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3년전부터 학교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이는 시험공부에 돌입하면서, 또 지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외롭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얘기를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심각한 신변의 문제가 없었음에도 그런
일상적인 문제가 나를 상담센터와 가깝게 만들었다. 그래서
상담선생님과 나는 어느새 친한 친구보다 더 자연스럽게 일상을 터놓는사이가 된 것이다.
(물론 나--> 상담선생님 이렇게 일방적으로)
2. 나의 상담선생님은 40대 초반이고 여성분이시다.
선생님에 관해서라면.... 음 일단 외면적으로 유쾌하고 강단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사려깊음과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물론 있으신것은 물론 상담심리를 전공
한 사람이 대부분 가진 주요한 특징일게다. 세상풍파를 어느정도 겪으시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거칠고 닳고 닳은 느낌이 아니라 노련미와 성숙함을 갖춘 인생의
선배처럼 느껴지기에 신뢰감을 가질수 있는, 전형적인 인생의 선배의 여성의 유형
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선생님의 외면적 성격의 특성 외에, 그 사람의 내면적
가치관 내지는 숨겨진 성향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내담자인 내가 선생님을 대하는
심리는 오히려 좀더 복잡해졌다.
3. 내가 사람을 대할때, 그 사람의 정치적인 견해가 나의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를 많이 좌우
하는 편이다. (이건 어떤이는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이는 편파적이라고 비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겠냐 싶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견해란, 단순히 어떤 정당을
지지하느냐로 소급되는 문제는 물론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인간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 현재의 사회체제나 주변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
관심사는 어떤것이냐,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가치를 향해 가기 위해서 현재 어떤 길을 택하여 가고 있느냐 이런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 는 급하락 한다. (물론, 모든 부분에 있어서 다 민감한것은 아니고, 아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가지 부분 - 소수자적 감성이나 여성주의적 감성, 주류적
인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는 자세, 쉽게타협하느냐 혹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나가
느냐의 여부, 혹은 삶에서 '소외' 를 얼마나 경험해왔느냐 이런것들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렇게 추상적인 언어들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저 나의 느낌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의 호감도가 너무나 빤한 것들에 의하여 뒤바뀌는 상황은 나조차도 스스로
의 태도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이건 주관의 문제이냐, 아니면 내가 편협한 탓이냐?
내가 좀더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할 일이냐, 아니면 누구나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냐 하는
갈등일게다.
.그러나 몇해전부터 나는 이렇게 결정했다.
"나는 편협한 사람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편협하게 살 것이다. "
라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내가 편협할정도로 기울게 된 그 가치들과, 그 가치와
상충하는 가치들은 세상에서 같은 비중으로 존중받고 있지 못하고, 존중받고 있지 못한
자의 박탈감은 때로는 정당한 것이다. 그 박탈감이 반드시 상대에 대한 호의로 드러나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가진자들이 만들어낸 도덕일게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편협함을 스스로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이지, 윤리적의무감을 가지고 나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지 않게
되었다.
4. 상담선생님을 알아온 3년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유쾌하고 강단있으면서 진지한
그녀의 성품이 더 눈에 익었고, 사실 그녀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386세대이고,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고, 여성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식의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서는 알았지만 그 이상의 것들은 알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좋았다. 내담자가 상담자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고민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지 못하고 상담자가 허용하고 이해할
수 있을만한 틀 안에서 고민의 스토리를 주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나같이 편협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까 말했다 시피 상대에 대한 호의가 뒤바뀌고 나아가 상담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담선생님께서 얼마전에 학내 경찰 진입문제와 학내 교육투쟁과 학생회에 관한 견해를
어느정도 밝히셨고, 그와 더불어 촛불집회등 제반 정세에 대해서 나와 완전히 배치되는
견해를 가지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을때, 나는 어느정도 선생님에 대한 인간적인 친밀감을
잃고 거리를 두게 된 것 같다.
그건 선생님이 나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신다는 것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글쎄,
" 우리나라가 유럽처럼 정해진
이들만 대학에 가는 체제로 바뀔수밖에 없기 때문에, 높은 등록금이 된다면 결국 대학이란
선택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수가 없다"
라는 식의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나 교육자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라 느껴졌다. 또는 문제해결
을 위하여 자발적인 움직임을 꾀하는 이들의 노력보다는 구조에 의한 결정을 중시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인간들의 몸에 밴 권위적 자세가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실망이었다. 선생님이
운동판과 평생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인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민중의 움직임이나 입
장에 대해서 체념적인 자세인것이 내게 쉽게 용납되는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일이다. 쓰읍-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총학생 회장이 외부 촛불집회에서 학교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고 문제삼으신 것은
결국학내 문제 해결보다 학교 명예를 위한 단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싶어서 씁쓸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식의 얘기 아닌가. 이런 얘기를 내가 좋게 생각
하는, 학교 선배이자 신뢰하는 지인에게서 들어야 하나.
