노조와 당총 혁신' 주제를 제3노총 및 좌파정당 건설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 그만큼 필자의 고민이 절실했던 것이다. 대중적 소통과 동의를 구한다.         


.........................
[요약] 산별노조론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현재의 기업별 노조를 개혁하여 산업별 체제를 확립하는 일은 현단계 최대과제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단순히 조직형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창출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직과 투쟁, 정치역량과 운동이념의 발전을 통한 계급통일과 적극적 의미의 사회체제 변혁이라는 노동운동의 역사적 책무수행과 맥락을 같이 한다.

노동운동을 추진하는 기본축은 조직과 이념이다.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조직은 과학적인 이념과 결합할 때 확대 강화될 수 있고, 이념은 투쟁을 매개로 하여 조직의 발전을 통해 구체화되고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조직은 노동운동 추진의 토대이고, 조직형태는 노조조직의 골간 구실을 한다. 기업별 노조형태는 노동자들의 종업원 의식이나 기업 귀속의식의 극복을 어렵게 하여 계급적 의식형성을 가로막기 쉽다.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은 대체로 독점자본주의와 대량생산체계의 성립, 노동력 구성과 노동자 저항의 경제기초 변화 그리고 실제적인 노동과 자본의 계급투쟁을 통한 산별노조 성립에 동의하고 있다. 특히 노동과정의 기술적 성격 변화는 동질적인 탈숙련 노동자대중의 형성을 비약적으로 촉진하고 있기에 산별노조 전환을 위한 경제구조적 조건이 충분히 형성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비중 증대에도 불구하고 공업부문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중화학공업과 자본․기술집약형으로 진전되고 있다. 이런 구조변화는 서비스부문과 중소기업의 결합하는 초기업적 노동운동을 요구하고 있다. 특징적으로 일용․임시직․시간제․파견노동자 등 불안정 노동자 비중이 고용시장의 6할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영세 중소업체가 여전한 가운데 대기업과 하청노동자들이 수직적 편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노동조합 조직확대와 계급적 연대를 어렵게 하여 기업별 노조체계를 고착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노동시장의 구조변화, 그리고 독점자본과 그 연합체의 지배력 증대에 대응하고 기업별 노조형태가 지닌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업별 노조 전환이 불가피하다 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조합운동은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고통스러운 위기 국면이 장기화될 가능성마저 높은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꿈을 지배하기 위해 항상 눈알을 굴리고 있다. 여기에 대항하여 민주노조진영은 그동안 산별노조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1989년 전교조와 1994년 과학기술노조는 전국 단일노조를 결성함으로써 산업별 노조 신설을 위한 좋은 사례를 창출하였다. 곧이어 업종연맹들의 산하 단위노조가 상급에 단체교섭을 위임하는 관행도 산별노조 전환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양되어야 할 한국 노조운동은 여지없이 거꾸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왜일까.

총자본의 공세에 취약한 이념적 미비에 가장 큰 원인이 있음은 물론이다. 조직적 측면에 보면 23년이 넘게 유지되는 기업별 노조와 단위노조 간부의 협의체적 수준에 머무는 노총 네셔날센터의 책임이 적지 않다. 대개 불안정 노동자들을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기업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간부의 관료화를 제어하지 못했다. 관료화는 산별노조에서 더 큰 문제로 등장한다.

그러기에 조직형태를 변경함에 있어 노조운동 내부의 어용성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현재의 기업별 노조체계 하에서도 민주주의 원칙이 충실하게 관철되지 못하고 현장활동이 부실한 현실이고 보면, 완전한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노조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아래 우리나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집중적 구조를 창출해야만 올바른 모습이 된다.

노동자들의 잇달은 죽음으로 폭로된 자본의 잔악성과 유력 노조집행부의 무사안일이 우선 질타되어야 하지만, 한편 합당한 제도개선 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노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는 우파 정치권력에 맞서 싸우는 일은 산별노조 건설의 경로이기도 하다. 노동자 민중을 기반으로 한 좌파노조와 정당이 있다면 이 문제 해결주체로 나서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자기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통찰해야 한다
 

Name      월급쟁이  (2005-02-09 00:07:54, Hit : 294, Vote : 6)
 
 
Subject  
   노동자의 힘이 다시 일으켜지려면...
 
