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4

권영길 “민노당- 중원, 우리당-영천 이기면 국회 변한다”

다른거 다 때려치우고 권의원 말씀대로만 돼도 대한민국 업그레이드인데...

이번에는 반드시 제 가치대로 표받아야 할 것이며 향후 정당명부 비례대표 비율 50:50으로 늘려야 할 것

 

 

 

 

권영길 “민노당- 중원, 우리당-영천 이기면 국회 변한다”
“민노당 수도권 진출-우리당 지역주의 타파로 지각변동 가능”
2005-04-28 22:15 김달중 (daru76@dailyseop.com)기자
97년에 이어 2002년 대선에 출마했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안위삼아 쓰린 속을 몇 잔의 소주로 달랬다면서 경기도 성남 중원지역에 출마한 정형주 후보가 같은 전처를 밟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4·30 재보선 돌입과 함께 매일 오전 7시 출근길에서 정형주 후보 유세를 지원했던 권 의원은 28일 “정형주를 당선시켜 권영길에게 졌던 마음의 빚을 털어달라”고 당부했다.

권 의원은 “97년에 이어 진행된 2002년 대선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권 의원은 “누가 노동자 서민에게 아픔을 주는지 유권자가 잘 판단하실 것이라는 생각했고 비록 당선은 아니라도 우리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며 “그러나 권영길에게 표를 주면 이회창씨가 당선된다며 사표론이 제기되었고 민주노동당을 괴롭혔다”고 밝혔다.

‘꼭 찍어야 하는데, 이번만은 밀어주려고 했는데, 다음에는 정말 다음에는...’

권 의원은 이같은 유권자들의 지지철회가 이어지자 “나를 비롯해 모두가 할 말을 읽었다”면서 “반개혁적인 이회창 씨의 당선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안위 삼아 쓰린 속을 몇 잔의 소주로 달래며 또 다시 미래를 기약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이후 이어진 2004년 4·15 총선. 그러나 탄핵이라는 바람은 ‘수구세력청산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을 몰아주어야 한다며 또다시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을 어렵게 했다고 권 의원은 주장했다.

때문에 당시 박빙의 승부처인 성남중원도 탄핵의 열풍에 여지없이 승리의 기대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4·30 재보선에 대해 권 의원은 민주노동당이 성남에 승리를 거둬 첫발을 디디고, 경북 영천에서는 한나라당이 패배해 열린우리당 후보가 당선이 될 경우 17대 국회에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권 의원은 이어 “수도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국회 내 영향력이 한 증 강화될 것이며 한나라당의 아성이 무너진 영천을 시작으로 지역주의가 무너져 그 파급력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 의원은 “비록 두 번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상황에 막혀 꿈을 접어야 했지만 이번만큼은 여러분께서 대의를 선택해 주기 바란다”며 “두 번의 대선동안 나를 지지하지 못해 부채의식을 가지셨다면 이제는 정형주를 당선시켜 마음의 빚을 털어 달라”고 당부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김달중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노사정, 독일에서 이것만은 제대로 배우자

독일 노사정협의회에 관한 좋은 글! 별도의 개인적 학습이 요구됨. 진보누리에서 퍼옴 www.jinbonuri.com

 

 

 

 

한국노사정, 독일에서 이것만은 제대로 배우자
조회수 70
한국의 노사정, 독일에서 이것만은 제대로 배우자
사용자는 사회적 책임, 노동자는 연대, 정부는 교섭 여건 마련
 
매일노동뉴스 4월 16일자 기사
 
 
 
▲ 이상호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대통령의 순방을 계기로 독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주요일간지 기사들이 ‘위축되고 있는 독일노조’와 ‘잘 나가는 한국기업’에 대한 내용들을 뚜렷하게 대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독일경제의 어려움에 상당부분이 독일노조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소위 ‘강성노조’가 투쟁기조를 자제해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기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저가경쟁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한국기업들이 독일기업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노조가 노동자의 연대성 강화를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독일 사민당 정부에 의해서 추진된 ‘고용을 위한 동맹’이라는 노사정협의체가 왜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동조합운동의 위기’,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는 현재 국면에서 바라볼 때, 독일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세 가지 사례소개를 통해 독일의 경험이 현 시기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노사정 관계에 어떤 함의를 주는지 유추해보고자 한다.

아우토비젼 프로젝트 :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배우자

지역사회의 중심기업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책임(CSR)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독일 중북부에 위치한 볼프스부르크시(Stadt Wolfsburg)에서 폭스바겐사가 지방정부와 함께 97년부터 추진한 ‘아우토비젼(AutoVision)’ 프로젝트다.

지역산업의 구조개혁과 재생을 목표로 한 이 프로젝트는 부품기업의 입지기반 확충을 위한 ‘부품단지조성’, 자동차관련 중소기업의 창업지원을 위한 ‘혁신캠퍼스사업’, 주거환경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기능문화시설’, 지역 내 실업자의 취업알선을 위한 ‘인력지원기구’ 등의 핵심사업을 추진했다. 그 성과는 97년 17.2%에 이르던 실업률이 2003년 8.4%로 줄어들고, 이 기간 동안 약 150개 이상의 부품기업들 외에, 100개 이상의 산업서비스 관련기업들이 창업한 것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이 프로젝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볼프스부르크 지역산업 및 경제의 중추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폭스바겐이 경영악화와 경기불황이라는 악조건 하에서도 지역사회의 다른 중소기업, 영세사업장 노동자, 그리고 지역주민을 위해서 자신의 재원을 출연하는 한편, 지역실업자들의 직업교육 및 재훈련을 위해서 자신의 시설을 이용하도록 배려했다. 즉 아우토비젼 프로젝트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지역사회의 발전과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중심기업이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공헌하고 지역주민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낼 때 자신의 질적 경쟁력이 실질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아우토비젼의 성공에 의해 볼프스부르크시의 산업입지역량이 강화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창업활동 또한 활성화됐다.

이러한 긍정적인 선순환과정을 통해 실업축소와 고용창출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폭스바겐사의 기업경쟁력도 향상된 것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러한 사례는 아직도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윤리경영’이나 ‘사회공헌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그 광고효과만을 계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독일대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기업이미지 개선이라는 단기적 이익에 매몰되지 말고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 연관업체들과의 공존과 협력,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폭스바겐 5000 X 5000 모델 : 노동자의 연대성을 배우자

한편 독일노동조합이 지역사회의 현안인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대응한 사례가 존재한다. 지난 2001년 8월 28일 폭스바겐 노사는 새로운 차종인 미니밴 ‘투란’을 제조하는 공장에 적용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한다.

‘5000 X 5000 모델’이라고 불리는 이 협약은 이 공장에서 일할 사람 5천명을 지역 내 실업자 중에서 채용하고, 이들의 총 월급수준을 5천마르크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들이 생산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기간의 직업교육(6개월)을 폭스바겐 노사공동위원회 주관 하에 진행하는 한편, 그 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월급총액을 상승시킨다는 것을 합의했다.

필자가 이 모델에 주목하는 것은 폭스바겐이 채산성 문제로 인해 동유럽에 미니밴공장을 세우려 할 때, 노조가 적극 나서 국내유치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신공장에 반장급 이하의 전 직원을 기존 실직자들 중에서 선발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동유럽의 임금수준을 고려할 때, 비용경쟁력 측면에서 국내공장의 신설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때 노조는 인건비위주의 비용산정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미숙련실직자의 신규채용을 위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단협체계를 일정하게 양보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가 현직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피해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의 유연화협상이 종업원평의회의 동의 하에서 추진된다는 노사교섭의 기본원칙이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평균 28.8시간으로 협약화된 주간노동시간을 42시간으로 연장하고 이들 신규채용자의 고용관계를 비정규직으로 할 것을 주장한 사용자의 요구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독일노동조합은 지금까지 정부의 책임으로만 치부해 왔던 실업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의 ‘내부자’라는 사회여론의 비판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외부자’로서 실직상태에 있는 동료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연 ‘아우토 5000 모델’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한편 3년이 지난 지금 이 모델이 성공적이라는 독일 언론과 노사의 평가를 접하면서 한국 대기업 노동조합운동을 되돌아본다. 비정규직의 축소와 해결을 위해서는 분명 사회적 차원의 법제도적 개선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현 정부가 비정규직 양산법을 이 시점에도 추진하고 있고 조직노동자들조차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남는 아쉬움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노동자의 연대성 강화라는 노조운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대기업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에 있다. 대자본, 대정부와의 교섭과 투쟁도 중요하지만, 동료노동자인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실리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 조직노동자들의 혁신을 위한 민주노동운동진영의 내부투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고용을 위한 동맹 : 정부는 사회적 교섭의 여건을 조성하라

지난 98년 12월 7일 독일의 노사정대표자들은 ‘일자리, 직업훈련 및 경쟁력을 위한 연대’라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한다. 16년간의 보수당 집권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독일 적녹연정의 슈뢰더 총리는 고실업과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길을 노사정의 공동노력에 기초한 일자리창출, 직업훈련체계의 고도화, 산업경쟁력의 질적 향상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청년예비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직훈생들의 일자리 확대, 단체교섭의 분권화, 해고규정의 완화 등과 관련된 노사정간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다 마침내 2003년 3월14일 고용을 위한 동맹은 결렬된다.

약 4년4개월간 지속된 고용을 위한 동맹의 경험은 사회적 정책협의제도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에 저숙련 노동자 및 장기실업자의 직업재교육과 고용기회 확대방안, 고용촉진을 위한 소득정책과 조세정책, 혁신적인 노동시간정책 등과 같은 내용에 대해 노사정이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보였음에도, 결국 노사정협의체가 깨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독일정부다.

독일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용자의 책임사항으로 노사정간에 합의된 직훈생 일자리의 확대를 사용자단체가 계속적으로 회피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슈뢰더 정부는 합의를 법제도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

주요 경력
95년 9월 독일로 유학. 경제학 전공
2002년 독일노총(DGB) 박사논문지원 장학생.
현재 '수직적 노동분업과 노동조합의 정책'이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음.
저서 ‘독일공동결정제도의 사회경제적 효과’(석사학위논문, 1995), ‘독일노동운동의 자기정체성 모색과 현실적 딜레마’(한국노동연구원, 2005년 5월 출간 예정) 등
연구성과  ‘독일노동시장의 변화와 노동조합의 고용정책’
반면, 당시에 노사정간에 합의되지 않고 있던 해고규정의 완화조치, 사회부조와 실업부조의 통합안을 정부가 ‘노동시장의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독자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노동조합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무책임한 친자본적인 정부의 태도는 결국 사회적 교섭에 대한 노동조합의 기대와 신뢰를 상실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대화의 자리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었다.