5. 선생님의 그러한 세계관을 알게 된 이후로, 나 역시 선생님의 가치관에 나의 사고와
일상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게 된 탓인지, 상담에 있어서 정작 털어놓아야 할 얘기가
무엇인지 방향을 찾지 못하고 겉도는 얘기만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선생님이 내담자인 나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시고 해결
책을 내놓으신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약간은 신뢰를 잃은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나와 당신은 다른사람이고, 내 삶의 문제에 본질적으로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코멘트를 당신은 해줄 수 없소' 이런식의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본질적인 얘기
를 털어놓을 수 없게 되다보니, 피상적인 얘기를 하게 되고 또한 그에 대한 선생님의 피드
백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보니, 오히려 불필요하게 자기노출을 했다 싶어서 약간 자존심
상하는 측면도 있다. ' 굳이 안들어도 될 충고를 들었구만. 얘기하지 않는게 차라리 나았
을걸'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이 문제를 본격적
으로 털어놓아서 해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더 골치만 아플뿐더러, 어차피 선생님은
곧 다른 학교로 직장을 옮기실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인연이 대학안에서 맺은 인연중에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선생님과 나와의 인간관계에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다
싶은 것이다.
거리감이라고 얘기하기도 뭐하고, 불편함이라고하기도 뭐한 감정아래, 씁쓸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뜨뜻한 유대감과 애정을 잃지는 않은 반면 자기노출을 꺼리는 formal한 형태로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변형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관계의 변형에 대해서 크게 서운하지는 않은 채로, 오히려 자연스럽게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나 자신의 정체감에 대해서 더 독립적인 단계로 옮겨
갈것 같은 느낌이다.
Comments
그때 그 홍차각 선인장이 지금은 두배로 자랐답니다....
리우스는 머리 식히고 싶을 때 동네길 산책하는 거 좋아요... 읽는게 아니고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읽는 건 골치 아프니 머리가 식을 수가 없쟎아요...
뭐하고 살아요? 블로그 통계를 보다가 한 번 들렀다 간 것 같아 글 남겨요.물론 나도 종종 여기 마실오긴 하지만서도... 후훗. 조만간 티스토리에 구축중인 블로그로 옮길지도 몰라요. 그러게 된다면 소식 전하죠. 건강합시다.
블로그를 이전했습니다. www.zzacnoon.net으로 종종 놀러오셔욧.
리우스/ 홍차각 선인장을 아직도 잘 키우고 계시다니 기쁘네요...(전 그게 사실 홍차각 선인장인지도 몰랐답니다) 저는 머리식힐때 사실 여러가지 상상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현실과 상상속의 자아가 분열되는 것 같아서 좀 걱정되요.ㅎ
비디아/ 블로그에 한번 들린건아닌데. 근데 누가 남겼는지 자국이 남나요?
오징어땅콩이 들르지 않았다면 아마 이 블로그에 왔던 누군가가 클릭을 해서 내 블로그로 들어왔기 때문에 흔적이 남는 거겠죠. 통계란 것이 있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고... 어느 블로그나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다 정도만 알 수 있어요. 네이버에서는... 그냥 심심할 때 한 번씩 들여다 보다가 우연히 봤어요. 뭐 암튼 이제 네이년은 안하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소년가장 입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기상! 기상! 아침이다! 빰빠라빠바밤!”
오늘도 어김없이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알람시계를 잠에서 덜
깨어 비몽사몽인 채로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껐습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씻고, 교복을 갈아입고, 밥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 아침 6시 45분입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지만 아침 일찍 학교 가는 것을 즐기는 지라 언제나
저의 등교 시간은 이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왜 이렇게 싱글벙글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피곤함이
없진 않지만 왜 이렇게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지. 그건 아
마도 지금의 저에게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궁핍한 그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고급스러운 옷과 장난감들로는 부모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언성을 높이시며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방 한구석 침대 모퉁이에 동생과 함께 머릴 손으로 감싸며 움츠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저는 겁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부모님의 불화(不和)에 내성이 생겼던 겁니다. 그런 저는 마음이 착하고 여린 여동생과는 달리 반항을 하고, 고집을 부리고, 친구를 때리는 등 못된 아이로 모습이 변해갔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고작 9살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정은 깨어졌고, 저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 이렇게 세 사람만 가정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발버둥치며 저희와 살아가려고 밤낮으로 일하러 다니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지만, 그게 엄마에겐 큰 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마께서는 시름시름 앓으시는 일이 많아지셨고, 누워계시는 날이 많아지셨습니다.
