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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산곡동 개들에게 집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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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산곡동 개들에게 집 생기다

개고기...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인천 산곡동 개들에게 집 생기다
인천수의사협회, 개집 50개 기증... 일정기간 적응후 정착 가능
텍스트만보기   전경옥(pigamojara) 기자   
4월 6일 오전 9시 인천 산곡동을 찾았다. 그간 인천 동부공원관리소 측과 개주인 이아무개씨 사이의 분쟁으로 좁은 우리 속에 갇힌 개들에게 집이 생기게 되었다는 소식. 관리소측은 예산집행의 어려움 때문에 더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씨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견사를 지을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었다. 도움의 손길을 준 것은 인천수의사협회. 인천수의사협회 허준형 회장은 협회의 수의사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지붕이 있는 개집 50개를 마련해 6일 현장을 찾았다.

▲ 적응훈련을 위해 미리 빼 놓은 개. 목의 쇠줄은 우리에서 빼낼 때 사용하기 위한 것.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이씨는 미리 연락을 받고 우리 속에 갇힌 개들을 몇 마리 빼 밖으로 내보내 묶어 둔 상태였다. 한꺼번에 개들을 내보낼 경우 무리가 간다는 주장. 이미 좁은 우리 안에서 벗어나 좀 더 큰 견사 안에 보호되어 있는 개가 눈에 띄었다. 목에 걸린 쇠줄은 좁은 우리에서 개들을 밖으로 빼기 위해 채워 둔 것이라고 한다. 개들은 한 마리당 3~4일의 적응훈련을 거쳐 밖으로 나오게 된다. 현재 좁은 우리 안에 있는 개들이 밖으로 완전히 나오게 되기까지는 총 15일이 걸리게 된다.

이미 개집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빨리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허준형 회장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분리불안'이라고 설명한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벗어났을 경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며칠간 시간을 두고 적응훈련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우리의 앞쪽에 있는 개들. 그간 조금씩 빼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곳이 많았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 첫번째 우리에 있는 개. 목에 쇠줄이 보인다. 적응훈련을 준비 중.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애초 동부공원관리소 측에서 만들었던 우리는 길게 두 줄로 연결되어 있다. 앞줄 첫 번째 우리의 개를 보니 이미 적응훈련을 위해 목에 쇠줄이 감겨 있었다. 문을 열자 개가 요동을 치며 튀어 올랐다. 주인인 이씨가 목줄을 힘껏 잡아챘는데도 여간해서 개의 움직임이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간의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잠시 후 개가 소란을 멈춘다. 하루에 몇 차례 받아야 한다는 적응 훈련. 15일이 너무나 길다.

▲ 처음 밖으로 나온 개. 한참을 요동치다 가라앉아 있는 상태. 4월 6일 현재.
ⓒ 전경옥
뒤쪽 우리를 보니 목에 쇠줄이 없다. 우선적으로 앞쪽의 개들을 풀어주고 뒤쪽의 개들은 나중에 순번을 받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뒤쪽 개들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좀더 기간을 앞당길 수는 없을까.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절실할 뿐이다.

▲ 뒤편 우리에 있는 개. 아직 목에 쇠줄이 없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이미 이씨가 조금씩 개들을 빼내 왔지만 첫 번째 줄 맨 끝 우리에는 아직 두 마리씩 개들이 들어가 있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자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철망을 물어뜯고 옆의 개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이 분쟁과 싸움이 언제나 그칠 수 있을지.

▲ 싸우고 있는 개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개집을 조립하는 사이 다른 개들이 있는 장소로 올라갔다. 옆에는 공원 조성을 위해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고 소음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일부 개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산위 나무에 묶여 있는 개들도 여전히 보였다. 그 개들에게는 언제나 집이 생길까. 지난 봄비가 개들에게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 태어난지 15일 된 새끼들. 4월 6일 현재.
ⓒ 전경옥
그 와중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있었다. 태어난 지 15일 된 새끼들. 이 새끼들은 아무 일 없이 건강할 수 있을까. 매년 이어지는 행정기관과의 불화와 철거 집행. 어떤 상황도 이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을 듯하다.

