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비판사이

2007/07/31 00:24

*거의 모든 경우 진보넷에 단시간내에 아무 글이나 끄적대는 편이기 때문에 생각없이 개인사를한탄하는

 

내용성없는 글이 많다.

 

 처음에는 그러한 것을 조금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진보넷이라고 해서 꼭 진지한 내용의 정치적 의견을 구색에 맞게 올려야 한다는 내적인 억압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글의 길이와 내용의 구체성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포스팅하는 블로거들도 많기에 나 역시 스스로 구속받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시간을 그렇게 자유롭게 쓸 만한 심적 시간적 여유가 없고 고민의 깊이도 깊지못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대한 의견이 있다고해도  글을 쓰기위해 많이 생각하고 또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하면 또 거기에 대한 재반론을 준비하고 하는 것을 별로 벌이고 싶지가 않았다.

 

 또한 그 외에도 내가 그런 얘기를 잘 쓰지 않는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지만 이것은 뭐랄까 조금 내밀한 얘기이기 때문에 비록 이 포스팅을 보는 이 중에 오프라인의 나를 아는 사람이 아주 소수일지라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마음속에 하고 싶은 얘기를 그냥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릴지라도. 

 

 

 

 



I.  고민의 계기

 

  나는 감정을 별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다.

 내가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인은 내 가족중에 한 명이 꽤 히스테리컬 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성장기에 큰 괴로움을 주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나는 겉으로 보기에 꽤나 차분하게 또한 기쁘거나 분노하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냉정한 듯 행동하도록 길러졌다.

 

 물론 사적인 관계에서 내가 냉정함을 잃을 정도로 감정적이 되면 꼭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대체로 남들보다는'   사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편인것 같다.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보니 평소에는 말을 함부로해서 남에게 상처주는 일은 없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대신 자기 내면에 억압이 많아지고 또한 감정들이 쌓이면  한번에 터뜨려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가며 날카롭게 얘기하게 되는 아주 좋지않은 단점이 있게 된다. )

 

 내가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사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다.  감정표현이 너무 자유롭다든지, 직선적으로 말하는 타입 말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 난 네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라고 말했을때,  나같은 사람은

 

 " 음.... 어떤 점에서 잘못됬다는 건지 말해봐."  라고 반응하는데

 

 " 왜? 내가 뭐가 잘못됬는데? 니가 한 말도 틀리잖아?==33" 하고 눈 똥그랗게 뜨고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감정이 얼굴이 드러나게 말하는 스타일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기는 나에게

 

 매우 어려워진다.

 

   이런식이니 대학에 들어가서 저학년때, 사람들과 세미나를 하거나 서로 의견을 얘기하거나 할때 충돌이 있으면 나는 논리적으로 대화하지 않는 사람의 말에는 반박도 하지 않고 아얘 대화를 피해버렸다.  지금이야 적당히 정치적으로 얘기할줄도 알고 내 의견도 좀더 형성된데다가 대화자체에서 내가 기분상하지 않게 대화하는 방법을 알게 됬지만 그때는 그런줄도 모르고 내 의견을 말했다가 선배들의 따발총같은 언변(?) 의 공격을 받거나 감정적인 성격의 사람이 내말에 감정적으로 발언해서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 사실 냉정 어쩌구 하는 것은 조금은 핑계이고, 공격받기를 싫어하는 아집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II. 대화의 원칙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일이 내 맘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타인과의 논쟁에 더 많이 노출되면서  살아야 되겠다 싶어서 조금씩 대화의 방식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그 대화의 원칙이라면, 구체적으로 체계화 해본적은 없지만 지금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다.

 

 1. 감정적인 사람앞에서는 되도록  얘기를 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얘기를 하더라도

위험하거나 민감한 주제는 피한다.)

 

2. 나 조차도 제대로 의견이 형성되지 않거나 대세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싶으면

그 자리에 당장 말하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서 평소 고민을 해본적이 있을만한 지인과

얘기를 나눠본 후에 논리를 갖추고나서 나중에 대화에 재돌입한다.

 

3. 자기 반성능력이 없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절대 동의할수 없고 폭력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왠만하면 반박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4. 나자신이 배우고 깨지기 위하여 하는 대화의 대상과, 필요한 일을 해결 하기위하여 하는 대화

대상을 따로 구분한다. (또한 정서적으로 나를 대상과 분리한다)

5. 공격의 상황과 설득의 상황을 구분한다.

