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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갈비 과학기술, 좌파도 싫어하는 과학기술
실업문제에 비정규직 문제 등 각종 투쟁들이 산적해 있는 이런 시국에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한다면? 왠지 굶어죽는 사람에게 SF소설을 읽으라고 권하는 격이지 않을까? 또 친구 중 누군가가 빅뱅(Big Bang)이나 선사시대 공룡을 연구하고 싶다고 한다면, 혹은 중력의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싶다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불쌍한 놈~”, 아니면 “집에 돈이 많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자본가들에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자본가의 닭갈비(계륵) 과학기술
세계적으로 유명한(했던) 미국의 벨연구소를 보면 요즘 자본가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1925년에 설립된 벨연구소는 ME(극소전자) 혁명을 일으킨 트랜지스터와 레이저를 최초로 발명한 곳이며, 11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한 곳이다. 처음에는 국영 AT&T사 소속이었다가, 1996년에 AT&T사가 3개의 민영회사로 분리되면서 루슨트사 소속이 되었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로 2006년에는 프랑스 통신회사 알카텔과 합병을 하게 되었다. 매 변화 시기 마다 순수과학에 대한 투자와 인원을 줄였으며, 지금은 순수과학 분야에는 단 4명만이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네이처 2008). 국내에서는 삼성종합기술원이나 LG 전자 기술원이 비슷한 역할을 담당 했지만, 요즘은 사업부의 하청 업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과학기술은 종교권력에 대항하고, 생산력 발전의 동력이 되었으며, 새로운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착취의 수단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권력의 지위가 확립되고 새로운 경쟁 상대(노동자)의 발흥을 충분히 막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본은 현상유지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때부터 과학기술의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과 주식 시장의 확산으로 자본이 단기성과에 집착하게 되면서 그 주가는 더욱 떨어졌다.
7-80년대 ME 혁명은 냉전시기 개발된 군사기술이 수십 년 동안 숙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956년에 개발된 트랜지스터가 실제 시장에서 꽃피운 시기는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개발 후 본격적으로 실용화되기까지 20여년의 숙성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본은 더 이상 과학기술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과학기술은 한마디로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것이 없는 닭갈비(계륵)의 신세가 된 것이다.
좌파도 싫어하는 과학기술
‘좌파가 언제 과학을 싫어한다고 했어?‘ 라고 반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간첩 리철진]이라는 영화를 보면, 북에서 내려온 간첩 리철진이 강도에게 공작금이고 뭐고 다 털린 후 고정간첩 오선생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선생이 다짜고짜 북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현실적인’ 요구를 하자, 리철진은 단 한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당에서 보내서 왔소”
당은 이성(과학)의 화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절대 진리를 담지 하는 신은 절대 진리를 밝혀내는 과학(혹은 이성)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도’한다는 당은 무엇이 ‘과학’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당시 과학의 특권화된 권위만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모든 정보과 권력을 독점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내놓은 ‘과학적’ 진리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자본주의가 지나면 사회주의가 된다는 식이었다. 전 세계 노동자-농민들의 구체적인 투쟁은 당의 ‘과학적’ 판단 속에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탄압받기도 했다.
이 것이 좌파가 과학을 싫어하는 배경이다. 일부에서는 그 역편향으로 과학기술의 모든 권위를 해체해 버리고, 과학기술의 독특한 방법론까지 인정하지도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성의 시대는 가고 감성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은 자본가가 바라는 변화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많은 자본과 오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이성적’ 과학기술에 투자하기 보다는 작은 자본으로 단기간 내 성과를 볼 수 있는 ‘감성적’ 디자인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듬고 가야할 과학기술!
사실 과학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적이든 연역적이든 어떤 현상을 일반화(추상화)해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반화는 각각의 상황에서 인정되는 정보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보를 종합해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해 내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경험과 과학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현실 속의 노동자-민중의 지식과 실천(혹은 투쟁)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구체적이며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연안시절(1937-1949) 모택동의 말은 아직도 시의 적절하다.
“당시의 열일곱, 열여덟 살 먹은 청년들은 [자본론]과 [반듀링론](양자역학과 상대성 원리 등을)등을 열심히 배웠지요. 청년들은 훌륭한 선생(훌륭한 과학자)에게서 배운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마르크스-레닌주의(현재의 과학기술을)를 종교적 교의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너의 교의는 똥보다도 쓸모없다”는 점잖지 못한 말을 써야 합니다. 개똥은 들판에 거름으로 쓰일 수 있고 사람의 똥은 개가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교의라는 것은 들판을 비옥하게 할 수도 없고, 개를 먹일 수도 없지요. 그게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괄호속의 말은 필자가 삽입함)
흔히 과학기술은 생산력이면서 생산관계라고 한다. 이 말은 과학기술이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은 싫다고 회피할 수도 없으며 회피해서도 안 된다. "과학(기술)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들이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어렵다고 상아탑 속에 갇히게 해서도 안 된다. 이를 위해서 “혁명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운동에서 어떤 식으로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기술)을 투쟁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리차드 레빈스)
아래글은 Kenneth Neill Cameron의 "Dialectical Materialism and Modern Science"(1995)
이라는 책을 기준으로 ,
리차드레빈스 “우리자신의과학:맑스주의와 자연-맑스주의 과학” 먼슬리리뷰 (1986)
글을 참조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변증법적 이해를 위하여
자본주의의 과학자와 사상가들은 고정되고 정적인 틀을 가지고 추론하고, 사회와 자연을 세분화해서 인식하는데, 이러한 방법으로 상당한 정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이 혼합된 이질적인 요소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상호 연관성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과학적 변증법“이다. 일부에서는 변증법을 인간의 사고 영역 혹은 사회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과학기술 영역을 도외시함으로써, 과학을 이상화 시켜 버리고, 과학 자체를 순수한 것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속에서는 자본가의 탐욕이나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보는 효과를 낳는다. (레닌이 ‘테일러 주의’를 받아들인 점) 어떤 식으로든 사회주의 정당 건설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변증법과 유물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변증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과학적 변증법은 ”실천“과 전체 운동을 밝힐 수 있는 시스템적인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변증법도 역시 전체의 한 면일 뿐이며, 진리에 이르게 하는 마술이 아니다.
∘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고 없는 변증법적 사고는 반동으로 흐른다.
∘ 유물변증법론자라면 변증법이전에 유물론이 우선적이며, 실천이 기본적이어야 한다.
실천 역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정당성을 확인시켜 준다.