허준형 회장은 장수동 사건에 이어 산곡동 사건의 개들을 책임지고 치료해 왔다. 허 회장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개농장 사건의 원인에 행정기관의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법적 집행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살아있는 생명을 옮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물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허 회장은 인천시에 앞으로 있을 행정집행 시 수의사협회의 자문을 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문제는 인천시 만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서도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있다. 물건이 아닌 이상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데에는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 공터에 모아놓은 개집. 총 50개. 4월 6일 현재.
ⓒ 전경옥
12시경. 개들의 적응훈련이 끝나면 하나씩 고정시켜 놓을 개집이 다 모였다. 총 50개. 개들의 적응훈련과 치료를 도와주시겠다는 수의사도 있다. 개집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는 와중에 지나가던 주민이 묻는다.

"이러다 완전히 여기에 정착하는 거 아니예요? "

짖는 개소리와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냄새. 주민들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귀중한 생명이 어찌 될지 물어주는 고맙고 정다운 말투가 그립다. 또 다시 쫓겨나면 개들은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장수동 사건에서는 동물단체가 범법자가 되었고 산곡동에서는 수의사들이 사비를 털고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예산 마련을 위한 항목을 법적으로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공원관리소 측 주장. 대한민국의 법은 너무도 무심하다. 살아있는 생명을 구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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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유다복음, 기독교 질서 뒤흔들 뜨거운 감자인가

 

 

 

외전 유다복음, 기독교 질서 뒤흔들 뜨거운 감자인가
에수의 지시로 유다가 배반했다는 기술에 대한 논쟁 격화
입력 :2006-04-07 11:00   뉴스앤조이 방철섭 기자
최근 실전(失傳)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유다복음이 공개될 예정이어서 논란을 부를 전망이라는 보도를 보았다. 유다복음은 30년 전 이집트의 골동품 시장에 나온 것으로 지금 스위스 메세나 고(古) 미술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4월 6일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다복음은 1-2세기 경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 靈知主義)의 한 분파인 가인 파(Cainites)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그리스어로 된 것을 4세기 당시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콥트어로 번역해 파피루스에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다복음은 주후 2세기경 예수의 성육신 사건과 육체적 부활 부정했던 영지주의라는 초대 교회의 이단 종파가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정경은 물론 외경에도 들지 않는 신빙성 없는 문서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개된 유다복음의 내용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이고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위해 유다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계없이 무작정 따라가게 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에 있어서 유다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다복음서의 주장대로 만일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다의 배반 여부에 관계없이 인류 구속 사역을 얼마든지 이루어 가실 수 있는 주권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이지만 만일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인류 구속 사역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요셉을 높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창 37:5~11)이 요셉의 형들의 음모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 반드시 필수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들의 악역은 요셉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만일 요셉에게 훈련이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말고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고, 다른 방법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계없이 무작정 따라가게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악역을 하기로 예정되었고 그 예정에 따라 그저 악역을 했을 뿐인가 하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판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사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들은 자유 의지로 그 일을 선택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한 가지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기도 하면서 한편 인간의 자유 의지 가운데 선택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벌카워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요셉의 형들은 머리를 짜내 계교(計巧)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하고 질투심 많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지평을 밝게 비추셨다” 카슨은 말하기를, “요셉의 사건은 한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다른 한편 하나님께 로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기 위해 악한 행위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선을 이루신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이는 요셉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창 50:20).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자유 의지를 따라 행하게 하시면서도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褓)의 물과 같이 움직이신다고 했다. (잠 21:1) 때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마음속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그르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강제로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 하게 하신다.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로봇처럼 움직인다고 하는 표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 동생을 팔아 넘겼던 요셉의 형들의 선택, 예수님을 사형 언도했던 빌라도의 선택,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선택 역시 모두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유다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선정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실 맨리는 “이(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는 신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성경은 신비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신비는 더 높은 차원의 계시나 조명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편 50편 21절을 보면 “내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지도록 섭리(攝理)하신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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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예수요구로 배반”…유다복음 일부 공개 /김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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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
유물론은 물질개념 탈피 ‘외부에 의한 사유’로 재해석
노동계급과 구분해 ‘프롤레타리아 되기’ 주장
오염된 마르크스주의 재구성 작업의 결실
“불온함으로 또다른 불온함 촉발 기대한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관련기사]

