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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청정에너지 개발을 부르짖다. - 부시의 에탄올 에너지

 

부시, 청정에너지 개발을 부르짖다. - 부시의 에탄올 연료

                                                                                      노동자의 힘 97호

미국의 부시는 대통령은 1월 31일 국정연설을 통해 미국이 ‘석유 중독증‘에 걸렸다고 비판하면서 중동의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또 2월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내 생전에 중동에 대한 석유의존을 끝내거나 줄일’ 것이며 특히 6년 내에  청정에너지 연료로 평가받는 에탄올 생산기술을 실용화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6월에 이미 미국 의회는 에너지 법안 하나를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은 가솔린 공급자는 현재 30억 갤런에서 2012년에 이르면 연간 80억 갤런의 에탄올을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석유자본가 집안의 부시가 이러한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보고 있노라면 돈을 위해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지만 이후 크게 뉘우친 놀부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놀부의 뉘우침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은 왜일까?



 

석유에 중독된 미국


서방 정부는 거대 석유 자본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미국정부는 1930년대부터 석유와 자동차 자본의 음모에 따라 전차(전기 자동차)는 물론 대중교통수단 모두를 축소했다. 결과적으로 10명중에 9명의 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 2억대 이상의 자동차가 미국 내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결국 미국은 마약중독자와 같이 해마다 더 많은 석유를 공급받지 못하면 살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마약중독자는 마약이 끊기면 심한 타격을 입고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1973년 아랍국가의 석유 금수 조치와 1979년 이란 혁명에 의한 공급 중단 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은 서방 국가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석유 공급을 위협했다. 이들 국가 중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나라는 전 세계 오일의 25%를 사용하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석유 공급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질수록 석유를 생산하는 아랍이나 남미국가에 대한 정치공작을 증대시켰다. 이들 국가의 부패 관료들은 자국의 석유 시설을 미국 자본가에게 헐값으로 넘겼고, 산업 인프라는 미국식으로 석유 의존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필요한 자금은 미국에 빚을 내어 충당하였다. 자국 원주민들은 땅을 강탈당했고 이 정책을 비판한 민주인사들은 감옥으로 보내졌다. 아마존의 열대 우림은 헐벗기 시작했고 강과 바다는 오염되어 버렸다. 그들은 마치 고이율의 사채를 빌려 쓰고 장기매매를 기다리는 노동자와 같은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라크 침공만으로는 해답이 아니었다.


미국은 아랍 국가에 대한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은 여전히 석유공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가격이나 생산량을 통제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아랍국가의 국가 주도형 석유산업을 민영화 시키는 것이 이후 중동지역에 정치적 미래를 통제하기 위해 중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시 정부는 이라크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석유는 노동자의 노동 강도를 높인다고 더 많이 생산되는 그런 종류의 상품이 아니었다. 1970년 이후 미국 내 석유 발견량은 이미 소비량의 1/3 이하의 수준이었다. 새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더 깊이 매장되어 있고 발굴이 어려운 지역이고 그 양도 작아서 더 많은 비용이 필요 했다. 아랍과 남미 국가도 예전처럼 녹녹하지 않다. 이라크를 침략했지만 아직까지 저항이 거세고 인접국 이란 역시 반발하고 있다. 17%의 석유를 수입을 수입하고 있는 남미의 베네수엘라에는 '참신한' 좌파 정권이 들어서 버렸다. 또 하나 중국의 산업 발전은 전 세계 석유 수급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부시, 대안에너지 찾아 나서다.


이와 같이 부시는 환경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에탄올과 같은 청정에너지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청정에너지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특히 에탄올 연료는 청정에너지의 탈을 쓴 수소에너지(기관지 노힘 59호 참조)나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와는 차원이 다른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에너지원임에는 분명하다. 


에탄올이란 정확하게 에틸알코올이라 불리는 물질로 식용으로 제작되면 술이 된다. 제조과정도 술과 동일한데, 사탕수수나 옥수수와 같은 식물을 발효, 증류해서 만들어진다. 에탄올은 가솔린처럼 태워야 하지만 산소를 다량 포함하고 있어 가솔린과 섞어 사용하면 이산화탄소(일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또 에탄올 분자는 석유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탄화수소보다 분자가 훨씬 작기 때문에 더 완벽하게 연소된다. 문제가 있다면 배출되는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물질은 대기 중에서 오존의 광화학적스모그의 생성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 분야의 선두 주자인 브라질은 자국의 막대한 사탕수수 생산량을 바탕으로 에탄올을 대량 생산해서 자동차 연료의 40%를 대체하고 있고, 미행정부는 에탄올 정제회사에 1갤런(약 3.8리터)당 51센트의 세액공제 혜택을 주어 가솔린과 혼합해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 작년 여름 새로 입법화된 '종합 에너지법'도 에탄올의 이용촉진을 유도하고 있다.


환경운동가, 청정에너지 공장에 반대하며 분신자살하다?


작년 11월 브라질의 환경운동가 프란시스코 안셀모 바로스 (Francisco Anselmo de Barro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대인 판타날 (Pantanal)지역에 에탄올 공장 건설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다 온몸에 가솔린을 뿌려 분신자살했다. 환경운동가가 청정에너지 생산 공장을 반대하다 분신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자본주의 에너지 시스템에서 이 청정에너지가 환경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로 브라질에서는 대량의 에탄올을 목적으로 대규모 사탕수수 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지역에만 2개의 공장을 설립한 바 있다. 이 과정에 식량생산 경작지가 감소하였고, 농토를 빼앗긴 소농과 소작농이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사탕수수 경작지는 숲을 태워 확보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사탕수수 공장에서는 식물 비료 생산과 수송 과정에서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였고, 발효시키고 세척하는 과정에 배출되는 엄청난 양의 폐수는 하천과 토양을 심각하게 오염시켜 버렸다.


판타날의 지역 중 165,000㎢ 넓이를 갖는 그리스보다도 넓은 지역이 원시 지역이다. 이 지역은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의 유량을 조절하는 스펀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650종의 조류, 190종의 포유류, 270 종의 어류 및 1,100종의 나비가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에탄올 대량 생산을 위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하면 망한다.


자본주의 철학은 아주 단순하다. 항상 시장 하나만 생각한다. 또 모든 것을 따로 때내서 개별적으로만 생각한다. 에너지 문제는 이미 자본가의 생존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고, 전 인류의 문제로 되어 버렸다. 그런데 바로 이 점 즉, 전 인류의 문제라는 점은 자본가에게는 새로운 ‘시장’으로 보인다. 확신컨대 부시의 청정에너지 정책에는 시장만 고려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도 삼성이나 LG와 같은 대기업들이 앞을 다투어 대안에너지인 태양전지 개발을 시작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데서 찾을 수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면 좋은 것이다. 어떤 상품이 시장에 주목받으면 그 상품의 고유의 특성은 무시되며 교환 가치만 중요시된다. 자본의 눈에는 환경과 인간은 없다. 만약 청정에너지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이것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 놓기 위해 모든 기술을 집중시킨다(과학기술자의 노동 강도를 극도로 높인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파괴되는 환경의 문제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본이 하면 어떤 한 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다른 모든 시스템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브라질의 사례는 이점을 잘 설명해준다. 청정에너지 개발 문제는 청정에너지 자체만 봐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 에너지 시스템을 건드려야 하는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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