∘ 변증법적 논리로만 설명이 되는 운동이나 상호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증법적 논리가 사고의 주요 토대나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 전자나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것을 변증법적인 모순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실체를 지속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엥겔스의 세 개의 변증법 “법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
2)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3) 부정의 부정의 법칙
이들 중에서 가장 기본은 제 2의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는 대립물의 투쟁 및 상호 침투의 관계가 있다. 양질전화의 법칙에서는 질로 전화하는 것이 반드시 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원자의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로 전화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탄소와 다이아몬드는 같은 원자를 가지고 있지만 배치의 차이로 인해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역시 내부에 입자들(대립물들)이 전자기력 및 원자력의 관계로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환원할 수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 속에도 역시 대립물의 투쟁과 상호침투의 법칙은 살아 있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단선적이건 나선형이건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립물의 투쟁의 관계에 의존할 뿐이다.
∘ 보편과 특수
특수한 현상들을 통해 일반적인 현상이 구축되는데, 이들 중 특수한 현상이 기본적인 것이다.
∘ 사물(things)과 과정(processes)
과정보다 사물에 대한 파악이 우선한다. 고정된 사물은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를 알기 이전에 그 변화와 관련된 사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우선적이다. 과정과 사물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차이는 존재한다. 과정만을 따로 때내서 강조하면 관념론으로 빠져들어 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왜 대립물의 투쟁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 과정의 본질로 여겨지고, 부정의 부정을 거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누구에 의해서, 신? 아니면 절대적 법칙?)
∘ 법칙이란 무엇인가?
-‘객관적’ 법칙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개념 즉 ‘주관적’ 법칙으로 볼 수 있다. 유물론자로써 자연에 내재된 법칙이란 없으며 단지 사물과 과정(반응)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은 현대 물리에서는 중력자(아직 관측되지 않은 입자)의 상호작용에 의한 반응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사회와 자연 사고 모두에 적용된다는 변증법에도 “객관적”인 법칙은 없으며, 단지 대립물의 상호 침투에서 발생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물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형식이 바로 “법칙”인 것이다. 중력, 전자기력, 계급투쟁 모두 자연의 혹은 사회의 대립물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주관적인 법칙이라고 해서, 상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법칙은 그 토대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실재와 근접해 있다. ‘객관적’이라는 의미에는 항상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의미가 따라 다니기 때문에 객관적 법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 과학은 실수를 인식하는 독특한 패턴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에서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들은 각각의 상황에서 인정되는 정보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그 구체적인 상황 자체를 가지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을 모두 합쳐 진리발견의 기초로 삼는다. 즉, 객관성은 과학이 가진 기본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편견을 갖고 세상에 맞서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의 편견이 우리의 편견과 마서는 과정이며, 다시 여러 가지 다른 편견들이 우리가 가진 편견가 맞서는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남성으로 구성된 과학 기술계 내부의 성적편견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저항에 의해서만 균열을 낼 수 있다.
∘ 현상(appearance)과 실재(본질, reality)
강물의 운동을 보면-위에는 거품이 일고 아래에는 깊고 조용히 흘러간다. 거품조차도 본질의 표현이다. 즉, 감각에 의해 보이는 세계도 그것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세계와 다를 지라도 망상이 아니라 그것도 실재인 것이다.
∘ 과학에서 환상과 관념
관념도 역시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환상조차도 실재이며 꿈도 실재이다. 꿈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러면 꿈의 원천은 무엇인가? 환상도 과학에 도움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환상의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는 음악을 모아볼 생각입니다.
I. The Internationale
1. The Internationale : Techno Version으로 부르는 The Internationale 입니다.(08.09.01)
2. The Internationale 일본의 Soul Flower Mononoke Summit의 노래입니다. (뽕짝풍입니다)
- 벌써 진보 blog에 신기섭 기자님이 소개를 했군요 :>
3. The Internationale 모음 :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이런 곳이 있네요. 인터네셔널
노래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4. 전세계에서 부르는 "The Internationale"
5. 오랜만에 올리네요(06년 7월 6일)
백창우 노래는 늘 좋습니다. -백창우의 노래편지
소, 라듐 그리고 광우병과 방사능
1922년, 은행에서 일하는 그레이스 프라이어(Grace Fryer)는 병원을 찾았다. 갑자기 이빨이 흔들리며 뽑혔고, 턱에는 염증이 생겨 부어올랐다. X-ray 결과는 참혹했다. 턱뼈가 마치 벌레먹은 이파리처럼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 같은 증세를 호소한 사람은 마을에 여러 명 있었고, 모두 야광 칠을 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그레이스가 병원을 찾기 20년 전(1902년), 발명가 윌리엄 해머(William J. Hammer)는 과학자 퀴리 부부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가 받은 선물은 라듐염 결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방사능은 새로운 과학 분야이기에, 그 위험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피에르 퀴리는 라듐을 자신의 팔에 붙여 위험성을 실험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라듐이 스스로 푸르스름한 녹색의 빛과 열을 내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한 에너지를 주는 환상적인 물질로 생각했다. 해머는 이 라듐염으로 야광 페인터를 발명하였다.
야광 페인터는 US-라듐사(US Radium Corporation)에 의해 상품화되어 1차 대전 중에 계기판 표시기나 군인들의 손목시계에 사용되었고, 민간용으로도 확대 되었다. 당시에는 라듐의 위험은 상당히 알려져 있을 때이다. 그러나 US-라듐사는 아주 미량 사용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주장하였다.
US-라듐사의 과학자는 라듐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한 라듐은 우라늄보다 100배 더 강한 것이기 때문에, 실험시 방사능 차단 장치를 확실히 사용하였다. 그러나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작업장 바닥과 벽은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심지어 여성 노동자들은 남자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술이나 치아에 바르기도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라듐은 일상화 되었고 구조화 되어 있었다. 관절염, 고혈압, 암 등의 치료약으로 쓰였는가 하면, 치약이나 화장품, 심지어 생수와 빵에 넣어 먹기도 했다. 자본은 이윤 때문에 스스로 이 위험한 거래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3년 후, 그레이스의 의사는 병의 원인으로 US-라듐사를 지목했다. US-라듐사는 콜롬비아 대학의 전문가 플린(Flynn)을 내세워 그레이스를 조사하였다. 플린은 그레이스가 건강이 아주 좋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도 아니었고, 그레이스의 “동료“를 조사한다면서 작업장에서 일하지 않았던 부사장의 감염여부를 조사하는 등 부정한 방법을 사용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US-라듐사는 그녀의 병이 방사능 중독이 아니라 매독 때문이라고 유언비어를 조성하기도 했다. 또 많은 의사들을 포섭해서 왜곡된 정보를 만들었다.
