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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8

사무실 앞에는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건물 같은데, 좀 특이하게 생겨서 내맘대로 일제시대 때 지었나부다, 생각하길 몇 해.

어젠가 담벼락 앞에 파이프가 놓여져 있길래 여기도 철거하려나, 갸웃했는데...

오늘 출근길에 보니 건물은 이미 형체를 잃어버렸다.

 

잘 가, 하고 인사도 못 했는데 어제오늘 사이에 마치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건물이라는 생명체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뒤꼍의 나무들도 곧 베어질까...

도서관을 찾던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 자리엔 멋대가리 없는 5층 짜리 새 건물이 올라오게 될까...

그 건물엔 빈틈없이 작은 방이 들어차 갈 곳 없는 청춘들을 가두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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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머니.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래도, 라며 지난 2주 동안 부지런 떨기도 하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 미약한 노력이 한 순간의 게으름, 혹은 판단 실수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니

지칠까 말까 하던 몸은 완전히 늘어져 버리고

버틸까 말까 하던 마음도 다 달아나 버렸다.

 

무거운 카메라와 무거운 트라이포드를 이고 지고

버스 안에서 시달리다 마로니에에서 내렸다.

허깨비처럼 휘청이며 걷는데, 내 앞에 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할머니가 까만 주머니를 흔들며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가 한 걸음 떼는 순간,

말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그 할머니가 주머니를 흔들며 구걸을 했던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엔 천 원짜리가 쥐어져 있었다.

속이 쓰려서 오뎅이라도 하나 먹고 들어가려고 꺼내든 지폐다.

되돌아가 그 주머니에 천 원짜리를 넣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길 옆에 가 앉으려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동전 몇 개랑 주머니를 양 손에 든 할머니.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원래는 돌아가서 주머니를 채워드릴 생각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타이밍이.... 그랬다.

 

결국 오뎅집은 그냥 지나쳤다.

속이 많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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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duele amarte / reik

 

흠. 이 노래도 아주 많이 듣던 거. 특히 여행 초기에.

인터넷 까페에 나오길래 카운터에 있던 이쁜 언니한테 물어봐서 제목이랑 가수랑 알게 됐다.

널 사랑해서 아파, 라는 제목. ㅋㅋ


Me duele amarte
Sabiendo que ya te perdi
Tan solo quedara la lluvia
Mojando mi llanto
Y me hablara de ti

Me duele amarte
Los sueños que eran para ti
Se pierden con cada palabra
Con cada momento que espere vivir
Me duele mas imaginar
Que tu te vas y dejaras
Detras de ti
Tu ausencia en mis brazos
Me duele tanto sospechar
Que ni tu sombra volvera
Para abrigar
Mi alma en pedazos

Me duele amarte asi
Hasta morir
Lanzandome a la nada viendote partir
Me duele aquel Abril
Cuando te vi
Por vez primera y dije que eras para mi
Me duele amarte tanto

Me duele amarte
Los sueños que eran para ti
Se pierden con cada palabra
Con cada momento que espere vivir
Me duele mas imaginar
Que tu te vas y dejaras
Detras de ti
Tu ausencia en mis brazos
Me duele tanto sospechar
Que ni tu sombra volvera
Para abrigar
Mi alma en pedazos

Me duele amarte asi
Hasta morir
Lanzandome a la nada viendote partir
Me duele aquel Abril
Cuando te vi
Por vez primera y dije que eras para mi
Me duele amarte tanto
Me duele amarte ta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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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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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뒤로 소설책이 넘어갔다. 아직 10장 밖에 안 읽은 닉 혼비 소설. 1월에, 오빠가 책 3권으로 나를 꼬드겨냈었다.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지 말라면서. 그 때 얻은 새 책인데. 아아아악. 세탁기가 너무 무거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책아, 미안해. -> 어군이 와서 꺼내줬다. 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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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처방에는 의존성이 없다고 해서 항우울제를 타왔다. 스트레스가 시작되기 전에 먹으라는 의사의 처방이 있었지만, 그냥 버텨보려고 안 먹고 있었는데 먹어야겠다. 가만 앉아 있는데도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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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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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살다 보니...

집에 좀 늦게 들어가게 되면, 술기운이 얼굴에 발그레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나는, 술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술에 과하게 취한 사람들도 싫어한다.