즉 노사정협의체의 기본원칙을 스스로 부정한 독일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사회보장의 축소, 법인세의 감축과 같은 친사용자적 요구들은 수용한 반면, 청년실업해소의 관건이 되는 직훈생의 일자리, 중소기업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조정하는 해고규정의 완화 등을 밀어붙임으로써 노조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실패 경험은 현재 재가동 상태에 있는 노사정대표자회의라는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정부가 최소한 지켜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왕에 성사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단순한 대화의 자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는 이를 사회적 교섭기구로 발전시키기 위한 여건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산업별 교섭구조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적 정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 또한 독일정부의 실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동운동진영이 반대하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법안,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 옆구리를 쑤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역사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노사정관계의 보편적 발전경향이 존재한다고 하면, 현 시기 대기업의 사용자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에 옮겨야 하고 조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동료들과의 연대를 위한 조직체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사의 노력을 법제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엄호하는 정부의 발상전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상호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기사입력시간 : 2005년 04월23일 [03:56] ⓒ 진보누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구라의혹세무민] 일본 민주화 위해 간첩을 파견하자!

썩 적절한 글!

일본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없다. 여적찌기 자민당 치하이다. 코리아는 민자당을 극복 중이다.

밥먹는 것만 알지 철학이 없는 돼지들! 그러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본은 소비왕국 경제대국이지 결코 선진국이 아니다.

 

 

 

일본 민주화 위해 간첩을 파견하자!
일본의 우익기조를 흔들 간첩 육성이 시급하다
2005-04-28 17:44 김구라 방송인 
KBS라디오에서 발언했던 ‘엽기 독도 해법’이 <헤럴드경제>에 소개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낳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말한 내용은 이렇다. 강원도 강릉과 경상북도 울진, 그리고 경상북도 울릉군 소속 독도를 3각으로 엮어서 간척을 하자는 제안이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 한반도의 지도가 볼록 돌출된 ‘봉’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는 발기한 생식기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한 것이 문제가 돼 KBS 자체 심의의 도마 위에 올랐다. 사실 지상파에서 ‘발기’라는 말조차도 품위가 없다고 지적을 받고 있는 형국이니 이 말 역시 그냥 넘어갈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이라서 더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 “자, 발기된 토끼의 ‘X'밑에 있는 일본은 그럼 뭘까요? 뿌려진 뭐 모양 아닌가요?”라는 부분이었다. 물론 전체 일본 국민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X물’같은 일부 잡것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들은 일본의 나라밖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일본은 왜 이럴까? 구체적으로 말해, 왜 지구상에서 종적도 찾기 힘든 극우 꼴통들이 일본 사회에서만 안방마님처럼 행세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3.1, 4.19, 5.18, 6.10, 그리고 탄핵 반대 집회 같은 민주혁명의 역사를 저들은 갖지 못하고 있다.

사실 지금의 일본의 정치 체제도 맥아더 장군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것이 아니던가. 허수아비 왕정에, 친미 전범 세력들로 가득한 내각을 보라. 우리 국가 체제가 미국에 종속됐다고 개탄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일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처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다. 그렇다고 이 자들이 미국을 절대선으로 생각하느냐면 그렇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미국에게 굽실대는 척 하면서도, 진주만 폭격의 짜릿한 추억을 언제든 재연하겠다는 통빡을 여전히 굴리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음지에서 흘러서 양지를 향해 솟구치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미개한 왜구들에게 선진문물을 전수하신 왕인 박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 사명감으로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이 시대 최고의 애국 민주 인사들을 파견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우익들만 판치는 일본이 민주화가 된다면 좌파든 우파든 다양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올 것이고, 꼴통들의 헛소리는 자연스럽게 한 구석탱이로 소외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 사회는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또 망언의 수위도 횟수도, 잦아들고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이렇게 되면 우리가 피곤하지 않다.

그렇다. 동북아시아 평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서 친일매국노 취급받는 사람들을 일거에 소환해 '전향서'를 받고, 이들을 일파간첩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일본으로 암약시켜 그 사회의 우익적 근간을 뿌리채 흔드는 것이다.

행동하는 우익, 애국세력의 정신적 지주 조XX 선생을 파견해, ‘일본왕궁 앞으로 탱크를 몰고 가 박살내자’라는 격문을 써서 선동케 한다.

그 다음 청년 애국 세력의 상징 신XX 군을 내세워, <돈립신문 일본판>을 창간하도록 도와준다. ‘한 번만 더 원수 같은 일본 제국주의적 망발을 퍼부을 경우 네 머리를 아작 내겠다’며 고이즈미를 상대로 한 스나이퍼 패러디를 만들도록 부추긴다. 넷심을 잡는 사전 포석이라 하겠다.

그 다음 다른 애국인사 지XX 선생도 파견해 ‘히로히토는 빈 라덴과 같은 존재이다’, ‘히로시마 피해자들은 야부리를 까고 있다. 생긴 것 봐라. 얼마나 건강한가.’ 이런 폭탄발언을 남기도록 하는 것이다.

학자들도 ‘성전(聖戰)’에 동참해야 한다. 한XX 교수님을 보내 ‘우리에게 원폭은 축복이었다’라는 논문을 발표케 하고, 이영훈 교수님을 통해서도 ‘일본 교과서는 신화적 요소가 많으며 따라서 과장이 많다’라는 말을 쏟아내도록 만든다.

연예인들이라고 숨어 지낼 수 없다. 요즘 KBS MC사퇴로 일본 네티즌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조XX 선생이 ‘국민의 힘으로 민주헌정질서를 만들어 낸 한국이 일본의 한 수 위’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엮어준다. 그리고 <산케이신문> 구로다 기자와 함께 독립기념관을 참배토록 주선한다. 송XX 씨도 이제 음지에서 나와야 한다. <왜놈들 왜 이래?>라는 노래도 발표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이즈미 부인을 가리켜 ‘씨발년’이라고 한 마디 함으로써 양심적 세력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야 한다.

또한 깃발 태우기의 일가견이 있으신 박XX 목사님으로 하여금 반일반고(반 일본 반 고이즈미)국민연대를 조직해, 일본 도쿄에 있는 대형 광장에 모여 일장기를 불태우고, 급조한 고이즈미 동상도 소각하고, ‘이순신 장군 만세!’를 외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뭔가 몸 풀지 않고서는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분’들에게 일감을 주는 것은 물론, 성취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수구꼴통’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될 거싱다.

일본은 우리의 손길이 필요하다. 밥 먹는 것만 알지 철학이 없는 돼지들. 이 돼지들에게 약을 줘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왕인 박사의 후예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해야할 일이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패러디 컬럼은 문자 그대로 패러디로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김구라 방송인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권(전)대표님, 감축드립니다.

진짜 왜 그런 방향으로 생각 몬했을까? 이해찬 이 양반은 역시... 와...

 

 

 

권영길, 의원직 유지 ‘파란불’


사문화된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기소돼 10년 넘게 재판을 받아온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관련법 개정으로 혐의를벗고 의원직 상실 위기를 모면할 가능성이 높아져 눈길을 끌고 있다.

제3자 개입금지는 지난 1997년 이미 없어진 조항이지만 과거 위반 행위까지 소급적용하는 부칙이 관련법에 남아있어 권 의원을 옭아매왔던 것. 이에 민노당 단병호 의원은 이 같은 부칙을 폐지하는 내용의 `노동조합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제출했고, 국회 환경노동위는 26일 전체회의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이번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무리없이 처리될 전망이어서 권 의원은 재판에서 실형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으며, 따라서 의원직을 유지하게 될전망이다.

집시법 위반 등 혐의가 남아있긴 하나 법원이 이 정도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하기는 무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권 의원 측은 27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독소 조항이 폐지돼 재판에 좋은 영향이 있을 것 같다"면서도 "이번 개정안은 악법에 의해 피해를 본 모든 분들에게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단 의원이 이 같은 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찬 국무총리의 조언 덕분이었다는 후문이다.

이 총리는 지난 2월초 민노당 의원들을 총리 공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권 의원의 재판 상황이 화제에 오르자 단 의원에게 "부칙을 폐지하는 개정안을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총리는 과거 13대 국회 때 노무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만큼 과거 경험을 십분 활용해 결정적인 힌트를 준 셈이다.

이에 단 의원 등 민노당 관계자들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며 이 총리의아이디어에 감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영훈 “국사교과서 일제 수탈 과장&quot;, 퍽크유다

이제 더이상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둥 아니라는 둥 이따위 소모적인 논쟁 그만하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즉답을 회피하자는게 아니라...

 

예를 들어 조선 철도... 세계 3대 철도에 들어갈 만큼 잘 만들었단다. 지금도 보수 안하고 계속 쓰는 정도다.

 

결론은...

이 철도는 일본 대자본과 그에 종속된 소수 조선 자본을 위해 일본 자본주의 국가가 그냥 만든 것이다. 제국주의는 오로지 자본 재생산을 위한 최후의 발현 형태이며 그에 기대어 조선 자본도 궁물 좀 받아먹은거 있을꺼다.

 

반면 피착취 수탈자는 조선 민중 외에 일본 민중도 포함된다. UN산하 국제노동기구ILO의 설립는 2차대전 당시 일본내 장시간 저임금 문제의 대두로부터 비롯되었단다. 즉 침략하는 입장에서도 그 내부적으로는 자본주의 계급에 따라 처지가 나뉜다. 유린당하고 동원당하는 쪽 또한 마찬가지다.

 

아래 영훈이 같은 인간은 오로지 통계 숫자만 뚜드리고 있을테니 질적인 차이에 대해 모를 것이다. 고로... 영훈이 들어가! 나오지마!

 

 

 

 

이영훈 “국사교과서 일제 수탈 과장, 신화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한 국내 학자가 거꾸로 우리 국사 교과서가 일제의 수탈상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경제사학자이자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23일 웹진 ‘뉴라이트’(www.new-right.com)에 기고한 글 ‘북한 외교관과 남한의 교과서가 빠져 있는 허수의 덫’을 통해 “일제시대 경제적 수탈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우리 교과서의 서술도 ‘사실’이 아닌 ‘신화’”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최근 북한 유엔대표부 김영호 서기관이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의 수가 20만명, 강제 연행된 인구가 8백40만명이라고 말한 사실과 남한의 고등학교 교과서가 위안부의 수를 ‘수십만’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을 6백50만명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 숫자들에 찬성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강제 연행자의 숫자에 대해 “194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20~40세의 조선인 남자의 총수는 3백21만명이었는데 그 나이의 남자들을 모조리 다 끌고가도 반을 채울 수 없는 숫자가 교과서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며 “당시 16~21세의 조선 여자는 1백25만명으로 그 중 ‘수십만’이 위안부로 동원됐다는 교과서 기술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징용·징병으로 강제 동원된 남자가 ‘6백50만명’ 혹은 ‘8백40만명’이었다는 것에 대해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김동은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독립쉰문과 청와대는 들으라

패러디 왕국의 적절한 지적! 사실 지난 번 딴나라 전재희 우원 누드 패러디는 엄청난 모독과 명예훼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딴나라에 대한 모욕이 아니었다. '낙원 상실'이라는 르네상스 명화 원판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었다. 진주 목거리를 돼지 목에 거는 것도 죄이다. 그 패러디를 보고 꼴린다면 정말 대단한 짐승들이다.