그 해 11월 병원에선 엄마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위암말기였습니다. “3개월 남았습니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엄마 곁에 함께 있었던 저는 담당 선생님께, “그럼 우리 엄마 죽어요? 왜요? 왜 우리 엄마가 죽는데요! 우리 엄만 나쁜 짓 안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왜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저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얘야 나도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단다. 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미안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제가 살리고 싶다고 해서 살고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겐 죽음도 쉽게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투병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암은 위는 물론이고, 장, 간, 이자, 폐 등 모든 몸속의 장기에 전이되어 손을 쓸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독한 항암치료로 인해 밤낮으로 토하고,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신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계속 저희를 떼어 내려고만 하셨습니다.
“엄마라고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요.”
이렇게 친척들에게 말씀하시며 우셨던 모습을 전 뒤에서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에게 정을 떼시려고 일부러 모질게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해 3월 4일, 유난히도 날씨가 짓궂던 그 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전에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아님 저희 남매끼리 홀로 살아가야 할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눈물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와 동생 둘 만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를 못했습니다.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12살, 9살 이 어린 두 아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잠이 많은 남매는 일찍 자건 늦게 자건 항상 늦잠을 자서 학교를 지각하기 일쑤였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탈도 많이 나고, 학업은 늘 밑바닥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러 2003년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를 얻어 어학연수를 1년 동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세대에게 주는 특별한 기회였지만 1년의 어학연수가 저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1년 동안 동생 미영이는 한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생활을 했었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저도 귀국 후에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아이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댁 자녀 어느 아이도 자기주장을 고집 부려가며 내세우는 아이가 없었는데 유독 전 제 주장이 너무나도 강하고 막무가내라 여러 사람들에게 눈물과 상처를 줬습니다.
그런 저의 단점들을 목사님 사모님께서는 강점으로 다듬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저를 위해 좋은 멘토들까지 붙여주시며 저를 위해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때는 어린 철부지였나 봅니다. 이런 사랑 속에서도 언제나 문제는 제가 일으켰습니다.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말투와 이기적인 행동들로 인해 동생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어린 동생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갔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못남투성이인 저를 놓지 않으시고, 모난 네모를 둥글둥글한 동그라미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정말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두세 달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신 다음엔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기 위해 선생님을 붙이는 등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첫 성적은 반에서 40명 중에 17등이었습니다.
정말 바닥을 헤매던 제가 다시 그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목사님과 사모님 덕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기죽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 위치를 찾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길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우는 전형적인 또래 남학생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난 지 4년째입니다.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제 뒤에 계시는 두 분으로 인해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위탁이 끝난 상태지만 저희 남매는 여전히 목사님 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저를 친아들처럼 귀여워 해 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전보다 시간의 여유는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눠주십니다.
전 『방송국 PD』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을 화제로 두 분께서는 언제나 많은 조언을 해주십니다. 이것저것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도리 같은 것들을 지적해 주시고, 세상을 보는 눈과 따뜻하게 사람을 볼 수 있도록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가 PD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또한 두 분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두 분의 영향으로 저도 방송이라는 매개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고, 희망찬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PD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든지 등교 시간은 이르고 하교 시간은 늦을 것입니다. 저 또한 하교 시간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늦어졌고, 더군다나 전 학교 독서실이 조용하다는 이유로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에 늦게 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볼 때면 한 편으로는 죄송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행복해.’
목사님 가정을 만나기 전에는 저는 이런 것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행복이 정상적인 가정의 또래 친구들에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제겐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내색하지 않고, 강한 척 했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집, 암흑 그 자체의 집으로 들어갈라치면 한없이 작아지고 비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전 행복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부자라고 해서 꼭 행복하지는 않고, 가난뱅이라고 해서 꼭 불행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과 감사가 있다면 아무리 백만장자라고 할지라도 부럽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선 전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높은 성적이 아닌 중간 정도이지만 저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제가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여 당당하게 제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제 모습을 두 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다듬어 나가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 눈 팔지 않고 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가 꿈꿔왔던 일이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물론 두 분이 제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에 반드시 꿈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않은 제 자신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랑들을 받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도 마음도 한 해 두 해 다르게 성장하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자라나는 마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보답이라는 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또 한 번 감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저이기에 보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이 세상에 저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받았으니 당연히 저 또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제 마음 속 깊은 곳의 사랑까지도 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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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