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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과학철학 II

[‘노동자와 과학철학I’은 현장에서미래를 제113호(2005년 11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번역]노동자와 과학철학 II

[원문]http://easyweb.easynet.co.uk/~socappeal/philosophy/chapter6.html 

현장에서 미래를  제119호

비엔나(Vienna) 학파

 

1차 세계대전 이후, 루돌프 카르냅(Rudolph Carnap)이 이끄는 비엔나 학파는 승리의 환호 속에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 학파를 출범시켰다. 그들은 "철학은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세상에 선전하였고 이후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상표가 붙은 철학은 "과학적 방법"을 독점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철학자에게 자칭 과학 철학의 용어를 엄격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들의 교리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즉시 비과학적인 것으로 선언되고 더 심하게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선언되어 어둠 바깥으로 버려진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빨을 갈고 으르렁거리면서 소위 과학 철학으로 다져진 최고의 지성으로 맑스, 헤겔, 프로이드,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성 오그스틴 그리고 모든 완고한 형이상학론 대가들을 비난하고, 또 그들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냅은 지각(perception)에서 시작해서(<<세계의 논리적 구조, The 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 1928) 의미론(<<언어의 논리적 구문론, The Logical Syntax of Language>>, 1934),으로 간 다음에 논리학(<<의미와 필연, Meaning and Necessity>>, 1947)에서 끝을 맺고 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clear thinking)"를 목적으로 1922년에 <<논리 철학 논고, Tracticus Logico-Philosophicus>>를 펴내었다[1](여기서 확실한 가정은 이전에는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의 품질 보증 마크는 상당한 겸손이라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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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논리 철학 논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철학의 목표는 사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 연구는 본질적으로 해명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많은 '철학 명제'가 아니라 명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유의미한 논술은 a)논리학과 수학의 형식적 문장과, b)특수과학의 사실적 명제 중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2) 사실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언표는 어떻게 그 언표를 검증할 수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3) 1)의 두 부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언표는 무의미하다.

4) 도덕적·미학적·종교적 가치에 관한 모든 진술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그래서, 이 몇 줄의 문장을 기준으로 이천년 인류의 사상을 아무런 노력 없이 버려 버린다.

만약 논리 실증주의의 이 작은 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냥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나 나폴레옹(Napoleon)이 치룬 모든 전쟁은 단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이다. 또 신과 악마, 변증법적 유물론, 심리학적 분석,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테레스(Aristotle)의 저서, 스피노자(Spinoza)의 저서, 성경, 코란과 토라(Tohr)[2]도 역시 모두 아무 논란 없이 버려야 할 것들이다.


히틀러(Hitler)의 집권 후 카르냅과 그의 동료들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미국에서 그들의 사상은 상당한 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다양한 이름의 논리 실증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고 있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논리학에서 인식의 문제로 돌아섰고 마지막에는 단어와 기호(심벌)를 가지고 노는 불모지 어문학으로 끝을 맺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적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것이다. 뜻이 좋다고 결과까지 좋다는 법은 없다! 뒷문으로 대범하게 버린 것이 즉시 창문으로 들어와 버린 꼴이다. 그들은 관념론자들의 형이상학과 공평하고 정당하게 싸우지 않고 (이것은 진정한 과학적 방법론인 유물론적 입장을 일관되게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다) 철학적인 핑계꺼리를 찾았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태도는 잘하면 불가지론이나 부끄러운 얼굴을 한 일관성 없는 유물론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주관적 관념론의 늪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첫 번째로 마주치는 치는 것은 극단적인 사유의 빈곤, 협소한 형식주의, 실제 내용 부제, 전체적인 전망에 대한 지적 비급함이다. 인간 사유의 진보, 특히 과학의 진보는 위대한 사상가(과학자)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끊임없이 도전한 결과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사상가(과학자)들은 그 당시에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스 시대에도 뛰어난 원자론자이며 이론가들이 많았는데, 과연 그들이 당시 기술로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자론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자들도 [논리 경험주의자들처럼] 데미크리토스(Democritus)와 에피크루스(Epicurus)의 [원자론을] "의미 없는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했을 지도 모른다. 


논리 실증주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습관적으로 맑스주의가 여러 정치적 분파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가지고 비웃는다. 그러나 이 상황은 논리 실증주의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의 옥스포드를 근거지로 무어(G. E. Moore)는 지식이론과 윤리에 대해 "실재주의적이고 상식적인" 접근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영국적 경향을 대표한다.