사실, US 라듐사는 이미 1920년대 초부터 하버드 생리학 교수 세실 드링커(Cecil Drinker)를 고용하여 작업장 환경에 대한 연구를 시킨바 있다. 드링커는 보고서를 통해 심각하게 오염된 작업장 실상과 노동자들의 이상 증세를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작 US-라듐사는 노동부에 가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가짜 보고서의 시작은 모든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여공들은 완벽한 조건에서 근무 하고 있다”.
그레이스와 5명의 노동자들은 US-라듐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변호사를 선정하여 소송을 했다. 재판은 2년을 끌었고, 당사자들의 병세 악화와 절박한 사정으로 회사에 유리한 합의를 해야 했다. 당시 합의를 주선한 사람은 라듐 재판의 판사이자 US-라듐의 주주였다고 한다.
방사능에서 광우병으로
현대로 오면서 라듐의 방사능은 광우병 소로 대체된다. 기업은 정부로 바뀌고 대상은 특정 노동자 민중에서 전체, 전 세계 노동자 민중으로 확대된다. 영국은 1985년에 최초로 광우병이 발병했고, 1년 뒤 그 사실을 처음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영국 보건부는 11달이나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그 후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수의학 논문지에 싣는 것이 전부였다.
1980년대 중반쯤에 영국정부는 소에게 먹인 동물사료가 광우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89년이 되어서야 뇌, 척수, 가슴샘, 비장 그리고 일부 내장을 소의 사료로 금지시켰다. 그러고 나서 다른 조직들은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러한 조치는 노동자-민중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축산업자의 이윤을 위해, 사료비 증가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영국 정부는 사이비 과학 자료와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소고기 안전에 대해 여러번 왜곡된 발표를 했다. 예를 들어 1989년에 영국정부가 발표한 사우스우드(Southwood) 보고서에 따르면 소를 광우병의 종말 숙주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에게는 위험성이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대범하게도 위원회는 “광우병과 사람의 건강과의 관련성은 결코 있는 것 같지 않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로 광우병 발생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문제를 노동자-민중의 건강의 위기로 보지 않고 어떻게 발표할 것인가의 문제로만 보았다. 영국 농무부장관 존검머(John Gummer)는 BBC 방송에서 자신의 딸 코델리아와 같이 햄버거를 먹으며"광우병 안전합니다."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광고를 촬영하면서 자신의 딸을 광우병 볼모로 삼고 “맛이 기가 찹니다.” 라고 말하였다.
영국 정부의 거짓말은 곧 바로 드러났다. 1994년 16세 소녀 비키 리머(Vicky Rimmer)는 인간 광우병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가족들에게 경제를 위해 사망사실을 공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또한 비키가 죽은 후 메이저(John Major) 총리는 "인간은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두고자 합니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편지를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다. 아무튼 첫 번째 희생자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200여명이 광우병으로 죽었거나 앓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치매로 죽어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인간광우병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이윤에 반해 전복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라면, 즉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자본가 혹은 그를 대변하는 정부는 그것이 방사능 물질이든 광우병 소든 상관하지 않고 확실하게 주장한다. ‘아주 안전하다’, 자본에 매수된 과학(자)은(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결과들을 쏟아 낸다. 그러다 실제 위험이 발견되면, 방사능 오염은 ‘매독’이 되고, 광우병은 ‘치매’로 둔갑해 버린다. 그리고 방사능물질과 광우병으로 노동자-민중이 죽어 나갈 때 까지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구조(무의식 적인 것)가 된다.
2008년, 한국의 노동자-민중은 검역 ‘주권’을 놓고 ‘미국-한국 연합정부’와 투쟁하고 있다. 주권이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권리’와 ‘전복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생산할 수 있는 권리는 생산수단이 없다면 구성하기 힘들지만 전복할 수 있는 권리는 그런 기반이 없어도 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이윤에 반해’ 전복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미국은 광우병이 발생했지만 도살된 소의 1% 미만에 대해서만 검사를 하고 한국에 수출한다. 이명박 정권은 이 소에 대해 전복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에서 넘겨주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미국소는 우리의 구조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가 된다. 그러다 광우병이 발병하면 비극은 시작될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듯 촛불시위는 이 권리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미 구조화 되어 버린 것들을 돌아 봐야 한다.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는 먹을거리들. 예를 들어 국내 소는 항생제만 해도 미국의 3배 스웨덴의 24배나 사용한다. 광우병은 발병하지 않았지만 전수검사 역시 하지 않는다. 이것들에 대해 우리는 (이윤에 반해) 전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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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1)
한국의 촛불 투쟁이 미국의 노동자-민중들의 투쟁뿐아니라 전세계의 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해본다. 미국의 광우병 정책을 비판하는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힘을 얻고 있고, 일반 신문 마져 비판적인 기사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美농무부 정신 차려라"…美언론들, 줄줄이 비난"), 대만, 일본 민중들 또한 한국의 촛불 투쟁을 지지하고 있을 것이다. 진짜로, 우리의 촛불 투쟁은 바로 자본의 이윤에 맞서 전세계 민중들을 위한 것이지 아닌가! (머찐 투쟁이다.!!)
(잡담 2) 사람들이 햇깔려 하는 것.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주장"은 한국소도 안전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에 관련된 글은 "인간광우병, 국산 쇠고기도 안전지대 아니다!" 를 참조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소의 불안정성을 미국소 수입근거로 삼는다는 점이다.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그 위험은 우리가 경험으로 명백히 확인한 바 있다. 한국 소의 위험은 "어렵겠지만" 우리 국회와 정부를 촛불집회와 같은 투쟁으로 압박한다면 집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소의 경우는 다르다. 죽어라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밤새고 .. "좀비"라는 욕을 들어 가면서 까지 아들딸 댈고 나와 시위했는데 그 결과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로 (재협상도 아니고) 추가 협상을 하러 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나마 얻은 결과는 말도 하기 싫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 왔다. 그래 놓고 90점 받았다고 지랄발광을 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일상 식탁의 안전을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소를 더 엄격하게 규정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중에 한가지라고 생각한다.