다른 이유보다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건 실은, 아이를 싫어하는 이유와도 같다.

 

오늘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죄다 발그레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얼굴들이 어딘가 애틋해 보이기도,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그 얼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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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새 황사 때문이라지만, 난 봄하늘이 이렇게 칙칙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

차라리 쨍하고 깨질 것 같은 차가운 겨울하늘이 그리울 정도다.

스모그로 가득한 크리스탈에 갇힌 기분이다.

오전의 사무실 느낌도 그랬고, 거리를 걸을 때도 그랬고,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그랬다.

 

요즘 나의 화두는 나를 어떻게 책임지지? 하는 건데,

머릿 속 마저 황사로 가득한 것 같다.

문제점도 빤히 들여다 보이는 사보험에, 더 나이 들기 전에 가입해야만 하는 것인지, 일전에 본 카드배달 할아버지가 나의 미래는 아닐지, 그러다가 심지어 나는 자살을 하게 될까 사고사 하게 될까 병사하게 될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사람에게든 세상에든 애정이 많은 사람이고, 아마 나의 가장 큰 원동력은 그것일텐데... 나는 내가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건강하고 밝게 살고 싶은데, 사실 지금 활동하는 공간을 택한 이유도 그래서인데... 참 쉽지 않은 조건투성이다. 살면서 점점 뭔가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게 보이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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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참 잘 잤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고, 새벽에 깨지도 않고, 그래서 피로도 쌓이지 않고 그랬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계속 이럴 수만 있다면, 아프지도 않을 텐데. 꾸준히 일할 수도 있을 텐데. 약봉지에 눈길을 줘야 하나. 오늘따라 자신이 없어진다.

 

돈 많이 안 벌어도, 결혼 안 한 여자라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

난 이명박 정권이 무섭다.

그래서 당장, 보험을 들어 말어?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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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제 XXY라는 작품.

아르헨티나 갔을 때 인상깊게 본 영화인데,

여성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네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염색체가 XXY인 청소년 이야기...

 

어떤 결정, 이나 화해, 같은 섣부른 결말로 정리해 버리지 않고..

주인공과 친구들, 부모 등 주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 좋았던 것 같아요... 

(대사는 거의 못 알아들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

더 자세히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기회 닿는 분들은 보시라는 말 정도만..

 

10대인 두 주인공도 참 연기 잘 하고 멋지지만, 

주인공의 아부지로 나오는 리까르도 다린이라는 남자 배우도 멋져요..

아르헨티나의 국민배우래요..

 

감독은 루시아 푸엔조 Lucia Puenzo(스페인어로 하면 뿌엔소가 맞을 듯.)라는 젊은 여성인데, 오피셜 스토리 만들었던 루이스 뿌엔소 감독의 딸이예요...

<고래와 창녀>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이 영화는 별로라던데... 아무튼...)

 

미리 강추. 근데 영화제는 한 달 뒤던가? ( ..)(.. )

 

http://www.wffis.or.kr/wffis2008_grand/program/pro_read.php?sang_no=846&code=119&round=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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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통화하고선.

엄마가 심심한 모양이다. 하긴 아기가 제 부모 품으로 돌아가는 대략 밤 8시 이후, 자유시간이긴 하지만 TV 말고는 벗이 없으니 심심하기도 할 거다. 이제야 내 여행사진을 찾는다. 블로그 주소를 가르쳐 주려 하니, 엄마 그런 거 할 줄 몰라! 하고 딱 자른다. 주소창에 주소만 치면 된다니까, 라고 말하고 나니 그제서야 엄마가 그걸 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10분 정도 자판 위치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했고,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한글이라면 좀 쉬웠으려나. 그나저나 지금쯤 실컷 사진을 보고 있겠군. '섹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포스트가 하나 있는데, 다른 단어로 대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걍 뒀다. 안 읽겠지 뭐. 혹은, 읽어도 괜찮겠지 뭐. 이미 엄마랑 난 5년쯤 전 콘돔 얘길 했던 사이잖아? ㅋ 물론, 다만 콘돔 얘기일 뿐이었지만. ㅡ.ㅡ 요는 피임이 아주 중요하다는 거지, 경험 유무에 대한 확인은 주제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엄마들이 재미있는 건, 예를 들어 자기 딸이 담배를 피우지 않길 바란다면, 가방 속에서 담뱃갑을 발견해도 그게 딸래미 물건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거다. 아직도 엄만 내 자취방이 금남의 집이길 바라고 있을까? 한 친구의 어머니는, 친구의 언니가 연애질하느라 밥 먹듯 외박을 하는데, 정말 이틀 건너 한 번씩 야근한다고 믿었단다. 결혼할 때까지도.