6.  자신이 지적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상대로 얘기하거나  내가 더 권력을 가진 입

장일때에는 (예를 들면 한참 어린후배) 언어를 그 사람 입장에 맞게 순화하여 사용한다.

 

 4번같은 경우, 예를 들면 세미나 같은 상황은 내가 배우고 깨지기 위하여 대화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다소 정리되지 않은 의견이라도 노출시키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외에 썩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한다든지 정치적으로 나와 충돌이 있을만한 사람이거나 기타 내가 대화를 통하여 대화를 하여도 딱히 얻을 것이 없이 기분이 나빠지거나 대세가 나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이 될 것 같을때는 굳이 내 의견을 표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사실은 좋지 않다. 그러나 사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취하게 되는 방식이고 나 역시도 어릴때에는 그래도 이런 방식을 별로 택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습관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대화하는데 있어서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습관이 커진것 같다. 골치 아픈것을 피

해도 나 자신이 원할때에만 논쟁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아마 필요한 일을 하기위하여 하는 대화에서 조차 타인과 정서적으로 분리 됨으로써, 배우고 깨짐을 위하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III. 소수자적 정체성

 

또한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얘기는 소수자의식과도 깊은관련이 있는데, 사실 사람의 소수자적 정체성이란 굉장히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마디로 말할수가 없는것이다.   어떤 이는 맑스를 읽으며 경제적인 억압에는 민감하지만, 사실  성장과정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열등한 위치에 한번도 놓여본적이 없는 엘리트 일수도 있고 어떤이는 레즈비언으로서 겪는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겪어야하는 무한한 차별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기도 하다.  어떤이는 이것저것 왠만한 것에 대해서 여성주의건, 좌파적 관점이건, 생태주의적 입장이건 이해하고 배우려는 훌륭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실생황에서 늘 준거집단의 주류적 의견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반골적인 성향 을 가지고 혼자서 다수를 대항해서 반박해야 하는 외로운 늑대(?)의 삶을 모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공부나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소수자를 다양하게 이해하는 상냥한 마음씨를 갖고 있지만, 여성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애초부터 거부감을 갖고 대하기도 한다.  어떤이는 운동한다는 이름으로 걸쳐있으면서 그저 여성은 제도적으로 권익이 신장되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면 된다는 의식에 만족하며  자신이 일상적으로 여성들에게 일정한 성적역할을 요구하며 대상화하여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역시 모두가 알고 있는 얘기겠지만) 어떤 사람이 지지하는 정당, 참여하는 단체, 어울리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그 사람들의 성향을 그룹지어주는 것은 있지만 사실 그 수면위로 나오는 행위들을 하게 된 그들의 내면적 경험이란 매우 다양한 종류의 것이고 결코 그 드러나는 양상으로 국한하여 볼수만은 없는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에 나열한 사람들이 소수자가 아니고 어디에서나 메이저리티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위에 말한 이들중에 어떤 이들은 계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감성으로 다른 형태의 타인의 억압을 '피부로' 느끼는 것 까지는 태생적으로 어렵더라도 그야말로 ' 그 사람만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는 관용'을 배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게 바로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겸손' 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양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찌끄레기 같은 것들이 아무데서나 다양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곤한다. 무슨 비판만하면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는식으로 현실의 권력관계에 대해

 의문제제기하는 것을 아얘 차단하는 식으로)

 