 

 

 

[성명] 독립쉰문과 청와대는 들으라

2005.4.25. 월요일
딴지 편집국

 

패러디가 뭔지 그 개념조차 생소하던 암울한 20세기말.. 혜성처럼 출현해 국내 패러디계의 배아줄기세포가 되어 버린 본지.. 청와대의 독립쉰문 수사의뢰에 즈음하여 원로로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먼저 독립쉰문에게.

독립쉰문, 얘야, 그게 뭐니. 자고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 니가 딱 그짝이다. 얘야, 패러디가 뭐라 생각하니. 패러디라는 게 성립되려면 말이다, 몇 가지 기본 전제가 충족돼야 해요. 우선 오리지널이 존재해야 한단다. 모사할 원본 말이다. 그것도 해당 패러디를 접할 구경꾼들 대다수가 그 주요한 속성을 사전 인지하고 있을만큼 알려진 원전이 존재해야 하거든. 패러디라는 게 이미 알려진 원전의 주요한 속성 몇 가지를 빌어와 - 이미 사람들이 그 속성을 알고 있으니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 그 속성을 살짝 비틈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적,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간접화법이거든.

게다가 패러디는 본질적으로 방백이야. 상대에게 말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구경꾼들에게 말하는 거라구. 왜 직접 말하지 않고 구경꾼들에게, 그것도 돌려 말하느냐. 그게 훨씬 세련되고 재밌거든. 더구나 직접 공격하면 반발할 상대도, 그렇게 구경꾼들이 웃어 버리면, 거기다 대고 화냈다간 속 좁고 좀스런 놈 되어버리니까 뭐라 할 수 없게 되는 거지. 바로 거기에 패러디 미학의 정수가 있는 거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도 구경꾼들의 웃음으로 열 받은 상대를 주저앉혀 버린단말이지.

그래서 패러디는 애초부터 불균형한 권력역학 구조 속에서만 탄생하는 표현양식이야. 생각해 봐. 힘쎈 놈이 약한 놈 패는 데 구경꾼들 응원이 왜 필요하겠어. 그냥 줘 패면 되지. 그러니까 패러디는, 권력 없는 이들이 권력 가진 자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데 더할 나위없이 효과적인 문화적 표현양식인 게야. 패러디라는 양식은 존재 그 자체에 그렇게 정치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거라고.

자 그럼 한 번 살펴보자, 니가 뭘 잘못했는지.

우선 넌 한 가지 기본은 만족시켰어. 힘 없는 놈이 힘 쎈 놈에게 덤빈 거. 너도 비장하게 씨불였잖아. <패러디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에 대해 과감하게 할수록 정당하다>고. 맞는 말이야. 말 잘했어. 쫌 멋지기까지 해. 그런데 얘야, 그 만든 사진의 오리지널이 도대체 뭐니. 이미지의 원전을 도저히 모르겠단 말은 그 원전으로부터 빌어와 우회적으로 활용한 속성이 없다는 말이거든. 그러니까 그 원전에 애초 담겨 있는 속성을 살짝 비튼 우화적 간접화법이 아니라, 그냥 니가 하고 싶은 말 직접 씨불여 버린 직설화법이 되어버린 거란 말야. 말하자면 패러디를 하고 싶긴 했는데 그게 니 뜻과는 다르게, 되다가 만 거지.

멋들어진 소설 한 편 쓰고 싶었는데, 제대로 기본 내러티브도 못 갖춘 3류 통속 소설이 돼 버린 거라구. 그러니까, 니가 수사를 받는 건 니가 패러디를 해서가 아니라, 그게 전혀 패러디가 아니란 오해를 줘서인 게야. 당한 사람들은 대놓고 욕했다고 본 거지. 적어도 이 사태 원인의 1/3은 거기 있어.

두 번째, 패러디의 가장 큰 응원군은 박장대소하는 구경꾼이란 말야. 근데 그걸 보고 아무도 웃질 않았던 게야. 노무현을 지지하든 않든 말야. 니가 사람들을 못 웃긴 거지. 누굴 탓하겠어. 니가 안 웃긴 걸. 그게 1/3. 그래서 합이 2/3.

그러니까 지금 넌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체제 인물이나 정치적 인사가 아니라, 원하는 걸 제대로 된 양식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한 후진 예술가라구.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든 말야. 그러니까 2/3는 남탓을 할 게 아니라 니 머리를 탓해. 하지만 말야, 아무리 그래도 머리 나쁜게 죄는 아니거든. 죄는 아니라구.

바로 이 대목서부터 본지, 청와대에 할 말이 있어.

자, 여기 기본 골격도 제대로 못 갖추고 맞춤법도 틀린 데다 비문 투성이인 3류 통속 소설이 시장에 나왔어. 이 소설가 잡아갈까, 죽일까. 소설이 수준 미달이라고 말야. 당연히 아니지. 그 소설은 독자에게 외면 당하는 것으로 처벌받는 거잖아. 그게 문화의 논리 아냐. 예술적 재능이 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건 창작자에게 사형과도 같은 거니까. 창작 그만 하라는 거니까. 예술가로선 죽으라는 거니까.

그런데 말야, 왜 자꾸 패러디만 문제가 되는 거야. 왜냐. 패러디 당한 사람이 기분 나쁘거든. 그리고 그 대상들은 거의 언제나 상대를 벌할 충분한 크기의 권력을 가지고 있거든. 패러디의 양식적 특성상 애초 그렇게 권력 있는 자들만 주인공이 되니까. 물론 구체적 인물이 아니라 주류적 감성이나 지배적 질서 같은 관념적 권력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구체적인 인물, 권력 있는 자들이지.

이번엔 그 주인공이 대통령이야. 대통령더러 대가리 총맞고 싶냐고. 이 씨발. 기분 나쁘지. 그치? 그래 기분 나빠. 지지자는 뒤집어질 노릇이고 지지자가 아니어도 불편하지. 근데 말야, 패러디의 속성 자체가 원래 그래. 권력을 가진 상대가 기분 나쁘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상대가 기분 나쁘면 나쁠 수록 1차 목적은 달성한 거라고.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고 말하고 싶지? 맞아.

왜냐. 양식을 제대로 못 갖춰서 세련미도 없고 우회적 조롱이나 골계미도 없어서. 그래서 그저 듣는 사람 기분 나쁘고 구경하는 사람 불편한 직접적 시비가 되고 만거야. 수준미달의 패러디지. 그러니까 실패한 패러디야. 원전의 속성을 빌어오는 데도 실패했고 구경꾼들을 박장대소하게 하는 데도 실패했으니까.

하지만 말야, 패러디라는 문화적 표현 양식은 왜 유독 법이 그 실패를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실패한 소설이 독자의 외면으로 심판 받는 것처럼, 실패한 패러디도 구경꾼의 외면으로 심판받아야 하는 거라구. 성공한 패러디가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으며 엄청난 파급력과 메시지 전달력을 가지는 반면, 실패한 패러디는 이게 뭐야.. 하는 반응으로 오히려 스스로 조롱거리가 되는 걸로 대가를 치르는 거라구. 그게 패러디라는 양식에 걸맞는 처벌이라구.

법원으로 들고 가서 어떤 표현까지는 괜챦고 어떤 표현부턴 봐줄 수 없다고 선을 그으려거든, 아예 패러디라는 장르 자체를 인정하지 마. 그게 솔직한 거야.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화 나는 거, 니들이 참아. 문화라는 게 원래 그렇게 자의적인 기준밖에 없는 거야. 좋은 작품, 나쁜 작품. 다 자의적이야.

이 장르 자체를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 제대로 인정하려거든, 그럼 심판은 구경꾼들에게 맡겨. 소설하고 다르다고 생각하지마. 문화적 의미, 똑같아. 실패한 패러디도 법이 처벌할 일은 아니라구. 절대.

해서 패러디의 단군, 본지는 이번 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야. 독립쉰문의 되다 만 패러디의 내용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치적 의사표현의 하나로서 풍성한 문화적 표현 양식의 하나로서, 패러디 자체를 위해 수사를 반대해. 패러디라는 형식 그 자체와 그걸 즐기고 만들 권리는, 대통령 혹은 그 측근들의 기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구. 본지는 그렇게 생각해.

마지막으로 독립쉰문, 넌 앞으로 패러디 하려거든 엉아들한테 물어보고 해. 이렇게 하면 패러디 맞냐고. 머리가 나쁘면 지가 머리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살아야 남들한테 큰 피해는 안 준다구. 엉아들이 너땜에 동종 업계에 있는 게 제발 쪽팔리진 않게 해줘. 이상이야.

 

딴지편집국(chongsu@ddanzi.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우영 화백 타계

쫌 늦게 전하는 것이지만 고우영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불과 6개월 전만해도 딴지일보와 복원 작업에 엄청 의욕적이었는데 투병 중이었다.

 

선생님의 삼국지 director's redux version은 나도 소장하고 있다. 틈나는대로 나머지 다 봐야겠다.

 

 

 

 

[부음] 고우영 화백 타계

2005.4.26. 화요일
딴지 편집국


4월 25일, 만화가 고우영 화백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우리 문화계는 거인을 잃었습니다. 본지는 지난 2001년, 고인의 작품 <삼국지> 연재를 시작으로 금번 <일지매>에 이르기까지 5년 여 동안 고인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고인께서 본지에 베풀어주신 호의와 애정을 환기하며 깊은 슬픔을 통감합니다.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독창적 작품세계를 구축해오신 고인을 기리고자 본지는 특별추모기사를 준비 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딴지스 일동

 

<고(故) 고우영 화백의 인터뷰 중에서>

 

[문화] 三 國 志 (1)

[문화] 三 國 志 (2)

[문화] 三 國 志 (3)

[감사] '고우영 무삭제 삼국지' 연재를 마치며

[낭보] 무삭제 '고우영 삼국지' 책으로 출간!

[특보] '고우영 무삭제 삼국지' 발매!!

[경축] '고우영 무삭제 삼국지' 2판본 판매개시!!