 

우리 엄마도 그러려나? 엄마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엄마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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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도시 / 쓰네카와 고타로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일단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같은 환상의 공간.

그 세계와 연결된 자들의 슬픈 운명이 당신을 기다린다.'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자의 <바람의 도시>를 읽었다. 어군한테 배운 바로는, 이런 걸 병행세계라고 한단다. 그리고 <스노우 크래쉬>라는 소설에 나왔던 메타버스(meta+universe=metaverse)라는 게 가상현실 그러니까 virtual reality를 대체하는 좀더 진화된 개념인 모양인데, 세컨드 라이프니 뭐니 요즘 실제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런, 정말 시대에 뒤떨어져 있구나. 쩝. 근데 꼭 이것저것 다 해야 하나? 훔. 이러다 곤조만 부리는 늙다리가 되는 걸까?

 

<바람의 도시>에는 '고도'라 불리는 신의 영역에 속한 세계가 현실세계와 병존한다. 12살 짜리 소년 하나가 일곱 살 때 우연히 들어갔던 고도의 기억을 떠올리곤 친구와 함께 들어갔다가 겪는 일들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오...... 재미있다.

 

가상세계가 됐건 로봇이 됐건 뭐가 됐건, 그 세계를 작동하는 원리들, 금기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게 참 재밌단 말이야. <고도>의 소유물은 인간세계로 나갈 수 없다거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거나.. 아시모프의 로봇 제3원칙 같은 거. 매트릭스의 전화기 같은 거?

 

일단 든 생각은, 일본 아이들은 참 이런 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재주가 있다는 것과 그게 가능한 역사/문화적인 배경이 있을텐데 그게 뭘까 궁금하다는 거. 난 일본 호러 소설이나 만화를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영화만 봐도 <링>이니 <검은 물 밑에서>, <기묘한 이야기> 같은 거 보면 참 그렇잖아? 뭐, <바람의 도시>의 병행세계와는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그리고 저자 소개를 보니, 대학 졸업하고 프리터로 살다가 호주 오토바이 여행 좀 하고 알바 좀 해서 국내 오토바이 여행하고 그러다가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 소설을 썼다 하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일본 여관에 장기투숙하면서 살사나 탱고 배우러 다니는 일본 아이들이 생각났다. 봉봉 언니가 일본의 '하류인생'은 우리나라에서 쓰듯 막장인생 같은 개념이 아니고, 부에노스의 아이들이나 사회에 편입되길 거부하고 프리터처럼 그런 삶을 선택하는 부류를 말하는 거라고 했다. 훔. 드는 생각은 많은데, 그냥 여기까지.

 

아, 하나만 더. 병행세계라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계급에 따라서든 국적(보다는 사는 곳)에 따라서든, 사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상 그 외의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현실 자체가 병행세계의 합이라는 말이다. 내 삶의 거죽을 들어내면, 모든 것이 고도의 삶일 터.

 

'이것은 성장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변화도 없고 극복도 하지 않는다.

길은 교차하고 계속 갈라져 나간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이마처럼 혼자 걷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끝없는 미로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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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1.

서울에 올라온 후로 토요일 오전은 청소하는 날이다. 빨래, 설겆이, 방청소, 쓰레기통 치우기 등등.. 빨래 널고 앉으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적당하다. 좀 있다가 점심 차려 먹으면 되겠다. 근데 10분에 한 번씩 배가 아프다. 이런. 일어나자마자 만들어 먹은 딸기쉐이크가 또 속을 뒤집어놨나 보다.

 

2.

참 오랜만에 세 시간 짜리 회의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 힘들었다. 게다가 안 해도 될 소리는 왜 했는지. ㅡ.ㅡ 뭐, 사무실 사람들은 내가 소심하고 자신감 없어 하고 애가 좀 어리고, 그런 거 대충 다 아니까 별로 창피할 것 까지야 없지만, 회의는 최대한 냉정하고 건조하게, 라는 기조를 잡고 있었는데, 이게 뭐란 말이냐. 역시 말도 안 되는 기조를 잡았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보련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내 자신감 없음이 나는 물론이거니와 누군가들의 기운을 빼놓게 될까봐.. 여리여리하고 물렁물렁한 내가 쫌 많이 싫다.