 나같은 사람도 사실은 한가지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어서 상상력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내가 A라는 면에 있어서 절실히 느끼는 소수자 일지라도, B라는 입장의 소수자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심정적으로 상황을 상상하여 마음으로 동감하는 것이 어렵다고 몇년전까지만 해도 자주 생각해왔고,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이런 내가 할수 있는 것은 B라는 사람이 아얘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내가 상상으로 인하여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는 정체성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너무 심정적으로 동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다가 아얘 포기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완전히 느낄수는 없어도 ' 얘기되어져야 하는' 형태의 억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고 살다보면 사람의 식견이라는 것이 넓어져서 B의 상황을 '피부로'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 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도 사실 쉽지 않고, 사실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를 공격하면 사람이 감정적으로 되기 쉽기 때문에 내가 공격하는 상대방도 어떤 상황에 있어서는 소수자적 위치에 처해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이 충분한 반성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격보다는 설득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바로 위에 말한 5번이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그 사람이 자기 반성적 능력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 설득' 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코 자기 반성적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대상이라면 그 상황에서 최대한 상대방의 논리의 헛점을 잡아서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백분토론에서 시민논객으로 나가서 내가 반론을 제기하는 대상인 패널을 설득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거기서는 그 패널을 설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상황이 연출이라는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인신공격이 아닌이상 논리적인 지적으로 상처를 좀 준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공격과 설득 중 어느것을 더 비중있게 요구하느냐를 생각해보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움직이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바로 위의  ' 전반적으로 소수자를 다양하게 이해하는 상냥한 마음씨를 갖고 있지만, 여성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애초부터 거부감을 갖고 대하는'   이는 나의 친한 친구중에 한 명인데 그녀에게 논리적으로 비판을 하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나를 그 여성주의자들의 ' 한패' 로 집어넣어서 ' 그래, 너네는 가방끈 긴 페미니스트 들이니까 탁상공론이나 하지.'   이런식이다.  (음, 이 얘기는 좀 망설여지지만;;; 그녀는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살면서 소외를 많이 겪어서인지 그녀가 모르는 어려운 이론을 섞어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르치듯이 얘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사실 그녀는 평소에 '그런 페미니스트' 들을 미워하면서 오히려 '만족' 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그녀의 그런 태도가 정 마음에 걸린다면 ' 가방끈 짧은' 이들의 입장에서 잘 대화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나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기회가 되면 소개시켜줌으로써 그런 그녀의 편견을 바꿔보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정도의 성의가 있다면 말이다.) 사실 그녀의 태도에 동의할수는 없지만, 심정적으로 그녀가 그렇게 느끼게 된 연유도 충분히 이해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같은 경우는 사실 대상이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수자적 감수성'을 이해할수도 없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얘  그 사람에게서 사적인 감정을 분리 시켜버린다.  그리고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함께 하는 그야말로 '일을 위한 관계' 가 될것이다. 이것이 위에 얘기한 4번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수자적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씨가 내게도 길러진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 일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글쎄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내게 있어서 중요한 ' 그 소수자적 감성' 이라는 것을 이미 타인도 그 문제점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아량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다른 점에 있어서 사적으로 이미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아얘 내 머릿속에서 ' 저 인간은 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기득권자' 로 규정하는 것이 더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이건 내 경험에서 나온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내 판단이 맞을때도 있지만 그렇게 그를 내 마음속에서 명명하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하기도 한다.  그럴때는 그냥 그 사람의 그런면에 대해서 보지 않으려고 하기도 한다. 이럴때 역시 마음의 연대는 썩 가능하지 않다.

 

 

 III. 결론

 

 남들은 다 이미 생각해본 당연한 얘기(?) 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한데,  나 나름대로는 한 사람이 A라는 면에 있어서 소수자라 할지라도 B라는 면에 있어서 소수자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할때 한 가지의 주체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와 결합하고 변화하며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할때의 나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상태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사회에서 무슨활동을 하든, 다양한 형태로 운동한다는 사람을 많이 접할텐데 그 사람들이 다 내맘에 들고 내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소통할수는 없을테고, 그런 이들과 함께 하는 방법을 앞으로도 계속 모색해야 할것같다.

 

 운동하는 사람은 선량하고 사려깊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한적이 있는데, 나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운동하는 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 선량하다' 라는 것도 어찌보면많은 정치적인 의미를 띄고 있기 때문에 ' 선량함' 을 기대하는 것도 매우 자의적이고 정치적이다. 나 역시 선량한 사람이 아니고 또 앞으로 세파에 찌들다보면 더욱 선량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다. --;  그러나  자기반성적 태도를 버리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아직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아파지는 것은 한가지 문제만 생각하기에도 복잡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자기 반성과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기도 하다. 때로는 자기 반성을 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삶을 사는 이들을 잠시 그냥 놔두는 것이 진정한 이해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 또한 나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서 나와의 대화를 차단하지 않고 나의 문제를 지적해주기를 바라기도 하듯이 타인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이 진정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상황에 따라서 다르고, 사실 발화의 방식에 의해서도 상대방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많이 다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도 더욱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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