20세기 초반에 러셀(Bertrand Russell)과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당시 팽배한 여러 종류의 사이비-헤겔주의적 관념론에 반대해서 "새로운 논리학"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1910-12에 출판했다. 이것을 뉴턴의 명작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의 이름을 따서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라고 이름 지었다. "철학의 기원은 수학자들의 성과에 달려있고, 수학자들은 초라한 논리와 주체의 오류를 정화하는 일을 한다." (러셀,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p. 783) 이런 종류의 자화자찬은 논리 실증주의 전체의 전형적인 경향이었다. 그들은 과거 엥겔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는 뒤낭(Duhring)처럼 화려한 말을 많이 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진실은 머리위에 거꾸로 서 있다. 세계는 사람들의 생각들을 분석해야 이해할 수 있고, 더 심하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분석해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레닌이 이미 1908년에 비판한 바 있는 마흐(Mach)의 <<경험-비판론 empirio-criticism>>에서 보여준 낡은 신비주의를 또 만나게 된다. 러셀은 [철학의] 중심 주제를 물리적 대상이 우리의 감각 외부에 존재하는 지로 후퇴시켰고 왜곡시켰다[4].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관찰자는 어떤 한 점에서 그의 경험을 성명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가설로 물질세계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4].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물리적 대상은 감각-자료들로부터 논리적 구성을 통해 얻어진다고 주장한다[5].


언어에 대한 이러한 강박관념은 우연이 아니다. 실재(reality)가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편견과 잘 일치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예측하지 못한 사회적 변혁기 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여기에다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당시 수백만 명을 살육한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위기, 영국에서의 광부들의 파업이 있었다. 그리고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는-단어의 의미를 담은 두꺼운 사전 편찬 작업이 있었고, "완벽한"언어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다. 엘리트적인 문법을 따지는 분위기로 후퇴하고, "원자"단위로 언어를 분해했다. 이러한 시도는 아마도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존재들 [즉 주변 여건들을] 모두 무시하자!. 그러면 그리스 로마시대. 중세 수도승, 비숍 버클리의(Bishop Berkeley)의 그리고 현재 자칭 과학 철학자의 회의주의만이 남을 뿐이다. 전체 철학의 역사에서 그렇게 잘못 호칭되고 가식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들 학파 모두를 연결시켜주는 일반적인 고리가 있다. 그것은 언어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첫 장에 "태초에 말씀(Words)이 계셨느니라"고 쓰여 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문구를 약간 수정해서 그들의 슬로건으로 채택하고 있다: 태초뿐 아니라 중간과 마지막, 전부가 모두 단어(Words)의 문제이다!


이러한 경향은 항상 단어를 쓰고 말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편견에서 비롯된 결론일 뿐이다. 양분 없는 토양은 단지 연약한 식물만 만들어 낸다. 빈혈기 있는 환경 속에서는 피없는 철학만이 생산될 뿐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하찮고 혼란한 의미론이 철학을 대표한다고 여겨졌다. 한때 헤겔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작은 것에 만족하는 가를 통해 정신의 상실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단어와 단어들의 의미로 환원하는 것(의미론)으로는 관념론을 탈피할 수 없다. 단어는 사람의 사상을 표현할 뿐이다. 이러한 소위 "과학적 실재주의"는 또 다르게 변장한 관념론의 복원을 의미한다. 사실 언어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물질세계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특정 생각들이 진실과 일치하는지를 묻지 않고 주어진 단어와 문장이 우리가 표현하고자하는 생각에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만 질문한다.


여기서 다시 풍부한 철학들이 어떻게 몇 개의 말린 빵 부스러기로 환원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철학과 과학의 특별한 분과로서 언어와 의미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점을 10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언어와 의미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솔직히 엉터리이다. 이런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철학은 미국에서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오스틴(J. L. Austin), 스트로슨(P. F. Strawson) 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흐와 비교해서 유일하게 "혁신"된 것이 있다면 언어의 차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 진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서 한걸음 더 멀리 밀고가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생각이 옳은지 그런지 묻는 대신에(다시 말하면 그것이 객관적 진실을 반영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단지 주어진 문장이 의미가 있는지 여부만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논리실증주의자에 따르면 그들 스스로 개발한 임의적인 정의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축구게임을 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서 규칙은 상대편 팀만 골을 넣을 수 있게 허용하는 그런 축구게임과 같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가는 데로 규칙을 정하는 그런 축구 게임과 같다. 이것은 이상한 나라 엘레스의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6]의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하는 말은 정확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진술은 실험적으로 증명 가능해야한다(검정의 원칙)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표현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을 포함해서 철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 대부분을 같은 식으로 논의된다. 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없는"것으로 선언된다. 크리켓의 규칙처럼 "심판 결정이 최종적이다[7]" 그래서 카펫 슬리퍼는 버리지 않아도 우리는 철학의 역사 전체를 버려 버린다.