[만화] 고우영 '복원 일지매'에 대한 보고

 

   딴지 편집국(editors@ddanzi.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헨리 조지 이야기

노통이 투기 때려잡겠다는 얘기가 오마이뉴스에 떴다. 헨리 조지스트 어쩌구 저쩌구 운운하는데 전문가들 견해는 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실제 액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란다. 일단 아래 전에 올라왔던 기사를 붙인다.

 

 

 

 

토지지대세로 빈부격차 해소
  김병구(banabas) 기자
누구를 위한 경제개발,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에 경제개발, 정치민주화, 그리고 월드컵 4강을 이루어냈다.

그런데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97년 현재 상위 10% 계층 소득의 1/7에 달하던 하위 10% 계층 소득이 2001년에는 1/9로 줄어들어 소득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한길리서치의 최근의 조시에 따르면 자신은 '중하 층'에 속한다는 응답이 57.7%로 가장 많았고 중상층 21.6%, 하층 19.5%, 상층 0.7% 순으로 조사됐다. 소득계층 상위 10%가 하위 10% 보다 8배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현실에 비추어 우리나라 노동자·도시서민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통계들은 우리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했으나 그 발전과 성장의 열매가 편파적으로 분배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경제개발의 과정에서 빵을 키울 때까지는 분배의 문제를 접어두자고 했다. 지금도 분배의 문제는 뒷전에 제껴두어야 하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국민의 60% 이상이 자신을 중하층이라고 생각하며 또 모든 통계가 그것을 증명한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란 말인가?

빈부격차의 원흉은 기득권층의 토지 독과점

실제로 한국의 경제개발 전략은 빈부 격차의 심화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것은 금융정책, 조세정책, 대외거래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부격차의 가장 근본적인 원흉은 토지정책과 토지에 대한 조세정책이다.

급속한 산업화는 사회간접자본의 건설과 소득 증가를 통하여 한정된 토지에 대한 막대한 초과수요를 유발하는 가운데 대기업을 위시한 가진 자들이 소위 땅빼앗기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불로소득의 원천을 획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은 소극적인 종합토지세나 양도소득세 정도로 지주들의 토지 독과점을 눈감아주어 왔다. 아니 정책 입안자, 법률제정자들이 모두 땅빼앗기 전쟁의 승리자들이었음에 생각이 미친다면 생선을 고양이게 지키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종합토지세 자료를 사용한 현진권(1996)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유지의 지가 기준 소유률은 극심한 토지 독과점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소유 토지는 상위 20%가 전체 개인소유토지의 79%를, 법인소유 토지는 상위 10%가 92%의 법인소유토지를 독과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지소유 편중도

개인소유 토지 법인소유 토지
상위 1% 27.9% 68.4%
상위 5% 50.6% 85.9%
상위 10% 63.4% 92.1%
상위 20% 78.6% 96.5%


가장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가 이와 같이 기득권층에 의하여 독과점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이용의 대가인 지대를 불로소득하는 가진 자들의 소득은 세월이 갈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으며, 일반 국민들의 소득과의 격차는 확대되어 갈 수밖에 없다.

빈부격차 심화의 고리를 끊어줄 토지지대세

이제 와서 무엇을 탓하고 누구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고민은 과연 어떻게 빈부격차의 심화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가에 있다. 그것이 곧 다수의 서민들이 일한 만큼 잘 살 수 있고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경제 민주화의 길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가 없는 정치적 자유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며, 경제의 민주화가 진척되어갈 때에만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자원을 포함하여 토지는 원래 물과 공기처럼 조물주가 인간 모두가 평등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어떤 인간도 토지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도 않았고 기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장과 사유재산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토지를 국유화하든지, 토지개혁을 통하여 토지를 다시 골고루 나눠주지 않으면서도 국민 모두가 조물주가 주신 토지로부터 평등한 혜택을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미국의 경제학자요 사상가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 – 1897)가 그의 저서 발전과 빈곤(Progress and Property, 1879)에서 주장한 토지가치세야 말로 바로 국민 모두가 조물주가 주신 토지로부터 평등한 혜택을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원래 지대는 인구증가, 산업발달,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으로 토지의 가치가 증가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와 같이 사회가 공동으로 생산한 토지가치= 지대=토지사용료를 국가에서 수입하여 도로, 상수도 등의 사회를 유지하는 물리적 비용과, 공무원 월급 등 인건비 등등 사회유지비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임금 및 자본수익의 감소나 생산에 어려움을 가져오지 않는 한, 모든 지대를 국가가 수입하게 될 정도로 토지가치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근로소득세를 포함하여 국부의 생산에 대한 모든 세금을 감면할 수 있다면 모든 국민이 토지의 면적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나 토지의 가치를 공유하게 되어, 자연에 대한 천부의 권한을 평등하게 누리게 되며 불로소득이 근절되고,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경제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꽃피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지대의 규모는?

과세 대상 토지의 지가를 추정하여 한국감정평가협회가 정한 토지보상평가지침에 따라 적산법에 의한 적산임료를 적용하여 경북대학 김윤상 교수가 추정한 1999년 기준 우리나라의 지대는 약 84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1999년도 지가 상승률 2.95%, 2000년도 지가 상승률 0.67% 그리고 2001년도 지가 상승률 1.32%를 감안하면 2001년 기준 우리나라 지대 총액은 약 88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2000년도 예산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세수입은 국세가 92조9천억원, 지방세가 20조 6천억원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 소득세가 18조원, 법인세가 18조원, 그리고 부가가치세가 23조원에 달한다.

선택적인 토지지대세 운용

임금 및 자본수익의 감소나 생산에 어려움을 가져오지 않는 한, 모든 지대를 국가가 수입하게 될 정도로 토지가치에 100%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토지의 가치를 조세를 통하여 온 국민에게 고르게 분배한다는 것이 지대조세제의 창시자인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이다.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지대수입의 100%를 조세로 국가에 돌려주게 된다면 지대수입 이외의 편의 즉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안정적이고 독점적인 사용권 등이 가져다 주는 편리 등을 제외하고는 토지 소유로부터 금전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론상 지가는 거의 0에 가까워질 정도로 폭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대 세율 100%를 동시에 누구에나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예컨대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저축 수단으로서 토지를 매입하여 오랜 시일이 경과하지 않은 사람이나 기업 등은 토지가격 폭락으로 인한 부당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지대수입으로 투자원금이 회수되는 기간 까지는 지대세를 면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가가 폭락하는 경우 부동산의 담보가치 폭락으로 은행이 중소기업 및 가계에 대한 대출의 회수에 나서는 등 경제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토지의 독과점 상태를 고려하면 그러한 파란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법인소유 토지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10%에 속하는 법인들의 경우에는 토지 이외의 채권이나 주식을 담보로 대체하며 나머지를 신용대출로 전환하더라도 은행의 채권확보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개인 소유 토지의 60%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10%의 개인들의 경우에도 은행의 채권확보에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상되는 파란에 대처하면서 토지지대세를 지혜를 총동원하여 선택적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토지지대세제 실시는 토지가격의 폭락을 초래할 것인데 이것이야 말로 빈부격차심화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토지가격의 폭락은 근로자들의 최대 고민인 주택문제의 해결을 훨씬 수월하게 해줄 것임은 상상만 해도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경제 강국으로의 길을 탄탄하게 다질 토지지대세

토지가격의 폭락은 한국 경제의 암적 요소인 고비용 구조에 일대 수술을 가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업의 수익성 보다 담보의 안전성을 기준으로 자금을 대출해온 금융기관의 저효율성도 크게 개선될 여건을 맞게 될 것이다.

또한 토지지대세는 토지의 최선의 사용을 촉진하게 되며, 근로자들의 생산의욕과 활동을 진작시키고, 높은 지가 때문에 엄두를 못 내었던 새로운 기업의 창출을 촉진시키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지대세의 일련의 효과는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강화 시켜 한국 경제가 경제대국으로 가는 길을 탄탄하게 해줄 것임이 틀림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떨녀가 내 얘기라고 생각 안 했다.

드디어 왕림하셨다. 떨녀... 딸녀는 어디에ㅠ.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Beatles의 정규 discgraphy

 

http://www.youtube.com/watch?v=N2LkjhnAg1E&search=beatles

[MV] Beatles - Movie medley

Watch this video with our new Video Player

"떨녀가 내 얘기라고 생각 안했다"
[단독 인터뷰] '떨녀 동영상' 주인공, 대학생 이보람씨
  이한기(hanki) 기자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 '떨녀 동영상'에 등장하는 이보람씨의 춤은 밸리댄스의 백미라고 불리워지는 온 몸을 떠는 쉬미(shimmy) 동작이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4월 중순에는 '떨녀'가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로 떠올랐다. 몸을 부르르 떨며 추는 춤 때문에 소위 '떨녀'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간 그녀의 춤 동영상은 4탄까지 소개됐다. 그녀의 춤은 밸리댄스의 백미라고 불리워지는 온 몸을 떠는 쉬미(shimmy) 동작이다.

수많은 '떨녀 기사'에 정작 떨녀 본인의 이야기는 없었다

'떨녀'가 언론에 처음 공개된 것은 지난 15일 <도깨비뉴스>가 처음으로 그녀의 동영상을 소개하면서부터다. 이후 <경향신문> <동아일보> <연합뉴스> <조선닷컴> 등에서도 '떨녀 신드롬'을 다뤘다. 화질 상태가 좋지 않은 동영상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물론 정체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 호기심 탓에 많은 언론에서 그녀에 대한 기사를 썼지만, 정작 그 기사 안에 본인의 이야기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팬카페가 생겼고, 다른 한편에서는 '연예기획사의 계획된 프로모션'이라거나 '연예인 지망생의 자가발전'이라는 루머가 떠돌았다. 급기야 27일 <조선닷컴>에서는 ''떨녀'는 코카콜라의 기획?'이라는 보도를 톱1으로 내보냈지만, 결국 이 기사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오마이뉴스>는 27일 저녁 '떨녀 동영상'의 주인공인 이보람(23)씨를 직접 만나 1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그녀의 동영상을 처음 인터넷에 올렸던 바이러스필름의 방호석(32)씨도 함께 했다.

그들은 더 이상의 추측기사와 오보가 난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보람씨와의 일문일답이다.

"나는 이보람,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쇼맨십도 없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 '떨녀'의 정체에 대해 네티즌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스스로 본인 소개를 해달라.
"이름은 이보람이고 나이는 23살이다. 현재 경희대 무용학과 3학년이다. 법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 대학로에서 춘 춤이 '떨녀 동영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대학로에서 춤을 추게 된 계기는?
"나는 (춤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쇼맨십도 없다. 동영상에 나온 건 춤이라기보다는 스포츠댄스, 밸리댄스의 쉬미 동작이다. 체계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안무를 한 것도 아니다. 지난 3월 대학로 거리 공연에서 게스트 자격으로 섰다. 이후 주말에 몇 차례 더 나갔다. 대학로 말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서 종로에선가 춤을 춘 적도 있다."