중국, 쓰촨성 지진에서 두꺼비에 부끄럽지 않은 시스템
지진을 예측한 중국 쓰촨 (Sichuan)성의 두꺼비
지난(2008년 5월) 12일, 중국의 쓰촨성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현재(5월 25일)까지 중국정부 공식발표로만으로도 사망자 6만2천664명, 실종자 2만3천775명에 이른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지진 사망자만 8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과 인접한 쓰촨성은 지진대 바깥에 있지만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의 경계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불안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1800년 이래로 16년 마다 한 번씩 큰 지진이 발생하였고 1900년부터는 평균 11년 마다 발생하였다. 1976년 지진 이후에는 26년 동안 진도 7 이상의 지진은 발생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서 첸 쥬에종(Chen Xeuzhong) 국가 지진국 책임연구원은 200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2003년 이후 지진 발생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지진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는 이상 징후가 발견되기도 했다. 진앙지 인근에서는 ‘똑똑한’ 두꺼비 떼가 지진 발생을 미리 알고(?) 이동하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무식한’ 현지 전문가는 "두꺼비 번식기로 정상적인 현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이 지진 발생 시점을 정확하게 예측한 때도 있었다. 1975년에 발생한 해성 지진 때의 일이었다. 당시 10만 명의 사람들을 구성해서 이상 자연 현상에 면밀히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진도 7.3의 대지진이 발생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해성에서 200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비슷한 규모의 탕산(唐山)지진은 예측하지 못했고, 2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국내 기상청도 2대의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있지만 불과 내일 날씨도 평균 4번 중 1번은 오보를 내고 있다. 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는 미국도 2005년에 슈퍼태풍 카트리나의 경로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무튼 중국 정부가 2002년의 과학자의 경고와 2008년 ‘똑똑한’ 두꺼비의 경고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지역주민 이주를 결정할 시점을 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 재난 경보를 난발하여, 늑대소년이 될 수도 있고 이주비용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자연 재해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해결할 수 있는 쉽고 뻔한 해결방법이 있다. 자연 재해 발생 지대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건물과 보호시설을 갖추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재해가 발생할 때는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재활과 복구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뻔한 해결 방법들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시스템이 있다.
중국의 ‘시장’ 사회주의에서의 복구와 재건
1976년 24만 명이 숨진 중국 탕산(Tangshan) 지진의 복구는 중국정부의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모든 자금과 정책에서 탕산 지진 복구에 우선권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장기간 지속적인 의료 해택과 사회 복귀 프로그램은 탕산 지역을 예전보다 더 좋은 곳으로 복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008년 또 한 번의 지진이 있었고 복구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은 1976년의 중국과 많이 다르다. 1980년 초부터 도입된 시장경제 시스템은 탕산 지진에서 힘을 발휘했던 공공의료 시스템을 파괴했다. 사설 의료 기관들이 많아짐에 따라 협동의료 시스템(CMS, Cooperative Medical system)은 점점 해체되어 갔다. 이 제도는 모택동 시절에 농촌인구 70%의 보건의료 재정을 담당하였다. 농촌에서 CMS의 해체는 바로, 의료 시설의 사유화와 의료 수가 상승을 의미했다. 2004년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쓰촨지역을 포함한 3개의 농촌지역에서 높은 의료 수가로 충족되지 못한 의료 수요가 13%에 이르고, 71%(농촌에는 90%, 도시에는 51%)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Health Affairs, 23, no. 6 (2004): 222-234 Meng-Kin Lim).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공의료에 불만(높은 가격과 불친절)으로 인해 더 값싸고 질 낮은 사설의료시설을 찾고 있다.
이번 쓰촨 지진에서도 재건계획이 나올 것이다. 탕산(唐山)대지진 재건은 엄격한 계획경제 상황에서 이뤄졌지만 쓰촨 지진 복구는 시장 경제체제에서 처음 실시하는 대규모 재건사업이다. 사유화된 의료 시설, 그리고 시장 시스템 속에서 재난 복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2005년 미국에서 생생하게 확인하였다.
자본주의에서의 복구와 재건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해서 1천800여명의 사망자와 80여만 명의 이재민을 내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지진 당일 쓰촨에 도착했지만, 세계 최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미국 군대는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는데 만 4일이 걸렸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지진직후 정치국 중앙위원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강구했지만, 부시는 당일 골프를 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과거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일본과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대만의 구조 활동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쿠바 정부가 1600 여명의 의사, 야전 병원 그리고 83톤의 의료품을 보내 준다는 인도적 제안을 무시했다.
미국의 모든 구조 노력은 근본적으로 자유 시장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보험에 가입된 사람들은 복구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노숙자로 전락했다. 심지어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는 주민들을 법 집행기관에서 총기로 위협해 다시 돌려보내는 사례도 있었다. 주민들은 굶주림에 약탈을 했고, 경찰은 약탈자를 사살하도록 명령했다.
지주, 개발자, 정치인들은 재해 지역을 이윤을 뽑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서민 주택 보다는 고급 주택위주로 재건하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지역주민들은 돌아갈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태풍에 흩어졌던 뉴올리언스 시민들 중 아직도 20만 명 이상은 외지를 떠돌거나 영영 이곳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들의 삶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트레일러에서 피난민처럼 생활하는 가족이 4만2천250가구에 달하고, 일자리가 없어 노는 사람이 태반이다. 버스운행 정상화 율은 19%에 불과하고 병원의 3분의 1은 아예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2007년 8월 상황)
관료주의와 시장시스템의 결합
중국에서도 시장 시스템의 폐해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번 지진에서 가장 큰 피해는 학교 학생들이었다. 시장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던 시기에 지워진 이들 건물들은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노후한 건축자재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는 재료를 사용하였다. 물론 쓰촨성에 들어선 다국적 기업들, 노키아, 마이크로소프트, 모터롤라 그리고 IBM의 건물들은 멀쩡했다. 무너진 것은 학교와 가난한 노동자-농민들의 집이었다. 유사한 현상이 지난 겨울 1억 명의 이재민을 낸 폭설에서도 나타났다. 폭설에 무너진 송전탑과 전봇대들은 거의 모두 1990년대 불량으로 지어진 것이었고 1950년대 계획경제하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복구가 용이하였다.