"잠깐만" 강의 실 뒤쪽에서 소리친다. "잊어 버린 것 없습니까? 신(God)이나, 칼-맑스 그리고 몇 몇 악명 높은 소란꾼들을 버리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면 수학이 영원한 진리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유클리드 기하학을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수학의 공리는 중명하지 않고 그냥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또 논리학도 그 자체로 증명되므로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에서 파동과 입자가 같다고 하는데, 파동은 파동이고(A는 A이다) 입자는 입자(not A는 not A이다)이므로 파동은 입자가 될 수 없다(A는 not A가 될 수 없다)는 형식논리학의 동일률(혹은 모순율)은 어떻게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 순간 신-실증주의 강사는 시계를 보며 점심시간이므로 수업을 마친다고 말한다. 순수한 학생들에게 그는 적절한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소위 수학하고 형식 논리학에서의 진리는 실험적으로 전혀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으로 (즉 라틴어로 "처음부터") 알려져 있고, 처음부터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의 논리에 일관성이 있으려면, 맑스와 프로이드가 그들의 검정의 원칙에 맞지 않았던 것처럼 피타코라스와 유클리드도 그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유해한 형이상학이며, 논증 불가능한 난센스이며,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으로 비난해야 할 것들 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쓰레기통에 버렸듯이 결국 형식논리학과 수학 모두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이러한 모순을 <<논고 Tracticus>>에서는 눈속임으로 재빠르게 덮어 버린다. 사기성이 있는 보험설계사의 보험에는 항상 그들의 면책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경험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수학의 진리는 "분석적"이라고 선언된다.(이 용어는 칸트에서 부터 훔쳐왔다)[8] 수학의 진리는 참이기는 하지만 "모든 독신자는 결혼하지 않았다"와 같이 동이 반복이다. 관련된 심벌의 사용을 기초로 한 상식적 차원의 진리(conventional truth)이다[9] . 이것은 어떤 의미라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했을 때, "실질적"이며, "상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들 신사는 망설임 없이 그들의 뒤를 덮어줄 뻔뻔스러운 계략을 펼친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경험 지식에서부터 나와야 한다는 교리적 주장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가장 최종 분석에서만 경험지식에서 부터 나온다" 사유의 역사는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논리와 생명력을 갖는다. 마치 초보 마술사의 빗자루처럼.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형식논리학의 법칙은 자연에서부터 도출되어 추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일단 중요한 일반화에 도달했는데, 모든 세대 혹은 개인이 [매번] 실제 시행착오를 거쳐 ("경험적으로")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할까? 자동차 바퀴를 재발명하는 것이 필요할까? 만약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모든 지식은 직접 경험으로 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 진화한 사유의 형식은 어떤 것이든 중요한 역할이 있다. 우리가 질문해야할 것은 이러한 사유의 형식이(변증법이나 형식 논리학이) 적절하게 객관적 세계를 반영하는지 여부이다. 다만, 과학철학자 처럼, 객관 세계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면 전체적인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분석 철학


그들이 구문(syntax)의 얽혀있는 덤불 속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진실로 부터 더욱더 멀어진다. 가장 최근의 "분석 철학자"들은 언어가 객관 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조차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매우 높으신 곳에 오랫동안 유영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일반 사람의 언어는 충분히 좋지 않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ideal)" 언어를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상 언어는 순수하고 정교하며 어떤 모호함도 없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언어적 분석으로 매우 유용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 분석이 인간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약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현대과학의 위기와 극단적인 노동분업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현실세계의 출발점으로 취하고 있는 실험과 실천의 과학영역(종합명제)과 수학과 논리학과 같이 소위 "연역적'이고 "선험적"인 과학(분석 명제) 사이에 날카로운 이분법이 그러하다. 복잡한 수학적 이론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 우주론과 이론물리의 경향은 실제세계를 설명하는데 점점 더 적합하지 않게 되고 있다.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면 논리학에 혁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어문학적 조사와 난해한 상징(심벌)에서는 어떤 혁명도 나오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낡은 접시를 따뜻하게 데워 약간 다른 장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수학에서 빌려온 난해한 기호로 예전의 낡은 관념들을 다시 표현한다 고해서 더 확실해 지는 것은 없다. 다만, 과학적 수도승들과 "대중"들 사이에 간극만 커질 뿐이다.