-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려면 용기와 배포가 필요할텐데.
"(대학로 거리 공연에서 정기적으로 춤을 추는) 그분들과 나는 장르가 다르다. 그분들이 멋있게 춤 추는 모습을 보고 무모한 용기, 쓸데없는 용기를 부린 것이다. 거기에는 화려한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테레오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다. 홍대 클럽에 가서 친구들과 춤을 함께 춤을 추는 것과 대학로에서 추는 것은 비슷하다. 대학로에 모인 사람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같이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아니냐."

- '떨녀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뜬 건 알고 있었나.
"동영상부터 본 건 아니고 도깨비뉴스 등을 통해 알았다.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다. (해상도가 낮아) 춤추는 게 마치 괴물 사진처럼 나왔다. '그게 기사거리가 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이보람이고, 그 사람은 떨녀 아니냐.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 문제가 되다보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한 순간의 흥미거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꿈은 연예인도 아니고 모델도 아니다"

- 광고기획사의 인위적인 프로모션이라거나, 떨녀 본인이 연예인 지망생이라는 루머가 떠돌고 있다.
"(떨녀 동영상을 찍은) 방호석씨하고는 3월 중순께 처음 인사를 나눴다. 두세번 만났을 때 방호석씨가 본인의 직업을 밝혔고, 나도 내 신분을 이야기했다. 방씨가 스쳐가는 이야기로 이것도 광고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나의 꿈은 연예인도 아니고 모델도 아니다.

경희대에 입학하기 전에 서울예전에 한 학기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방학동안 안보이던 선배들 가운데 나중에 광고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학과 아이들이 과제로 포스터 사진을 찍으러 오면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그럴 때도 나는 연예인이 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굴이 특별히 예뻐서 어디 내놓을 정도가 됐다면 어디 오디션이라도 봤겠지만… 이런 식으로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광고 모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웃어 넘겼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 오늘(27일) <조선닷컴>에는 '떨녀 동영상은 코카콜라의 기획'이라는 기사가 톱1으로 떴는데. (이후 <조선닷컴>은 여러 차례 수정기사를 내보냈다.)
"솔직히 많이 지쳤다. 내 친구들 가운데 이런 일을 모르는 애들도 있다. 그렇다고 친구들이 묻지 않았는데도 '내가 떨녀야' 이렇게 말할 수도 없지 않느냐. 부모님도 기사를 봐서 알고 있다. (부모님 심정이) 좋을 리가 없다. 부모님께 죄송했다.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아서. 팬 카페도 처음에는 좋았지만….

그런데 나는 이보람이지 떨녀가 아니지 않느냐. 사람들이 떨녀 동영상을 보고 좋아하는 거지, 이보람을 좋아한 건 아니다. 쉬미댄스를 춘 것도 내 일부분이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나는 (전문적으로) 춤을 춰왔던 사람도 아니고, 무용에 대해서 전문적인 사람도 아니다. 아직 부족한 배우는 학생일뿐이다."

- <조선닷컴>에서는 '떨녀'가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내가 피해자라면, 기획사가 없으니 가해자라면 방호석씨일텐데. 만약 내가 피해자라면 남에게서 불편을 받았거나 협박을 받아 춤을 춘 꼴이 되는데. (<조선닷컴>에서) 나를 피해자라고 추측한 게 나를 위해주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사를 추측으로 쓰면 신문이 아니지 않느냐."

- 어쨌든 이보람씨가 대학로 거리 공연에 게스트로 나오면서 대학로 거리 공연단도 언론에 적잖게 시달렸다.
"대학로 길거리 공연하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나로 인해서 대학로 거리 공연이 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그 분들과 같이 밥도 먹고 친해질 수도 있을 것이고, 하나의 동아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론에서도 대학로에서 거리 공연하는 분들을 부각시켜주시지, 내가 뭐 대단한 애라고 나를 이렇게…."
   '떨녀'에 집착한 <조선닷컴>의 '오버'

 

Please Please Me | Beatles Album 2004/10/12 17:20

발매일  1963년 3월 22일 (Mono ONLY)
               1963년 4월 26일 (Stereo version)
               1987년 2월 26일 (CD release)
               Total time  31:59

영국 앨범 챠트   챠트진입일 
               1963년 4월 6일
               1963년 5월 11일부터 30주연속 1위 기록 (70주 동안 차트에 머무름)
               CD버전은 1987년 3월 7일 32위을 기록하며 4주간 차트에 머물렀다.

판매량
   발매이후 6개월만에 2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이후 영국에서 50만장, 전 세계적으로 2백만장이 팔렸다. 
   
자켓 디자인
Beatles 첫 광고용 사진이기도 한 이 사진은 London 맨체스터 구에 있는 E.M.I. House 계단에서 촬영했다.
도안한 인물은 Angus McBean 으로 Beatles편집앨범 '62년-66년','67년-70년'도 그가 도안했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Stereo 버전에서는 "Please Please Me"를 부를때 John이 마지막 절 단어를 잘못 말하고는 마지막 합창에 낄낄 웃어버리고 만다. 이게 모노 버전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에피소드
조지 마틴은 앨범의 제목을 "Off The Beatle Track" 라고 하자고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조지 마틴은 그 제목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는데, 이후 63년 7월 22일 미국에서 발매된 앨범에 'Meet The Beatles'로 쓰여졌다. 이때 발매된 앨범에는 'Please Please Me' 와 'Ask Me Why'가 빠졌었다가 1964년 1월 27일에 다시 발매되었을 때 포함되었다. 대신 " Love Me Do "와 " P.S. I Love You " 는 제외됐다.원래 Song writing credits는 McCartney-Lennon으로 되어 있었지만, Parlophone사가 이것을 Lennon-McCartney으로 바꾸어 발매했다.
 
앨범소개
Beatles의 공식 Debut앨범인 이 Please Please Me는 Beatles신화의 또 한명의 주역 George Martin의 프로듀스로 초기 Rock'n Roll과 Beatles의 개성이 잘 어우러진 14곡을 담고 등장했다. 등장 이후 약 10일이 지난 1963년 4월 6일 영국차트 10위로 등장, 5월 4일부터 30주간 1위에 랭크되는 등 64 주간 차트 100위권에 머무는 신기록을 세웠고 당시 데뷔 앨범으로는 최다 판매고를 기록하던 Elvis Presley의 'Jailhouse Rock'의 판매량을 2 만장 초과하는 25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 지역에 Beatles선풍을 몰고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With The Beatles | Beatles Album 2004/10/12 17:20

영국앨범차트   1963년 11월 30일
1963 년 12월 7일부터 21주간 1위 (51주간 차트에 머무름)
CD버전은 1987년 3월 7일부터 2주간 차트에 머무름(40위까지 도달.)
1997년 3월 22일부터 1주간(72위)

 
판매량
    발매되기 2주전에 이미 27만장의 선주문이 들어왔고, 1주전에는 50만장으로 되었다. 발매되기이 전인 18일에 이미 Silver disc가 되었던 것이다. 64년 2월 중순에 영국에서 이미 88만5천장이 팔렸고, 1964년말에는 영국에서 최초로 백만장을 달성했다. (사실은, 6년전에 발매된 미국의 사운드트랙"South Pacific"이 1963년 11월에 밀리언셀러에 올라, 영국에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라고 할 수는 없지만,그래도 비틀즈는 2년도 채 안되서 그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엘범  
   이 앨범의 미국버전인 "Meet The Beatles"는 이상하게도 5개의 트랙이 누락되었지만 5백만장이 팔렸다.총 6백5십만장이 팔린 셈이다.챠트에서 이 L.P.는 "Please Please Me"를 1위 자리에서 밀어내고, 21주간 1위의 자리를차지  한 후, 51주간 차트에 머무렀다. 앨범의 형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조리 순위를 매겼던 영국 챠트의 초창기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L.P.가 영국 싱글차트에서 11위에 올랐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자켓 디자인
    Beatles의 많은 레코드 쟈켓중 1,2위를 다투는 걸작 쟈켓이다. Robert Freeman이 촬영했다.
    Epstein은 이 사진을 무척 좋아해서 자택의 벽에 걸어 두었었다고 한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Money" 스테레오 버전에는 걸출한 기타연주로 시작되지만, 모노 버전에는 실리지 않았다.
                 모노와 스테레오 버전의 피아노 인트로도 틀리고, 전체적으로 사용된 기기도 틀리다.
 

  에피소드
    First Album [Please Please Me]에서 선곡되지 않은 [Hold Me Tight]이 다시 레코딩되어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소개

많은 공연 애창곡들이 두면 가득히 담겨져 있다.. 비틀즈는 그들의 첫 번째 앨범 PLEASE PLEASE ME를 1963년의 가장 잘팔린 앨범으로 만든 성공적 방식으로 여기에도 되풀이 하고 있다. 다시한번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오리 지날 작품 8곡과 함께 그들이 가장 흠모했던 미국의 R&B 아티스트들의 레퍼토리를 각기 뽑아내어 다수 여기에 담고 있다. 
 

A Hard's Night | Beatles Album 2004/10/12 17:17

발매일   1964년 7월 10일
                1987년 2월 26일 (CD)

녹음일   영화 촬영중의 1965년 2월중순 - 6월 중순 (Total time   29:45)

영국앨범차트   진입일  1964년 7월 18일
                                       1964년 7월 25일부터 21주간 1위에 랭크
                                       1971년 2월 16일부터 1주간 (No.30)
                                       1987년 3월 7일부터 4주간 (CD release,eached no.30)

 
■ 판매상황
영국에서 선주문 25만장이었고 발매 첫주에 25만장이 팔리고 1위에 올랐다. 그해 말에는 60만장이 팔렸고,영국에서 80만장이 팔렸다. 미국버전의 앨범은 좀 다른데,  미국에서는 George Martin 이 영화의 몇몇곡을 추가해서 앨범을 판매했고, "Something New"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이 두 앨범은 미국에서 300만장이 판매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A Hard Day's Night" 는 4백만장이 팔렸을 것으로 추산된다.
 