이번 지진 대책에서 중국은 미국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이 다른 점이 속에는 중앙 통제적 관료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 통제적 관료시스템은 언론을 통제하였고, 복구 작업에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조직되는 모임까지 억눌렀다. 그 결과 인민들에 의한 민주적 통제는 약화되었고, 불신은 커져갔다. 일부 구호품을 빼돌리는 관료들이 발견되자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두꺼비만큼 똑똑한 시스템
남미의 카리브 해역에는 잦은 허리케인에도 꿈쩍 않는 나라가 있다. 지난 1998년에는 허리케인 조지로 인해 인근 국가에서 6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나, 이 나리에는 단 4명에 그쳤다. 또 2004년에도 이제까지 최대 규모의 허리케인 “아이반”이 불었으나, 단 1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다. 반면 미국에서는상륙시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5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바로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의 일이다. 쿠바에는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나은 기상학자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기후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한 힘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물론 중국에서 보이는 똑똑한 두꺼비도 없다. 모든 것은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사회 인프라와 관련이 있다.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전체 인민과 국가가 철저한 계획에 따라 국내의 공동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동원된다. 마을마다 미리 준비된 대피소가 있고 또 가정의사가 있다. 이 의사들은 평소 환자를 직접 방문하면서 사회·경제적 환경을 함께 고려하여 치료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 시스템과 원활하게 연동되는 시민방위 시스템이 있다.
시민 방위 시스템에서는 피난 시에 지역주민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최신자료를 확실히 배포하고 교육한다. 그리고 자연 재난 발생시 지역 의료진들은 피난민과 함께 움직이는데, 애완동물과 수의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TV와 냉장고도 대피소로 옮겨진다. 지역 스스로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는 누가 자신의 물건을 훔쳐갈까 싶어 대피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은 없다. 만약 피해가 발생한다면 정부에 당당하게 재발되지 않은 시스템으로 복구할 수 있다. 결국 중앙의 계획, 그리고 민주적 통제가 자발적인 개인의 노력과 함께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이만 하면 중국의 두꺼비에 부끄럽지 않은 시스템이 아닐까?
/* 과겔에서 퍼왔습니다. 찔리기도 하고.. 또 시사하는 바가 크군요. */
-‘과학의 전문용어’- 오리곤 주립대학 Dyrk Schingman 씀.
수년간의 노력 끝에 나는 드디어 과학계의 전문용어들을 익혔다.
다음의 인용문과 그 실제의 뜻에 대한 해설은 과학/의학분야에서 사용하는 신비한 언어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IT HAS LONG BEEN KNOWN = I didn't look up the original reference.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던 대로 = 원전을 찾아보지 않았다.
▶A DEFINITE TREND IS EVIDENT = These data are practically meaningless.
뚜렷한 경향이 드러나듯이 = 이 데이터는 아무 의미없다.
▶WHILE IT HAS NOT BEEN POSSIBLE TO PROVIDE DEFINITE ANSWERS TO THE QUESTIONS = An unsuccessful experiment, but I still h0pe to get it published.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구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 실험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논문으로 내야겠다.
▶THREE OF THE SAMPLES WERE CHOOSEN FOR DETAILED STUDY = The other results didn't make any sense.
샘플 중에서 세 개를 선택하여 분석하였습니다 = 나머지 샘플은 해석이 불가능했다.
▶TYPICAL RESULTS ARE SHOWN = This is the prettiest graph.
대표적인 결과값들을 표시하였습니다 = 이 그래프가 제일 이쁘죠.
▶THESE RESULTS WILL BE IN A SUBSEQUENT REPORT = I might get around to this sometime, if pushed/funded.
그것에 대한 결과는 차후의 논문에서 다루어질 것이며 = 연구비 제대로 받으면 언젠가 쓸 생각입니다
▶THE MOST RELIABLE RESULTS ARE OBTAINED BY JONES = He was my graduate student, his grade depended on this.
가장 신뢰할만한 결과는 Jones의 실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 그는 내 밑에 있는 대학원생이었고, 학점을 받으려면 그 실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IN MY EXPERINCE = once
제 경험에 따르면 = 한번.
▶IN CASE AFTER CASE = Twice
여러 사례를 보면 = 두 번.
▶IN A SERIES OF CASES = Thrice
일련의 사례들을 보면 = 세 번.
▶IT IS BELIEVED THAT = I think.
…라고 추정되어지며 = 내 생각에는.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 A couple of other guys think so too.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 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생각한다.
▶CORRECT WITHIN AN ORDER OF MAGNITUDE = Wrong.
오차를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참이며 = 틀렸다.
▶ACCORDING TO STATISTICAL ANALYSIS = Rumorhas it.
통계학적 분석에 따르면 = 소문에 따르면,
▶A STATISTICALLY ORIENTED PROJETION OF THE SIGNIFICANCE OF THESE FINDINGS = A wild guess.
이 실험결과를 통계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해 보면 = 적당히 때려맞춰 보면.
▶A CAREFUL ANALYSIS OF OBTAINABLE DATA = Three pages of notes were obliterated when I knocked over a glass of beer.
데이터 중에서 입수 가능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해 보면 = 맥주를 엎지르는 바람에 데이터를 적은 노트 3장을 날려먹었다.
▶ITIS CLEAR THAT MUCH ADDITIONAL WORK WILL BE REQUIRED BEFORE A COMPLETE UNDERSTANDING OF THIS PHENOMENON OCCURS = I don't understand it.
이 현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후속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며 = 이해할 수 없었다.
▶AFTER ADDITIONAL STUDY BY MY COLLEAGUES = They don't understand it either.
동료 학자들에 의한 추가적 연구가 이루어진 다음에 = 그들도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THANKS ARE DUE TO JOE BLOTZ FOR ASSISTANCE WITH THE EXPERIMENT AND TO ANDREA SCHAEFFER FOR VALUABLE DISCUSSIONS = Mr. Blotz did the work and Ms. Shaeffer explained to me what it meant.
실험에 도움을 준 Joe Blotz와 의미있는 토론에 동참해 준 Andrea Schaeffer에게 감사드립니다 = 실험은 Blotz군이 다 했고, 그 실험이 도대체 뭐하는 건지 Schaeffer 양이 모두 설명해 주었다.
▶A HIGHLY SIGNIFICANT AREA FOR EXPLORATORY STUDY = A totally useless topic selected by my committee.
탐구할만한 가치를 갖는 매우 의미있는 분야라고 생각되며 = 학회에서 정해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연구주제.
▶IT IS H0PED THAT THIS STUDY WILL STIMULATE FURTHER INVESTIGATION IN THIS FIELD = I quit.
저의 논문이 이 분야에 있어서의 추가적 연구들에 자극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저는 그만둘래요.
오랜만에 또 잡소리를 해보자. 오늘 문득 지나가다..