 
나는 현재 대한민국 노동자의 힘이 날로 약화되는 원인중에 가장 큰것은 노동자의 분열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 분열의 원인들을 노동자들의 주체적 문제점이라고 생각하거나, 노동자들이 원래 그런 인간들이라고 떠드는 사람은 나의 글을 읽지 말기 바란다. 현재의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분열은 노동자들을 둘러싼 객관적 구조에서 나오기 있기때문인 것이다. 적어도 좌파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체적 사고를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처지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칼 맑스의 주장에도 합당하다라는 것이다. 이는 강북아이들이 서울대에 강남아이들 보다 적게 합격하는 이유가 강북아이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주체적 시각의 분석이 아니라, 강북아이들의 부모가 강남아이들 부모보다 못살고 있다는 객관적 구조때문인것과 똑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럼 현재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처지를 규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조가 산업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인 심상정씨가 얼마전 인터뷰에서 지나온 노동운동중에 가장 후회스런점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80년대 부터 본격화해온 노동운동 조직을 산업별 노조로 조직하지 않고 기업별 노조로 조직해왔던 점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나는 심상정의원에게 가장 신뢰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이유는 그가 섹시한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민노당내 종파적 권력그물망에서 가장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튼 산업별 노조가 왜 기업별 노조보다 중요하냐면, 산업별 노조의 형태는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해당 산업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종류의 노동자들을 규합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기업별 노조는  말그대로 현대면 현대, 엘지면 엘지식으로 해당 기업에 정규직 노동자로 고용이 되지 않으면 노조에 가입조차 불가능하게 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건설산업에 가장 비정규직이 다반사인 경우인데, 현대건설노조대신에 건설산업노조가 결성이 된다면, 건설에 관련되어 자기몸팔아(두되노동도 포함) 밥먹고 사는 모든 종류의 노동자들(풀타임이건 파트타임이건...)이 노조원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것이다.

이번 민주노총 폭력사태도, 사실 기업별 노조연합의 지지로 좌지우지 되는 민주노총의 권력형태에서 유발됬다고 봐야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업별노조라는 것은 달리말하면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이며,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노동조직이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인 상황이니, 당근 전체노동자들 머리수의 30%만인 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자본가와 그 따가리들인 정치꾼들과 협상을 하겠다는 노-사-정 대화에 나서려고 하는 시도에 전체 노동자 머리수의 대다수인 70% 비정규직을 의식하는 노사정 반대파들의 격렬한 반대를 발생킬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폭력 운운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나이브한 인간들인지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노동자들이 분열하는 이유가 노동자들 분열을 좋아해서 하는게 아니라, 대표성이 없는 현재의 민주노총이 허울좋은 현재의 권력구조(30%정규직 기업별 노조의 지지만을 받고있는 구조)를 이용하여 노-사-정 대화에 나서려 하는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분열양산 상황을 가지고 있다는데서 분열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럼 대책은?

현재의 정규직 노동자만을 대표할 수 있는 기업별 노조를 지금이라도 산업별(소위 산별 노조)노조형태로 바꾸어 나가야 하며, 산별노조가 정상궤도에 올랐을때, 비로소 해당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가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씨가 노동귀족 운운하는 것도, 바로 현재의 민주노총을 떠받치고 있는 기업별노조의 근본적인 단점을 잘알고 있기에 떠들어 되는 것이다. 결국 나쁜넘이 몇년간 자신의 정치적 기반닦기 위해서 노동운동 도와주는척 하다가, 노조운동의 단점인 기업별 노조의 속성을 간파하고, 현재 자본가와 짝짱궁이 되어 활동하는 자본가만을 위한 대통령질 하면서 노동자등에 갈꽂는 주장이 바로 "노동귀족"운운이라는 점이다.

노동자입장에서는 정말 더럽게 걸려도 아주 더럽게 걸린 경우가 현재의 노무현의 정권 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나라당 보다 열린우리당을 월급쟁이들에게 더 치명적인 정권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여튼 현재의 대한민국 노조운동의 지향점은 늦었더라도, 산별노조형태의 구조변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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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 특검 수용/ 딴나라당 삽질

오늘 노통이 특검 수용 검토하라고 했다. 이광재 비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좌우간 측근 상관없이 나가려나 보다...

 

딴나라당은 또 삽질한 셈이다. 지난 대선자금 측근비리 특검이 생각난다.

단지 김참치등의 의혹으로만 시작해 26억원의 예산 투입해서 98곳 압수 수색 및 645개 계좌 추적해서 찾아 낸 것은 최도술 4억원이 전부이다. 전형적인 혈세 낭비이다. 다시 받아낼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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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매일 블로그에 올린다.

머리 속 생각 좀 정리 좀 하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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