자켓 디자인
    Robert Freeman이 촬영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A Hard Day's Night"  스테레오 버전은 모노버전보다 몇초가 길다.
"I Should Have Known Better"  스테레오 버전은 하모니카인트로에서 얼마간의 갭이 있지만 모노버전은 없다. 스테레오 버전은 마지막절에 네 번을 하지만, 모노 버전은 세번이다.
"If I Fell"  스테레오 버전은 오프닝에 솔로 보컬이 double-track이지만 모노는 아니다.
"Tell Me Why"  스테레오 버전은 오프닝에 솔로 보컬이 double-track이지만 모노는 아니다.
 
MEMO
1964년 8월 첫주에 비틀즈에게 있어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앨범과 싱글곡이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No 1에 오르게된다.
또한 이 앨범은 전곡이 Lennon과 McCartney가 함께 작곡한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앨범소개
비틀즈는 활동 기간중 "A HARD DAY'S NIGHT"를 비롯해서 "HELP", "MAGICAL MISTERY TOUR"."YELLOW SUBMARINE" 등 몇 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들의 첫번째 영화였던 "A HARD DAY'S NIGHT"는 최고의 비틀즈 영화로 꼽히고 있고 특히 사운드트랙 앨범의 수록곡들은 모두 황금같은 비틀즈의 명곡들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비틀즈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있는 앨범이다
 
Beatles For Sale | Beatles Album 2004/10/13 13:14

발매일   1964년 12월 4일
                 1987년 2월 26일(CD) Total time   33:25


영국 앨범 챠트 챠트진입일

              1964년 12월 12일
                  1964년 12월 19일부터 7주간 1위
                  1965년 2월 27일부터 1주간 1위
                  1965년 5월 1일부터 3주간 1위 기록(총 46주간 차트에 머무름)

                  1987년 3월 7일 발매된 CD버전이 45위에 오르며 2주간 챠트진입해 머물렀고,
                  1997년 3월 22일부터 72위를 기록하며 1주간 머물렀다.


발매상황
이 앨범이 발매되기 한달전부터 무려 50만장이상의 선주문이 들어왔고, 곧 75만장으로 불어났다. 
이는 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수치였다.
곧바로 이 앨범은 역시나 자신들의 앨범인 "A Hard Day's Night"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달에 Rolling Stones에게 1위 자리를 내어줬다가 다시 그 다음달에 1위로 복귀한다. 한 싱글챠트에서도 28위를 기록했다. 28위라고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앨범에 실린 노래의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단지 단위 노래의 copy가 얼마나 팔렸나만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에서만 1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한편 같은 앨범이 미국에서 "Beatles' 65"로 발매되었는데, 왠일인지 트랙의 순서뿐만 아니라 제외된 곡도 었다.
그래도 영국에서 발매된 그 앨범과 함께 30만장이 판매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4백만장이 판매된 것으로 추산한다. 실제로 다음 미국 앨범인 "Beatles VI"에서, 제외되었던 6곡을 포함했기 때문에 이 앨범의 판매 량까지 합산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100만장이 더해져서 총 5백만장이 팔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켓 디자인
앨범커버 사진은 1964년 가을에 Robert Freeman이 촬영했다. 장소는 Royal Albert Hall근처의 London의Hyde Park뒤쪽을 선택했다. 순회공연과 그밖에 팬들(Beatlemania)와 함께 하며 피로에 지친듯한 모습을 찍은 것이 더욱 팬들에게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속지 또한 Freeman의 사진들이었다. 워싱턴 D.C 콜롯세움에서 Beatles의 2월 11일 공연사진이 왼쪽에, 오른쪽에는 A Hard Day's Night촬영중에 런던의 Twickenham 영화 촬영소들의 로비에 벽의 앞에서 있는 모습이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No Reply" mix한 것이 차이를 보인다.
    "Words Of Love"  스테레오버전이 모노버전보다 약9초정도가 짧다.
 


에피소드
레코딩 당초 전작 앨범에 이어 Ringo가 노래할 곡이 없었다. 거기에  John이  함부르크시절에 레파토리였었던  [Honey Don't]를 Ringo에게 부르게 하였으나 그는 가사를 잘 암기하지 못해 레코딩이 늦어져 레코딩 최종일에 겨우 완성되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스튜디오의 녹음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L.P에서의 3트랙은 단 1 take만에 녹음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64년 8월 14일에 비틀즈는 앨범에 수록할 다른 곡을 5 take까지 녹음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수록되지 못했고 이후에도 역시나 remix되지도 못했다. 그 곡이 바로 "Leave My Kitten Alone"이다.
 

앨범소개

오리지널 8곡, 커버 6곡으로 구성, 초기 비틀즈의 성장을 여실히 나타내는 이 앨범의 매력은 보컬을 강조시키며 4인 (McCartney, Lennon, Harrison, Ringo)을 가장 가깝게 느끼도록 한 것이다.

HELP | Beatles Album 2004/10/12 17:21
 
발매일   1965년 8월 6일
                1987년 4월 30일(CD)

녹음일   영화 촬영중의 1965년 2월중순 - 6월 중순 (Total time   33:22)

영국앨범차트   진입일 : 1965년 8월 14일
                                        1965년 8월 14일부터 9주간 1위에 랭크(챠트에 37주간동안 랭크)
                                        1971년 7월 24일부터 2주간 (reached no.33)
                                        1987년 5월 9일부터 2주간 (CD release, reached no.61)


 
■ 판매상황   

영국에서 선주문 25만장이었고 발매 첫주에 27만장이 팔렸다. 총 100만장이 팔렸고, 전세계적으로 250만장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매후 곧장 "The Sound Of Music" 가 차지하고 있던 1위자리를 빼앗았지만 두달후 다시 1위를 내어주게 되었다.
 

자켓 디자인
    Robert Freeman이 촬영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Help!" 둘다 같은 반주를 갖고 있지만, 보컬에서 차이를 보인다.
 

에피소드
이 앨범의 레코딩중 Paul의 Beatles 탈퇴설이 있었다. 그 이유는 [Yesterday]의  레코딩에 John, George,Ringo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Rubber Soul | Beatles Album 2004/10/12 17:22

영국앨범차트   챠트진입일 : 11th December 1965년 12월 11일(42주간)
    1987년 5월 9일부터 4주간 (CD release, reached no.60)
    1998년 4월 25일부터 1주간 (No.62)

 
 판매량
    이 앨범은 50만장의 선주문이 있었고 영국에서 75만장 가량이 판매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3백만장 정도로추산되고 미국에서 발매된 앨범에는, 추후의 버전에서는 수록되었지만, 전곡이 수록되지 않고, 영국의"Help!"앨범에서 2곡을 수록했다.
 

 자켓 디자인
    커버에는 비틀즈의 이름이 인쇄되지 않았고, 사진은 Robert Freeman이 촬영했다.
 

 Mono/Stereo 버전의 차이
"What Goes On"  모노버전에서는 마지막 기타연주의 기타코드 부분이 빠져있다. 스테레오버전에는 모두 실렸다.
 

  MEMO   
    Rubber Soul이라는 타이틀은 Anthology 2의 첫번째 디스크에 수록된 I'm Down을 들어보면 연주가 끝난 후 폴이 Plastic Soul이라고 외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건 "진짜 소울(흑인음악)이 아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흑인음악이다"는 의미인데, 반년 뒤에 플라스틱을 러버로 바꿔서 앨범의 타이틀로 쓴 것이다.
1965년 11월 4일의 이 앨범 세션동안에 비틀즈는 인스트루멘털곡인 "12-Bar Original"을 녹음했다.
이때쯤에는 EMI 스튜디오를 마음대로 쓸수 있었으므로 여유를 가지고 제작하였다.  Beatles의 라이벌 그룹인 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이 앨범을 들고 평가가치가 높은 훌륭한 작품들이 꽉짜여있어 충격을 받았다. 이제부터 나도 싱글이 아닌 앨범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겠다] 라고 말했다.  보컬을 강조하고,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앨범소개

Beatles의 음악적 진보와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게 해준 앨범으로 초기의 낭만적 순수성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조형적 멜로디를 통한 매혹적인 작곡 그리고 변화기에 찾아든 날카로운 의식등이 어우러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예술적 이중주이다."(66년 1월, 워싱턴포스트지). 
Revolver | Beatles Album 2004/10/12 17:23
 

영국 발매일 : 1966년8월 5일


레코딩       : 1966년 4월 - 6월까지 10주동안 전례없이 오랫동안 녹음.


Poducer    : George Martin


Engineer   : Geoffrey Emerick


참가 Staff
                        이니루 왓구왓드 (인도인 뮤지션 : Tabra : A - 4)
                        Geoge Martin : (Back Chorus : A - 6, Piano : B - 1)
                        Mal Evans (Sound Effect : A - 6)
                        Nile Aspinal (Back Chorus : A - 6)
                        Patti Harrison (Geoge의 처. Back Chorus : A - 6)


히트상황
 영국의 Album Chart에서는 66년 8월 13일 첫등장. 10월 8일까지9주간 연속 1위를 독점. 통합 20주간 랭크됨.


에피소드
 [Revolver]란  Album Title은 Paul이 일본공연시숙소인 Hilton Hotel 에서 경비의 권총을 보고 생각해낸 것이다. 그외에 생각한  Album Title은 [Pendulum]-Paul, [Aftermath]-Ringo와 [Magical Circle] [Four Side To The circle] [Beatles On Safari] [After Geography][Abracadabra]등이다.

 

쟈켓 스토리
    66년도 그래미에서 쟈켓 디자인상 수상. 커버디자인은 비틀즈의 친구인 Klaus Voormann으로  세션 베이시스트이다. 뒷면은 의 Promotin Album 을 촬영하기 위해  EMI Studio에 모였을때 사진가인 Robert Whitaker가 찍은 것이다. 4인이 쓰고있는 안경은 65년 8월 미국공연때 구입한것이다.

 

MEMO
    [Rubber Soul]의 성공으로 자신을 깊이 생각한 Beatles는 본격적인 Studio Musician 으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Rubber Soul]로 시험한  실험적 Sound를 발전시켜 Pop Music을 예술적 경지로 이끌었다. "이 앨범에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진귀한 Sound가 있다. 지금까지 시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연주를 흉내 내려고 해도 절대로 흉내 낼 수가 없다." 라고 Paul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Rock의 범주를 뛰어 넘어 혁명적인 새로운 Sound를 만들었으며 노래의 재재 범위를 정치풍속, 철학적 명상 등으로 확대하였다.

 

SOUND
     [Rubber Soul]의 연장선상의 앨범으로  이 두장을 듣고 비교해보면 [Rubber Soul]이  따뜻한 느낌을 내포한 것에 비하여 이 [Revolover]는 아주 차거운 느낌을 준다.

 

앨범소개

록역사상 가장 혁명적/실험적인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Beatles Album 2004/10/12 17:24

영국 발매일  :  1967년 6월 1일

레코딩        :  1966년 12月하순 - 1967년 4月상순까지 4개월간.  700시간 걸려 녹음.