[도시바의 승부사 니시다 사장 ‘DVD 전쟁’ 소니에 지고도 이겼다 ] 는 기사를 봤다. 삼성의 기관지 비스무리한 모 중앙 신문에 난 기사다. DVD 업계의 지저분한 싸움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자본들간의 피터지는 싸움으로 DVD라는 기술은 CD에서 맡보았던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다음 세대 DVD로 넘어가게 되었다.
다음세대 DVD도 역시 두진영으로 나누어 싸우고 있었는데, HD-DVD 진영과 블루레이 진영이 그것이다. HD-DVD진영에는 도시바, NEC와 함께 MS, 유니버셜픽쳐서 가 있었고, 블루레이 진영에는 소니, 마쯔시다, 삼성, LG와 함께 월트디즈니, 소니픽쳐스, 워너브라더스 등이 있다. 파라마운트가 HD-DVD에 있다가 블루레이로 이전했고.. LG는 과학기술 노동자들을 쫙쫙 쪼아 붙혀 양쪽을 다 지원하는 드라이버(이른바 슈퍼 멀티 블루)를 2007년에 개발한 바 있다. (물론 아직 시장성이 없어 개발 엔지니어들은 죽어라 일하고 욕듣고 있는 실정.., SSI-BAL 시장성이 없는 것이 노동자 책임인가? 지들 책임이지... 물론 당시 CTO는 많은 상을 받았다)
자세한 기술적인 부분은 Web.을 참조하시고, 간단하게 기술을 설명하면, HD-DVD 는 30GB용량, 블루레이는 50GB 로, 저장용량만 보면 블루레이가 앞선다. 허나, HD-DVD는 CD, DVD와 결합이 쉽고, 디스크 관리가 쉽다. 블루레이는 다 어렵다고 보면 된다.
기사를 요약하면 도시바의 니시다 사장이라는 넘이 2년간 HD-DVD쪽으로 방향을 잡고 노동자들을 꽉꽉 쪼아 붙이다가.. 시장에서 밀리자.. 하루 아침에 HD-DVD 사업을 접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가가 오르고 주주들로 부터 "니시다 그넘 참 난 넘이야~"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사에 난 그 넘 사진 쫌 봐주기 바란다... 얼굴에 기름끼 봐라~~..
허~참...
그렇다면 그 넘의 잘 못된 판단 때문에 2년간 자본간의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고 죽어라 HD-DVD 기술을 개발한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 뻔하다.. .. 구조조정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도시바 주가가 오르는 이유가 뭘까? HD-DVD 개발을 빨리 포기했기에? 과연 그럴까? 아마도 구조조정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분위기가 이렇다. 판단 잘못한 넘은.. 기름끼 좔좔 흐르고.. 그 넘 따라 가다가 X빠지게 일한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
요즘 자본가들의 구호는 단순하며 혁명적이다.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로!!!" 그러나 모든 권한과 혜택은 자본가에게!
요즘과 같이 기존 기술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는 과학기술 노동자들은 돈만 쓰는 죄인이된다. 요즘 기업들은 신좌파보다 더 탈근대 분위기를 좋아 한다. 그를은 자본에 포섭된 노동자-민중의 "욕망"에 호소한다. 이제 기술(성능)이 아니라 '뒤쟈인(design, 디자인의 오뤤지적 표현)'이 상품의 생명이다. 껍데기만 애뿌게 색칠해 놓고 그 속에 알맹이는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하청업체와 비정규직들을 네트워킹해서 쪼아 붙이면 개발완성!! (아~ 탈 근대는 네트워크의 시대였던가?). 10년 수명으로 개발된 전자 제품은 1-2년에 버려진다. 그리고 그 폐기물은 중국이나 제 3세계에 수출되어 그 곳의 노동자-민중들을 폐기물에 병들게 한다. (전자제품에는 납, 수은 등 각종 중금속이 풍부하고 폭발위험이 있는 밧데리도 있다)
좀 다른 애길 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기업은 '사적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 속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 마음대로 한다. 사기업이라는 왕국은 절대 군주가 군림하며, 과거 100년간 자본가들이 쌓아 올린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말들은 찾아 볼 수 없다. (혹시.. 주식회사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 도시바도 주식회사고 LG, 삼성 모두 주식회사인데... 그속에 어떤 민주주의가 있는지...)
노동자들이 상품 기획이나 경영에 참여한다면, 좀 나아 질까?
이 치열한 자본의 경쟁에서 노동자들이 참여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더 열심히 더 많은 일을 할 것으로 보인다. 돈 돌아가는 것도 보일 것이다. 경영참여의 목적이 이러한 것이 되어서는 초장 부터 종친다.
더 중요하게, 과거 100여년간의 자본이 구축한 구조가 있기에.. 한 기업 수준에서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순간 자본과의 경쟁에 휘말릴 것임에 명심해야 한다. 그속에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 자본이 개발한 효율적(?)인 관계, 즉 위계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관리하는자와 관리받는자가 생기고, 같은 수준에서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들 사이에 위계적 분업이 이루어 질 것이다. 새로 고용된 노동자들에게는 더 많은 착취를 강요할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면 뭐~ 새로운 부르조아(붉은 부르조아)의 탄생 정도의 의미 내지는... 아니면 '타락한 노동자 기업(?)' (요런식으로 노는 것도 재민네..)
암튼..
경영참여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 이외에 내용적인 참여(어떤 것을 생산할 것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떻게 자본의 경쟁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서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생산단위로써의 '주체'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주체의 지위라는 것이 자본가들이 향유하고 있는 성격의 지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업의 민주화는 분명 자본에 위협적인 주장일 것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 다수가 기업 경영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면 배가 산으로 가고 자본의 경쟁에 망한다고 아우성 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몇몇 맹아적 형태가 있었다. '지역사회의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 생산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과학기술'을 표방하였던 영국 루카스 항공의 협동계획 사례도 있다. 이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1969년 루카스 항공 노동자들은 비용감축을 위해 일부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려는 경영진에 맞서 그때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들은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협력해 그때까지 그들이 만들었던 전투기 엔진이 아닌 150개의 혁신적 제품을 설계하고 그중 일부를 시제품으로 내놓았다. 여기에는 저렴한 의료기구, 저연료 엔진, 도로, 철도 겸용 버스, 태양 집열장비 등 인권, 환경, 지역사회의 필요를 고려한 제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 10여년 동안 진행된 이 계획은 경영진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해고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강양구, 《녹색평론》제80호 2005년 1-2월호)
http://greenreview.co.kr/archive/80KangYanggu.htm
또 기업은 아니지만 리눅스 생산에서 이용자들의 참여도 눈여겨 볼 만하다.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속에서 자본 구조의 늪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러한 흐름을 모아 낼 수 있는 단위, 자본의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를 형성시킬 수 있는 "중장기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단위와 이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될 연결 통로 (당과 소비에트(평의회)..아직 뭔지는 모르겠다. 당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혹자는 소련의 경험을 절대화해서 평의회와 같은 조직이 혁명시기만 존재한다고 한다. 뭐~ 그럴한한 이유가 있을까? 그 조직이 대체권력의 핵심 토대라면 혁명시기뿐아니라 일상시기에도 조직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
이른 흐름을 만들어 가는 것을
"기업의 사회화"의 한 방향으로 애기하고 싶지만, 왠지 분배에 초점이 가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기업의 민주화" 하면 왠지 좀 뉘앙스가 약하다.. 뭐라 해야 할까? 주절 주절 말이 여기 까지 와버렸네..~ (어렵다..)