 

3.

이음아트에 들러서 신간만 잠깐 둘러봤다. 천운영 소설이 있었는데, 긴축재정 중이라 사지는 못 했다. 하긴 아직 읽고 있는 소설도 여러 권이다. 계산대 앞에 보리랑 녹색평론에서 나온 책들이 있길래 제목을 훑다가 보라색 표지를 한 소설을 보게 되었는데, 제목이 <라일락 와인>이었다. 음, 음. 이거 몇 년 전에 파일로 읽었던 모 선생님의 소설이랑 제목이 같네? 하고 책날개를 펴 보니 활짝 웃고 있는 선생님 얼굴이 콕 박혀 있다. 음. 아주 활짝은 아니었던가?

 

4.

나는 동숭동에서, 아빠는 개포동에서 각각 자취를 한다. 엄마의 명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생각은 하긴 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아빠랑 데이트를 해야 한다. 이런. ㅡ.ㅡ 하늘공원 같은데 나들이 한 번씩 가고 밥 한 끼 얻어먹고 때로는 아빠네 건넌방에서 하루 자고 오고 그래야 하는데, 많이 귀찮다. 머릿 속이 안 바쁘면 좀 나을 텐데, 여러 가지 나의 조건과 주변의 조건과 모든 것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라 어제 아빠 전화에도 간다 만다 제대로 답을 못 했다. 우욱. 아무튼 멀찌감치 떨어져 사는 게 장땡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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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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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과 낮>을 보러 들어가다가 우연히 후배를 만났다. 3일 연속 10년 전 기억들과 대면했다. 사람들과 소원해지면서 자연히 영화판 이야기들과 멀어지는 듯하다가도 불쑥불쑥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영화 하고 싶어지면 다시 돌아오세요.. 그 '다시'라는 말이 어색했다. 내겐 단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을 뿐이니까. 그 시절과 결부된 그리움이 있을 따름이지 미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단 3일만 선택을 미뤘어도 영화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2004년 3월 초가 떠오르는 정도? 참 많이 달라졌겠지만, 궁핍하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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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던져준 초대권을 가지고 반 고흐전을 보러 갔다. 예상했지만, 이건 뭐 전시장이 아니라 도떼기 시장이다. 애초에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심지어 앞에 선 사람들에 가려 작품의 아우라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고흐의 작품에서 강렬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니. 12000원 입장료에 값하는 감상을 위해서는 하루 입장객 수 제한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여러가지 의미에서 유난히 규모에 집착하는 이 땅의 척박함에 대해서도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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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메일을 쓰지 못 한 건, 바빠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피차 마음 편한 일이므로 부정하지 않을 뿐. 다만 익숙한, 그의 움츠린 어깨가 떠올라 미안한 마음은 든다. 일주일에 한 번 메일 쓰기, 라는 공식에 누구도 길들여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건 한계가 명확했던 그 한 달 반이면 족했다. 한 때, 지금은 켜지도 않는 엠에센 메신저에 결박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거기서 겨우겨우 벗어났을 때 나는 살 것 같았다. 다시 그런 류의 습관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언제라도 받아줄 마음이 있었던 내 대화명이 화석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대화명은 점 하나로 바뀌어 사라져 버린 뒤, 내 가슴에 불던 스산한 바람을 기억한다. 며칠 간 계속 되던 배앓이에 당신 어머니가 했다는 말. 네 머리 위로 나쁜 바람이 불고 있구나. 그 바람이 당신에게 향하길 원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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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니 토드>를 조용한 새벽에 봤다. 그리스 비극과 닮았다.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파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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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에는 눈이 시원한 샷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밤인데도 낮 같은 파리의 여름은 불면의 세계였다. 경계가 없는, 그리하여 애초에 탈출이 불가능한... 관계란 그렇게 답답하고 또 답답한 것이었던가? 그 수컷과 암컷들을 보고 있으니, 일요일 한낮의 주주클럽과 뭐가 다를까 싶어졌다. 덩달아, 지나가는 개들마다 쫓아가 똥꼬 냄새를 맡던 발정난 수캐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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