레코딩 Staff
    Producer :  George Martin
    Engineer : Geoffery Emerick
                     (이 Album의 Engineering으로 1967년도 Gramy상에서 Best Engineer부분 최우수 상 수상)

참가 Staff
    George Martin (Piano A-4, B-3. Hamond Organ A-7. Hamonium B-6)
    Mal Evans     (Hamonica A-7. Piano B-6)
    Neil Aspinal  (Beatles의 Load Manager : Hamonica A-7)
    Paul Backmaster (영국의 명 Arranger : 챔발로 B-6)
    Sound Ingoprededo (영국의 Top group : sax B-4)

히트상황
    발매후  3개월간 전세계적으로 250만장이상 팔림. 1975년 8월말 현재 1100만장 돌파. Beatles Album중 [Abbey Road] 와 비슷한 기록. 영국에서 예약은 25만장.  Album Chart에서 1967년 6월 3일에 첫 등장하여  1위에 랭크. 10월 28일까지  22주간 연속 1위. 통산 43주간 랭크.[New Musical Express]지의 Single Chart까지 등장하여 전대미문의 쾌거를 기록. 미국 Album chart에서는 통산 149주간 랭크.  1967년 6월 24일에 8위로 첫 등장하여 다음주에는 1위. 10월 7일까지  15주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6월 15일에 RIAA공식 Gold Disk 획득.
 
에피소드
    이 Album이 발매되었을때 New York Phil의 상임지휘자인 Leonard Bernstein은 극찬의 말을 했다.  "Beatles의 Sound는 Bach의 Fuga에 필적하는 美를 가졌다. 여러가지 의미로 볼때  그들은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이다. 금세기의 슈베르트나 헨델이라고 할수 있다." Beatles는 이  Album에 많은  Sound Mixing을 사용하였다. 최고의 걸작인 의 끝에 수록된 Sound는 18track으로 녹음하였다.  17track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인간의 귀에 이 소리는 마치 개소리처럼 들린다.
 
쟈켓 스토리
    1967년도 Gramy상에서 Best Album상 수상.  Beatles 최고걸작 쟈켓. 배경에 인물사진을 배치. 초기의 Beatles모습을 인형으로 배치하여 새로운 Beatles 탄생을 환영. 즉, 지난 모습을 손수 매장하고 새  Beatles를 선언. 언제나 Beatles의  모든  아이디어의 장본인인  Paul의 생각으로 유명인의 합성사진을 선택,  Beatles멤버 4명이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하였다.
 
MEMO
    새 앨범제작에 있어  자신감을 가지고 만든 완벽한  Total Album.  Paul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20세기 들어 출현한 대중음악 가운데 최고의 찬사를 받음과 동시에 아직까지도 살아 숨쉬는 전설로 이어지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에서 보여준 과도기적 실험성을 거쳐 대중음악의 한계에 도전한 Beatles의 극대화된 역량이 최고의 정점에 달해 음악으로 승화된 앨범이다.
 당시의 표현을 빌자면 "대중음악의 승리" 바로 그것이다. 숨김없는 사회고찰, 날카로운 현실비판, 인생에 대한 예리한 분석, 온화하게 전개되는 유우머속의 냉소, 그리고 허무가 깃들여진 미래의 영상등을 그려내고 있는 수록곡 들이 모두 하나의 개념과 줄거리로 이어지는 콘셉트(Concept) 형식을 밟고 있다.
특히 콘셉트 형식은 이 앨범이 자랑하는 핵심적 특징을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그 놀라운 창의성에 경이를 느끼게 한다. 한편, 진보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녹음기술의 전환기적 변혁을 가져왔고, 윤기있게 채색된 작곡법과 연주기법 등으로 Beatles의 놀라운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시켰고, 이 앨범 이후로 대학에 대중음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설립되어 대중음악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동기를 마련하는 등 이 앨범이 가져다준 사회적, 문화적, 교육적, 음악적 충격파는 실로 엄청났다.
Magical Mystery Tour | Beatles Album 2004/10/12 17:25

영국 발매일  :  1967년 12월 8일 (E.P 판)
 
레코딩 일시  :  A면은 동명영화의 촬영과 병행하여 1967.8.하순 - 10月.상순까지 녹음.
                           B면은 1966.12.상순 - 1967.10.중순까지 연속적으로 녹음하였다.
레코딩 Staff
               Producer  :  George Martin
               Engineer  :  Geoffery Emerick
 
참가 Staff
               Mal Evans      (탬버린 : B-2)
               George Martin  (피아노 : B-5)
               Mick Jagger (Rolling Stones의 lead Vocalist : Back Chorus : B-5)
               Keith Richards (Rollinf Stones의 Guitarlist : Back Chorus : B-5)
               Erick Clapton  (Back Chorus : B-5)
               Keith Moon     (The Who의 Drummer : Back Chorus : B-5)
               Graham Nash    (Back Chorus : B-5)
               Gary rees  (Oga Brothers의 member : Back Chorus : B-5)
               Patti Harrison (Back Chorus : B-5)
               Jane Asyer     (Paul의 애인 B-5)
               Marian Faithful (Back Chorus : B-5)
 
발매상황
영국 Single Chart에 1967.12.16.에 17위로 첫 등장하여 다음해 1968.1.13.에  1위에 올라 통산 10주간 랭크됨. 미국 Album Chart에는 1967.12.23에 157위에 첫등장하여 다음해 1968.1.16 - 2.24.까지 8주간 연속 1위, 통산 82주간 랭크되었다. 1967.12.15, RIAA 공인 Gold Disk 수상
   
에피소드                                                           
영국에서는 Sound Track 곡만 있는 E.P로 발매되었는데 레코딩 종료시 6곡을 더 수록했다. 발매 문제로 Album을 만들기에는 너무 곡이 적어  1장의  EP로 수록할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싱글판 3매를 한 Set로 발매했으나 여러 생각끝에 2장의 EP Set로 만들었다.
A면은 Sound Track곡, B면은 Single 히트곡을 수록하여 Album을 만듬. 미국에서는  영국 Sound Track판의  결점인 레코드를 일일이 뒤져 듣던것을 보완해  Sound Track곡만을 들을 수 있게 한쪽면에  수록했다. 반대편은  여기까지 mono로 들었으나, stereo로 수록했다. Capitol Record의 나쁜 상술이었다. EMI Record 에서는 오랫동안의 발매 요청으로 1976.10월에야 겨우 발매되었다
                                                        
MEMO
TV용 영화 [Magical Mystery Tour]의 Original Sound Track 판으로 음악적으로는 전작 Album인 [Sgt.- ]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I Am The Walrus >, < Blue Jay Way >, < Flying >등, electric 기술을 구사한 두터운 Sound를 가진 작품이 많다. Psychedelic Animatism적 성격이 강한 영화 Sound Track이다.  전작보다 더 도약적이고 보다 Comic하게 만들었다. 시적인 면에서는 환상적이고 허속적인 , , 서정성이  뛰어난 은 걸작이다.
 
The Beatles(The White Album) | Beatles Album 2004/10/12 17:27

발매일   1968년 11월 20일
                1979년 1월 16일 (White Vinyl)
                1987년 8월 24일 (CD)
                1998년 11월 23일 (CD Special Edition)

영국앨범차트   진입일
                7th December 1968
                1968년 12월 7일부터 7주간 1위
                1969년 2월 1일부터 1주간 1위 (총 22주간 차트에 머무름)
                CD버전은 1987년 9월 5일부터 2주간 차트에 머무는데 최고 18위를 기록했다.
    
 
영국 발매일 : 1968년 11월 22일
           레코딩 : 인도에서 귀국후 68.5월하순에서 10월하순까지 4개월 반 동안 녹음.
 
 레코딩 스탭
    Poducer  : George Martin
    Engineer : 1) Jeff Emeric
                       2) Cris Thomas (Bad Finger, Roxy Music, Sex Pistols의 Poducer로 유명함)
                       3) Ken Scortt (Super Tramp의 Producer)
 
참가 Staff   1) Mal Evans (탬버린 A-2, 트럼펫 C-6)
                      2) Jackie Lomax (영국출신의 Vocalist, 손박자 A-2)
                      3) John (Paul과 함께 손박자 A-2)
                      4) Cris Thomas (Mellotron A-6, Harpsicord B-4)
                      5) Ono Yoko (John의 아내, Back Chorus A-6, C-1)
                      6) Eric Clapton (lead Guital A-7
                      7) Patti Harrison (Back Chorus C-1)
                      8) Georgy Martin (Electric Piano D-3, Harmonium D-4)
 
Hit 상황
   1) 영국 Album Chart에 1968年 11月30日에 3위로 첫등장하여 다음주에 1위에 올라  1969. 2. 15.까지 10주간 1위 독점.통산 21주간 랭크됨.
   2) 미국에는 12月14日 11위에 첫 등장하여 12月28日에서 이듬해 2月1日까지 또 2月15日  3月1日까지 모두 9주 간 1위. 통산 114주간 랭크. 68年 12月6日  RIAA공인 Gold Disk 수상
 
에피소드
    이 Album의 레코딩 Session으로 된 작품은 George의 [Not Guilty]( 79년 솔로앨범에 수록), Paul의  [Jubilee](Junk의 원곡), John의 [On the road to Marakesh] 등이다.
 
자켓 스토리
    자켓에 "The Beatles" 라는 문자를 나타낸것 외에는 어떤 인쇄도 없어 "White Album"으로 불리운다. Beatles 자켓 중 가장 간단하다. 전작의 자켓에서도 볼수없는 의외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Album에는 레코드 번호외에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고유번호가 찍혀있다.
 
 MEMO
    1) 이 Album은 [Sgt. -]까지의 의도적 시도에서 탈피했음을 보여준다. Concept 형식이 없다. Sound는 심벌이 더욱 풍부하여 음악 박람회적 앨범이다. 독특한 [Back  In The USSR],  칼립소풍의  [Ob-Ra-Di Ob-Ra-Da], Blues풍의 [Yer Blues][Happiness is] 바로크 풍의 [Black Bird][Mother Nature's Son] Contry풍의 [Rocky Raccon] [Don't Pass Me By], Music콩쿨의 [Revolution 9] 등 그들 4인의 개성이 발휘된 작품들이다.
    2) Sound 면에서는 [Back In The -]는 Beach Boys의 Chuck Bessy, [Yer Blues]에는 Blood Shade Blues,[Why Don't We -]에는 Rolling Stones화 했다.
    3) 시적인  면에서는  [Back In The -][The Continuing -][Honey Pie]에서는 미국적이고 [Glass Onion] 에서는 Beatles 자신, [Black Bird] [Piggies]에서는 인간적이고 [Sexy Sadie]에서는 마하리쉬 요기를 [Cry Baby Cry]에서는 영국황실을, [Revolution 1]에서는 폭력혁명 세력을 보여주었다.
 