특근하면... 김진균선생님 동영상보고 울적해서 함 적어봤습니다.
변혁을 위한 과학기술은 존재하는가?
과학기술자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흥미 없어 하지만(이공계 기피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17-8세기 과학자들은 탤런트나 마술사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과학의 시연은 대중들에게 마치 마술과도 같이 신기하게 보였고, 또 그 기술을 이용하면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은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과학이 중세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반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흔히들 갈릴레오가 ‘지구는 돈다’라고 해서 종교재판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미 갈릴레오는 자본가들에게 종교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와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요주 인물이었다.
이렇게 자본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과학은 20세기 냉전을 맞아 더 비약적인 발전 하는데, 그것은 70년대 반도체(고체물리)를 기반으로 하는 양자역학과 80년대 광학의 발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80년대 전쟁광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은 광학을 하는 과학기술자들에게는 산타클로스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 버린 90년대 들어 자본주의가 추락하면서, 기존의 과학기술 역시 추락하고 있다. 돈 되지 않는 과학은 관심을 잃어갔고, 기존 기술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서 한계까지 왔다. 자본주의 상품은 제품의 유용성(기능성) 보다는 껍데기 디자인만 바꾸어 ‘신제품’으로 출시되고 있다. 이로 인해 그 동안 각광받았던 고학력 과학기술자들은 노동자 대중들과 같은 운명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 주주자본주의가 도입된 시기였다. 이에 발 맞추어 IT, BT NT 등이 등장하였지만, 주가와 동고동락하는 이들 기술들은 주가가 폭락하면서 순차적으로 IT가 몰락하고, NT도 몰락하고 황우석 사건으로 BT마저 몰락해 가고 있다 (아직까지 BT에 대한 기대는 크다)
과학기술을 비판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가 있다(아래 레빈스교수 글 참조). 우선 예전의 과학은 공유되었지만 지금은 특허 등으로 사유화되고 기업 의 비밀로 간주되어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과학의 오용에 대한 비판(주로 환경오염, 원폭문제)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 시민단체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고, 대립지점도 분명하며, 주로 과학기술 정책비판에 의존하였다. 두번째로 엥겔스나 레닌이 했듯이 과학기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기술의 검증 역시 과학기술계에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러한 비판을 어렵게 한다. 한번 따져보자 현대 과학기술이 과연 객관적일까? 혹시 어떤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IQ를 TEST해 보니까, 흑인 보다 백인이, 여성보다 남성이 뛰어나다는 ‘과학적’ 결과가 있다고 한다. 어떤 과학자는 범죄 유전자를 찾는다고 난리를 피운다. 또 잘 알려진 ‘주위력 결핍 장애’라는 병을 정의하고, 사회학적 치료방법을 도외시 한 채 아이들에게 마약을 처방하기도 하고, 이 마약이 ‘공부 잘하는 약’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또 기독교 신화(혹은 아프리카 원주민 신화)와 유사한 ‘빅뱅이론’은 현대 우주론의 주류이다. 또 각 나라에서 발견되는 유인원의 역사는 고무줄과 같다. 이러한 결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과학기술은 노동자-민중의 삶과 과학기술의 삶은 아주 밀접한 듯 하지만(소비의 측면에서) 아주 동떨어져 있다(생산의 측면에서). 과학에서도 노동자-민중의 ‘주권(전복할 수 있는 권리)'은 없다. 근대에서 탈 근대로의 주장을 펴는 분들은 하나의 대안으로‘이성(과학)’에서 ‘욕망’으로의 이전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과학기술에 얽혀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은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과학기술(이성)을 축으로 해서 ‘욕망’을 탐구하고 싶다. )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고민은 다음과 같다. 과학기술에 대해 앞서 두가지 측면에서 비판은 아주 중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 비판을 수행하면서, 그 대안을 찾는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역사 발전의 중요 선상에 있었다. 그 과학기술은 자연에 대한 객관성을 ‘일부’ 포함하면서도 자본주의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과학이며 과학기술이었다. 그렇다면 변혁을 생각하는 우리들, 또 이 시기에 첫번째와 두번째 비판에 자유로우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과학 혹은 과학기술, 은 무엇일까? 혹은 더 비판적으로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없다면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러한 입장에서 과학기술을 고민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학기술을 비판하고 찾는 작업들에서 소련의 ‘리센코 사건'은 소중한 교훈일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I
리차드 레빈스
현실 과학에 대한 비판
“현실에 존재하는 과학”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수준에서 진행해야 한다. 좀 쉬운 비판으로 자유주의 비판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과학은 국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공개하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사기밀이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막대한] 연구비용과 과학교육 그리고 과학 언어의 난해함은 일반 대중이 독자적으로 [과학을] 논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앞으로 과학자의 자격 증명서나 [과학자의] 염색체 같은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과학에 관한 대중적인 결정을 할 때 과학의 권위에 최종적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신뢰성은 권력 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을 줄때에만 유지된다. 과학자에게 신뢰성은 중요한 재산이다. 그런데 그 신뢰성은 그들의 충고를 정책 결정자가 잠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과학이 스스로 정한 규칙을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 보다 더 중요한 비판은 객관성에 대한 기준 자체가 종종 객관성을 유지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그 생각의 원천에 대한 기준 없이 과학 자신의 힘으로, 과학의 틀 내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논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기준인 것처럼 보이며, 기본적으로 공정한 것으로 보인다(역주- 예를 들어 과학의 공정성을 평가할 방법이 있다면, 그 평가 방법을 또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 될까?). 그러나 페미니스트 측의 과학 비판에서 강조했듯이 연구 활동에서 연구자[특히 자본주의 남성]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발견의 과정에 대한 [일종에] 사기이며 과학 논쟁을 이해하는데 장벽으로 작용한다.