▲ 이진경은 탈근대주의를 거쳐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와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를 펼친다. 사진 왼쪽부터 자본주의 비판의 거두인 칼 마르크스, 서구 근대이성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프랑스 탈근대 사상가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세계자본주의체제를 ‘다중’의 자율주의 운동을 통해 전복할 것을 제안했던 이탈리아 정치철학가 안토니오 네그리.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구성체론’ 20년만에 ‘미래의 맑스주의’로 사유 큰매듭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도서출판 그린비)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년),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년), <노마디즘>(2002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이진경의 지적 이력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
포기하지 않는 혁명의 꿈 ‘코뮨주의’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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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강금실 출마선언은 한편의 연극”

 

 

 

진중권 “강금실 출마선언은 한편의 연극”
7일자 <경향> 칼럼 통해 “관조 이론 넘어 실천의 삶 사는 선언” 평가
입력 :2006-04-07 15:00   이응탁 (et-lee@dailyseop.com)기자
▲ 시사평론가 진중권씨(자료사진) ⓒ2006 데일리서프라이즈 박항구 기자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출마선언에 대해 “희곡의 대사를 인용하는 등 한편의 뛰어난 연극과 같았다”고 풀이하며 “현실 안으로 뛰어드는 실천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또 “강 전 장관의 출마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선거전 패러다임의 변화”라며 “그가 화려한 보라색을 실천의 색으로 갈아입은 것은 사회가 색깔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영상문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7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강 전 장관을 ‘여성 파우스트’로 비유하며 이같이 밝혔다.

강 전 장관 출마선언, 실천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

그는 강 전 장관이 출마선언 자리에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라고 밝힌 것에 대해 희곡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 접근해 유혹하며 던진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강 전 장관이 이런 말을 한 이유가 “한마디로 서재에 처박혀 현실의 밖에서 관조만 하는 이론(theoria)의 삶이 아니라, 현실 안으로 뛰어드는 실천(praxis)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라고 진씨는 밝혔다.

그는 “사실 현실과 거리를 둔 지식인형의 인간에게 정치권이 보내는 러브콜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과 다름없다”며 “파우스트처럼 강전장관도 악마의 유혹에 제 영혼을 맡겼다”고 덧붙였다.

진씨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가 가진 마법의 힘을 빌어 현실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것이 마치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려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의 체험을 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며 “가상과 실재, 정치와 오락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정치는 날로 ‘폴리테인멘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여당의 후보가 출마선언을 당사가 아닌 극장에서 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정동극장까지 걸어가는 강금실 이벤트는 탄탄한 드라마투르기에 입각해 짠 한 편의 뛰어난 연극을 방불케 한다”며 “출마선언을 하면서 희곡의 대사를 인용한 것 역시 연극적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역시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라며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한 것이 박근혜라는 여성 정치인이었듯이, 위기에 빠진 열린우리당 역시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모양이지만 이 구원은 여당만의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의 구원이다”고 주장했다.

강 전 장관의 화려한 보라색, 선거전 패러다임 변화 반영

진씨는 이와 함께 선거전의 패러다임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가 문자와 문자의 대립이었다면, 2006년 선거는 문자와 영상의 대립이 될 모양이다”이라며 강 전 장관의 출마 선언에서 이런 것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낡은 문자문화와 새로운 영상문화. 미래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라며 “게다가 우리의 정치도 서서히 살기 위한 저개발(低開發) 정치에서, 놀기 위한 과개발(過開發) 정치로 이행하고 있잖은가”라고 반문했다.

진씨는 “문자에는 색깔이 필요 없지만, 영상에는 색깔이 필수적”이라며 “색깔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상문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잿빛 이론의 색깔을 벗고 화려한 보라색 실천의 색으로 갈아입은 우리의 여성 파우스트. 그의 앞에는 이제 정치라는 악마가 펼쳐줄 마법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며 “오늘날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법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영상의 테크놀로지다”고 밝혔다.

그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는 법이다’ 역시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인데, 인간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잿빛 이론의 밖으로 나와 여러 오류를 범했던 파우스트 박사. 생의 마지막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앗아가려 하나, 신은 그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금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정치라는 악마의 손에 떨어질까? 아니면 신의 손으로 돌아갈까? 시민이라는 이름의 신들은 그의 영혼에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릴까?”라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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