 Sound
    이 Album에서는 Paul과 John 자신이 Produce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 유명한 Hit 곡도 여러곡 탄생되었다. Member외에  여러 Session Man이 참가했다.  [Revolution 1] 의 Piano는 Nicky Hopkins, [While My -]의  기타는  George 대신 Eric Clapton이 연주하였다.  이 Album을 듣고 있으면 그들 4인이 각자 하고 싶었던 말을 확실히 알수있다.
    이  Album에는 특히 Paul의 곡이 많다.  [While My -] 는 George가, [Yer Blues]는 John이 각각 독점했다.  [Black Bird]는 cord를 사용않고 6도로치는 Count line과 Melody가 합해져  매우 아름답다. [Revolution]은  Contry적인 Melody line이다. Acoustic guital 소리가 매우 명쾌하다. Contry라고 말한것도 미국에는 없는 Sound이다.
    Scotland적이고 영국적인 Sound라고 느껴진다. 이 Album에서 느낀 특징은 생음악이 많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생각해보아도  [Sgt. -]까지의 계산으로 볼때 옛 Sound와는 반대이다. Album의 Play는 어느것을 보아도 4인이 부르는 느낌이다. George Martin의 영향이 크다고 할수있다. [Revolver], [Sgt. -]등과 비교해 볼때 그들 자신의 Musician으로서의 음악성이 돋보였다. 즉 앞의 두 작품보다 음악가로서 모습이다.

 
THE BEATLES (White Album)

비틀즈의 섬광이 극치에 달한 명반 
Yellow Submarine | Beatles Album 2004/10/12 17:25

영국 발매일 : 1969년 1월 17일 발매

미국 발매일 : 1969년 1월 13일 발매
 
레코딩 일시 : 67년 6월 중순경 - 68년 2월까지
                         London Abbey Road Studio에서 녹음.
 
Poducer  : George Martin
 
■ 발매 상황  : 미국에서는  69년  2월에  Chart에 처음 등장하여 24주간 통산랭크되었으나 1위는 하지 못하고  2위 까지 올랐었다. 영국에서는 겨우  4위까지 올랐을 뿐이다. 이것은 Beatles의 Original Album중 가장 부진한 기록이다.
 
George의 곡 Only a Northern Song은 그가 단시간 내에 쓴곡으로 Beatles작품에 대한 자조적은 비판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그 내부에는 그들의 사심, 세력 이해관계등이 깔려있다고 한다.
 
이 앨범은 Beatles 멤버들이 Apple사의 설립과 사업구상으로 바쁘고 또 각자 단독적인 활동이 시작될 무렵에 녹음된것으로  그들이  별 애착을 가진것이 아니었기에  가장 저조한  평가를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Brian Epstein 에  의해  계약된 Project로써  United Artists에 3번째 Beatles 영화를 만들 의무가 있었기에  그들은 별로 내키지 않는 가운데 만화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다. Yellow Submarine은 66년 발표된  L.P.에서,[All You Need Is Love]는 67년 발표된 L.P. 에서 각각 발췌한 것으로 Beatles의 신곡은 4곡뿐이다.
 
Let It Be | Beatles Album 2004/10/12 17:27

영국 발매일  :  1970년 5월 8일 발매

미국 발매일  :  1970년 5월 18일 발매

레코딩        :  동명 영화의 촬영과 병행하여 1969.1월  2월 상순까지 녹음.

레코딩 Staff
                           Producer     :  George Martin, Phil Spector
                           Engineer     :  Gly Johns

참가 Staff
    Billy Preston (미국출신의 흑인 키보드 연주자) : 전기피아노 ( A-2.4.5.6 , B-1.2.5 )
    George Martin : 오르간 ( A-3 )
 
발매 상황
    Beatles 해산설의 화제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예약으로만 370만매가 팔려 사상 최고기록을 수립하였다.  미국 Album Chart에는 1970.5.30.  104위로 처음 등장하여 6.13  7.4  4주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통산 55주간 랭크. 70.5.26. RIAA 공인 Gold Disk 수상.  영국 Album Chart에는 1970.5.23. 3위로 처음 등장. 6.6  7.25  8주간 1위 자리를 지킴. 통산 25주간 랭크.
 
에피소드
    [THE BEATLES]에 이은 새로운 Album 제작 시작무렵 전자 음향기술을 피하여 자신들의 악기만을 사용한 Simple 한 Sound의  Album을 만들기를 원한  John이  다른 3인에게 [정직한 앨범]을 만들것을 제안, 그의 의도대로 마치 리허설 하는 것을 녹음해 놓은 듯한,  Documentary touch의 Live 형식의 Album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Twickenham film studio가 황량하고 형편없어 Apple Studio로 옮겨 녹음을 끝냈다.  원래 Album title은 [Get Back] 이었으나 중도에 발표를 연기했다가 일년 반후에 재편집하여 [LET IT BE]로 title을 바꾸어 발표 하였다. 거의 30시간에 달하는 양의  Raw Tape을 하나의 Tape에 편집하여 Live  Recording 당시를 생생하고 박력있게 전한 Phil Spector의 Produce능력이 돋보인다.
 
MEMO 
    중기이후 써왔던 Dubbing 등의 Studio음향기술을 배제한 Simple한 Rock 색체의 사운드제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내용적으로 folk Rock 풍의 [Two of us], Blues style의[Dig a Pony][For you Blue], 민속풍의 [Maggie Mae] Gospel 풍의  [Let it be],   Rock Number  [Get back], Ballad 풍의 [The long and winding road], [Across the  Universe], 1950년대 소년시절 John 과 Paul의 공동작품인 Old Rock [One after 909]등 다채로운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1969년 녹음당시 Original recording Producer는 George Martin 이었으나 1970년 4월경 Phil Spector의 Remixing,  overdubbing에 의하여 앨범이 완성되었다.[Let it be]는 Original Single과  Phil Spector에 의해  재편집  된 곡이 후반부 코러스부분 one play차이로 single이 3분50초, 앨범수록 Let it be가 4분01초로 차이가 있다. [The long and winding - ]의 경우 코러스,  Harp, Strings 등이 가미되어  재편집되었는데  Paul은 그것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운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었다.

[Across the Universe]는 68년 녹음되어 세계야생동물보호 기금에 헌정한 것이나 1970년 3월 재편집당시 Back  Vocal, 새소리등이 삽입되었다. [I me mine] 은  Abbey Road Studio에서 녹음, [I'e got a - ] [One after 909] [Dig a Pony]는 Apple studio의 옥상에서 녹음한것을 재편집한 것이며 나머지곡들은  Apple studio 에서 녹음된 것이다.
 
Abbey Road | Beatles Album 2004/10/12 17:26

앨범 발매일
        영국 발매일 : 1969년  9월 26일
        미국 발매일 : 1969년 10월  1일

레코딩 일시   : 1969년 7월    8월에 걸쳐 녹음
 
레코딩 Staff
        Poducer      : George Martin
        Engineer     : Jeff Emeric , Phil McDonald , Alan Parsons
 
■ 발매 상황
매니저 Allen Klein의 능숙한 선전활동과 미국에서부터 번진 Paul의 사망설과 관련, 발매 초기부터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첫해 판매량만해도 500만장이며 이것은 [Sgt. -] 보다 200만장이나 많은 기록이다.   전세계적으로  75년까지 1300만장이 팔려 Beatles Album 중 최다판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 Album Chart에  1969.10.4.에 첫등장하여 1위에 랭크. 1970.2.14.까지 19주간 1위 독점. 통산 35주간 랭크되었다. 미국에서는 1969.10.18.에 178위에 첫등장하여 11.1-12.20, 다음해 1.3-1.10. 통산 11주간 1위에 랭크.  통산랭크 주간은 87주이다.  1969.10.27. RIAA공인 Gold Record 선정.
 
에피소드
      이 앨범의 레코딩 세션으로 녹음된 작품은 John의 작품으로
     [Four Nights In Moscow],[When I Come To Town]이 있다.
 
자켓 스토리
  Paul의 사망설의 한가지 원인이 된 자켓사진이 유명하다. 횡단보도를 걷고있는 Beatles 멤버들을  Paul의 장례식행렬의 목사(John),장의사(Ringo),묘지의 인부(작업복차림의 George)로 보았음.  Paul이 맨발인것은 그가 죽은 사람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Paul이  담배를 오른손에 쥐고있는 점도 지적되었다. 노상에 주차하고 있는 Volkswagen(Beetles)의 번호판 [IF28] 은 Paul의 나이 28세를 나타낸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음.
 
MEMO
이 Album의 레코딩시기는 [Let it be] 레코딩시기 (69.1-2) 보다 늦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Let it be]가 70년 5월에 발표되어 final Album이 되었으나,[Abbey Road]가 실질적인 Beatles의 최후 작품인 것이다.
[White Album]이후 4인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또하나의 Album으로 보고있다. 완성도가 높은 치밀한 구성,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반면 강한 개성의 경합이 돋보이는 걸작 Album이다. 서로가 지친 상태에서 그들의 왕국이 서서히 붕괴됨을 느끼며 만들어낸 Beatles 최후의 역작으로 하나의 작은 기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Side 1'은 종전형식대로 단독곡들이 수록되어있고 'Side 2' 는 전체적으로 메들리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운드 면에서는 신서사이저를 많이 도입했으며, 랩소디적인면, Musical 성격의 곡도 있고  Rock and Roll, Prograssive pop 등 다양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ABBEY ROAD
 
섬세한 감성과 지성이 융화되어 완벽한 음악성이 빛나는 Beatles 최후의 거작 는 가장 Beatles다운 앨범이며 오늘날 "Pop 음악의  교과서"라고까지 인식되어지는 작품이다. 다시 한번 발휘된 그들 특유의 변화무쌍한 작곡법돠 연주 기법 등이 윤기있게 다듬어져 있어 전체적인 음악적 구조가 치밀한 논리적 전개로 채색되어 있어 듣는이를 전율의 도가니로 인도하고 있다.
이  앨범의 특징은 이후의 철학적, 사회적 주제의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Beatles가 오로지 순수하게 음악에의 열정만을 가지고 만든 지극히 예술적인 앨범이라는 것이다.  Beatles의 수많은 걸작 중 회고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가장 윤기있는 앨범이라는  평과 함께 "음악적인 측면에서 를 능가할 작품은  없다."(미국, Rolling Stone지, 1978년)라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처럼되어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