인종주의자와 성차별 주의자들이 억압을 위해 [만들어 낸] 이성의 역사와 내용을 모른다면, 지식, 질병 혹은 사회적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성에 대한 논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과학 논쟁의 원천과 사회적 결과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논쟁에 해답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감정(feeling)에서 사고(thinking)를 분리해 내는 것은 과학적 활동의 필수 단계이지만 단지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될 때, 과학자들은 잔인하리만큼 초연하게 가장 살인적인 기술과 이론을 개발한다(역주-원자 폭탄 개발을 생각해보라). 과학 활동이 중립적이라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역주- 여러 가지 얻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의 실험계획을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가설)을 선언해야 한다: 억압에 관대하고, 정당화하며 그 억압을 증진시키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과학 자료, 논리, 분석 혹은 함축된 의미를 유추할 때 그 속에 결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우리들의 임무이다. [팽배한]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잘못된 방법론이 받아들여지고 잘못된 논리들이 [마치 정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잘못된 주장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것이 맑스주의가 주류 과학적 이데올로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맑스주의는] 세계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결과와 밀접하게 관계하는 실천의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당파성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인류의 생존과 해방; 그것은 어떤 문제를 볼 때, 더 넓은 맥락에서 문제를 설정하기 위해 그 문제의 경계에서 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주위를 흔들고 있는 이데올로기들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분석 목록들을 볼 수 있다. 또 맑스주의는 문제의 해결책들이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한다. 그러나 더 좋은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은 우리가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사람들이 우리의 프로그램에 얼마나 응답하는지, 얼마나 빨리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지 혹은 승리 후에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튼, 맑스주의는 과학과 공통으로 그리고 철학과 공통으로 일부 특성을 공유하지만 그것은 과학도 아니며 철학도 아니며 그리고 그 둘을 기계적으로 합쳐놓은 것도 아니다.
과학 그리고 좌파
과학적, 기술적 접근방법 역시 과학의 자기평가를 객관적 생산력으로 그리고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파괴적인 결과를 [단순히] 과학을 잘못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고, 또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진리를 왜곡한 것으로만 본다(역주- 과학 자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데, 잘못 이용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IQ평가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은 과학을 왜곡하거나 오용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과학-정치는 과학 정책으로 대치되고, 과학 정책의 임무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를 제거 하고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제거하는 것으로 본다. 같이 실린 글(“과학과 발전: 농업에서 7가지 과학 발전주의자의 미신”)은 이러한 견해가 갖는 함정에 대해 잘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기술 관료적 견해에 반대하고 저항하기 위해, 과학의 계급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오만한 측면이 강조된다. <급진 과학 저널(Radical Science journal)>로 잘 알려진 이러한 견해는 다음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과학은 사회적 관계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사회통제(social control)이다. [과학] 이론은 자연과는 관련이 없고 사회에 대한 의미만이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는 아원자 입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생산 확장의 목적은 더 이상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주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객관성은 계급 이데올로기를 숨기기 위한 슬로건이다.
페미니스트는 과학적 화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을 남성 가부장적인 측면이라고 강조하다.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미국, 에코 페미니즘 문학가)의 “비인칭 수동문“에서) 예를 들어 지배를 나타내는 표현들, 자연을 ”관통하는(penetrating) “ ”그녀(자연)로부터 그녀(자연)의 비밀을 캐내는”,”지배(conquering) “ 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격적이고 거만한 [과학의] 자세는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특히 과학이 앎을(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대중 지식, (비이성이 아닌) 탈 이성적인(역주-이성 이외의 정신작용, 즉 감성, 감정 등을 의미) 그리고 “직관적” 지식, 즉 기원은 모르지만 특정 단계에서 감정적이고 심미적이고 지적인 결론을 통합한 과거 경험에 비추어 해석되는 인식들의 복합체들에 도전받고 있다(역주-과학은 아주 전문화되고 고도로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정작 내일 만날 애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직관이나 경험보다 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자본주의 기술에 대한 천박한 미국 비평가들도 역시 [과학을] 유럽의 창조물로서 이질성을 강조하고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속에서 저항의 원천을 찾고 있다. 기존에 과학에 대한 도전은 대안적인 치료와 생태학 등 여러 운동에서 그리고 새로운 전체론적(holism)인 여러 학회에서 실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우리가 과학을 분석할 때 중요하게 취급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은 기존의 과학 기구(institutions)의 외부이지만,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통상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을 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과학을 부정할 때 단순히 기계적 의미에서 과학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측면을 다시 통합하는 변증법적인 부정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인 견해와 반과학적인 모든 견해를 극단적이라서가 아니라 일면적(one-sided)이기 때문에 비판한다. [이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것”은 나쁘고 “중도적인 것”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극단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1964년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에 대항한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의 선거 캠프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극단-중도의 축은 세상에 대한 양적인 견해이다. 반면에 “일면적”이라는 비판은 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다원적 혹은 유연한 방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변증법적이 때문에 강조되어야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어떤 견해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자의 속기(shorthand, 날림의 언어)를 이용하는 것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반드시 피해야 한다.
기술과 과학의 도입과 발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 생산물로써 그 내용은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것도 아니며 미리 운명 지워진 특별한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해로운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기술 그 자체가 거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기술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세계에 작용하기 위한 의식적인 방법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술은 우리 종(species)만큼 오래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기술 이전의 목가적인 자연 상태를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사회적 필요를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대안적 기술을 찾을 수 있다.
과학에서 대안적인 길을 만드는 문제는 과학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전 영역의 모순을 이해해야 하고, “실제 존재하는”, 대부분 부르주아지적인, 과학에 투쟁적이며 협동적일 수 있는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파괴와 이윤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그것을 선호하는 제도적 구조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생산되고 사회화되는 방식, 그들이 연구하는 지적인 틀에 대해서도 저항할 필요가 있다. 혁명운동은 과학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 전쟁터로 다시 한 번 재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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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주- 골드워터는 북베트남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 극우주의 정치가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 린드 존슨은 골드워터의 핵폭탄과 같은 극단적인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광고를 제작했다. 데이지 꽃잎을 따며 놀던 순진한 어린 소녀의 눈망울에 핵폭발의 버섯구름이 투영되는, 그 유명한 ‘데이지 걸’광고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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