"사실"만을 고집하고 "형이상학"과 종교의 머리에다 저주를 퍼부은 바로 그 사람들이 다시 과학에 신비주의적 관념을 도입하고 있다. 언어와 구문에 대한 난해한 연구, 그리고 수학적 기호의 세계를 위해 "이상"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실제 세계와 점점 멀어져 가며 가장 지독한 관념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논리학과 수학에서는 일련의 선험적인 규칙(공리, 이론 등등)을 세우고, 이 규칙에서부터 연역적 추론을 통해 모든 것을 유도해 낸다. 그러나 언어의 발전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실제 언어의 역사 발전에 수학적인 방식을 결코 적용할 수 없다. 언어에다 수학에서 사용하는 좁고 임의적인 변수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그 종말을 예고할 뿐이다. 문법, 어희 그리고 구문은 다른 여러 현상, 예를 들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현상들이 극단적으로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로서 역사적으로 진화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논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규칙은 형식논리학과 수학의 규칙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죽은 규칙은 단어에 생명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 규칙 스스로 설명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단어와 언어에 대한 이러한 강박관념은 실제 대상 즉 물질적 진실과 더욱 멀어지게 한다. 마치 소금물로 목을 축이며 계속 목말라 하는 사람처럼 우리가 어디서 출발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 말하자면 "A, B, C를 말할 때 의미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문구에 대해 무한히 토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설사 명확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단어의 의미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확실히 유익한 실천이라 할지라도) 우리 손에 실제 일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정확하게는 중세 스콜라 주의자들처럼 바늘 끝에 천사 몇 명이 춤을 출 수 있을까하는 무의미한 토론만 끝없이 할 것이다.


결국 이 길은 점차적으로 주관주의(subjectivism)에 이르게 한다. 무어와 러셀에 의해 추진된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 는 아주 좋은 보기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각기 개인이 "아는" 것은 객관 세계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감각, 관념과 의욕이다. 이것들은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상이다. "알고 있는" 사물은 기본적으로 사적이며 개인적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언어의 발전에 있어 알려져 있는 모든 것에 반대된다. 언어는 사회적 현상이며 역사적으로 집단적, 협동적 생산의 요구에서 부터 나왔다. "사적" 언어라는 바로 이러한 설명에 모순된다. "원자론"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서 물리학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사회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적언어를 인정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물리세계를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여기서 철학은 세속화되고 진부한 것으로의 치부되며 아니면 아주 세부적인 연구에만 치중한다. 이런 의미 없고 쓸데없는 이론은 언어적 철학자들이 가장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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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2) 모세 율법, 모세 5경, 유대교의 율법

역주 3) 러셀은 외계의 사물과 우리의 의식을 매개하는 것이 감각자료이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물의 표상(表象)으로 보여지는 감각자료뿐이라고 하였다

역주 4) 러셀은 이것을 직접지(knowledge by acquaintance)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감각 자료(sense-data)가 있는데, 설탕을 입에 넣었을 때 느끼는 단맛,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의 파편,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질 때의 느낌 등이 바로 우리의 직접 경험에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이다.

 역주 5) 러셀은 이것을 기술지(knowledge by descriptions)라 불렀다. 예를 들어 책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들은 모두 기술지에 속한다. 이들은 분명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은 대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감각소여를 통해 얻은 직접지들을 토대로 그러한 대상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주 6)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벽 위에서 말하는 '달걀' 이 말은 남이 이해하든 못하든 자기가 쓰고 싶은 말만 쓴다는 뜻이다.

역주 7) 크리켓은 11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교대로 공격과 수비를 하면서 공을 배트로 쳐서 득점을 겨루는 경기이다. 크리켓에서는 심판의 결정사항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정중하게 한번 정도 문의하는 것 이상으로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로 감독관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 있다.

역주 8) 이들의 논리는 경험적인 것과 경험에 독립적인 것으로 나눈다. 경험적인 것은 반드시 검증을 통해 증명되어야 의미가 있다. 경험적인 것은 천적이고 종합적인 명제가 되는데, 이러한 문장들은 검증을 통해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경험에 독립적인 명제를 분석적인 명제라고 하는데 선천적이며 명제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명제를 분석하는 것만으로 참, 거짓이 드러나는 문장이다.

역주 9) 분석 명제는 세계에 대해 어떤 정보를 제공해 줄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명제가 아니며 동어반복일 뿐이다. 우리가 논리학이나 수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석적 명제는 이미 술어가 주어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확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명백하게 해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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