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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술 쳐먹고 지껄이는 소리

2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2/18
    폐허 이후
    꿈꾸는나비
  2. 2008/01/12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꿈꾸는나비
  3. 2007/09/17
    내가 생각하는 '땅과자유'
    꿈꾸는나비
  4. 2007/05/07
    대구이주연대회의 결성 토론회
    꿈꾸는나비
  5. 2007/03/22
    걷고 또 걷다
    꿈꾸는나비
  6. 2007/03/19
    또 소주 마시러 간다
    꿈꾸는나비
  7. 2007/03/11
    자고 싶은데(1)
    꿈꾸는나비
  8. 2007/02/28
    아프다(2)
    꿈꾸는나비
  9. 2007/02/26
    [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꿈꾸는나비
  10. 2007/02/07
    포기하자 -05.03.16을 회상하다
    꿈꾸는나비

폐허 이후

어정쩡과 찌질 사이에서 허우적하고 있는 지금,

우야던동 정신 차려야하기에 최면 건다~~~

 

 

폐허 이후

 

                            -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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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심장이 멈춘 줄 알았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내 심장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소주잔에 걸고 맹세했다.
한 몇 년쯤은 심장이 멈춘 채로 냉정의 왼편 시니컬로 보관할 작정이었다.
안개 속에서 잠시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신념대로 살겠다고,
막차 타는 심정으로 부산으로 향했 것만.

 

심장이 다시 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내 노동의 땀으로 뿌리를 내릴려고 살고 있지만,
배신이라도 하듯 달콤한 사탕같은 사랑이 몽글몽글.

 

그 어느 겨울의 오리털 파카보다 따스했던 작업복이 미워진다.
첫사랑의 기억은 독이 분명했다.
그 시절 일기장은 첫사랑에 대한 아스라한 내용뿐,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보지 않을 만큼이다.

 

근데, 첫사랑의 그 심장이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스무 살과 서른 쯤인 지금
전혀 다른 세계의 꿈을 안고 사는 평행선인 지금
추억과 현실 사이에서 말도 안 되겠지만
지금 다시 뛴다

 

언제까지 뛸지 똑똑히 지켜보리라
난 니가 지겨워.
또 너야!!

딱 요만큼만 스스로를 사랑해 봤으면.

 

또 한번 새겨본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김선우의 목포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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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땅과자유'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라고 말을 하면 이상한가. 그것도 동성과. 어떤 사람과 우연히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의 내력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너무나 우연히, 너무나 먼 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5시간을 달려간 곳에서 우리는 기홍(28세) 씨를 만났다. 경남 밀양의 삼랑진역에서 ‘간이역 시노래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다. 콘서트 후에는 천태산 산자락에서 박영희 시인의 시집 『즐거운 세탁』과 르뽀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밀양(密陽)은 말 그대로 ‘비밀스런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도시의 정경에는 권태로움이 스멀스멀 고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런 숨막히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아케이드화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이어서일까.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 “한잔 하시겠어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잔을 내밀며 “삶이 보이는 창에서 왔지요?” 하고 되물었다. 자신은 대구에서 <땅과 자유>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땅과 자유’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다름 아닌 내가 가입한 몇 안 되는 포털사이트 카페 중 하나였다. 대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단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삶이 보이는 창』에서 나온 『말해요, 찬드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의 눈길이 하나의 길에서 충돌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시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박영희 시인 출판기념회 자리가 저한테는 일석이조인 셈이 됐어요. 밀양에서 한참 방황할 때 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이응인 선생님하고 근 3년 만에 만나 소주를 한잔 했고,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고증식 선생님한테 드디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고등학교 선생님인 고증식 시인이 기억하는 그는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기홍 씨가 찾아와 『창작과 비평』을 정기구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읽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지만, 기홍 씨는 그때 『말』이나 『리뷰』 같은 잡지를 읽고 있었고 그것이 입시 문제집보다 읽기 편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제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는 대학에 떨어지고 문학교실에서 1년가량 공부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이응인 선생님과 시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운동의 언저리에서 활동하게 되는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 제대를 했을 때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작정 안산의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찾아갔어요.”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찾아간 곳에서 만난 상근자는 이주노동자들과의 끊임없는 상담으로 바빴고, 그는 사무실에 뻘줌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를 찾아가 가입한다. 그러나 타향에서 계속 백수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일차적으로 이주노동자와 함께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한다. 그때 고향 선배에게 대구에서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는 다시 짐을 싼다. 그리고 그는 대구의 ‘땅과 자유’라는 모임에 처음 나가게 되고, 거기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듣게 된다.

“처음 만난 날 필이 꽂혔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났죠. 2004년 3월 문정현 신부님하고 함께한 ‘평화유랑단’이 대구에 방문하는 일정에 맞춰서 지역에서 평화 주간을 만들어서 한 달을 집중했죠. 비록 한 달밖에 안 된 사이였지만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제가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전혀 그런 게 없었죠.”

‘땅과 자유’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게 특징이라고 기홍 씨는 말한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은 켄 로치 감독이 1995년에 만든 스페인 내전을 그린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과 멕시코혁명(1910~1940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20세기 초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농장주로부터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농장주들은 노예노동에 항의하던 농민들을 말에 매단 채 옥수수밭을 달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과 멕시코혁명의 영웅 사파타는 옥수숫대를 자르던 낫을 들고 일어나 봉기한다. 그때 내걸었던 구호가 바로 “땅과 자유”였다. 그리고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던 날, 치아파스 원주민들은 빼앗긴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기홍 씨는 이것이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농사를 지어야 할 땅과 그 땀으로 일궈진 인간의 존엄성이 깡그리 사라질 위기가 바로 한미FTA예요. 이런 마음을 ‘땅과 자유’의 모든 회원들이 가지고 있고, 그 문제를 온몸으로 안아 싸우고 있지요.”

그래서 이 모임은 ‘땅과 자유 학교’를 열어 공부하고, 그 고민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있다. 『녹색평론』을 기본으로 하여 매달 열리는 이 학교는 ‘세계화에서 지역화’라는 주제로 반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으며 이주노동자, 한미FTA, 자치·자율·자급, 이반일리치, 삼성과 싸우는 김성환 위원장 등 다양한 주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공부 없이 투쟁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배우고, 또 실천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며 이주노동자 집회,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집회, 한미FTA 집회 등에 참여했다.

그리고 ‘땅과 자유’는 2005년 11월부터 2006년 6월까지 200일 동안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 첫걸음은 2005년 11월 23일, 국회에서는 쌀협상 동의안 비준을 강행했던 날이었다. 그날 ‘땅과 자유’ 회원들은 긴급하게 모여 논의한 끝에 이는 “땅과 소농, 풀뿌리 민중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4일 7시 대구백화점 민주광장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만든 피켓과 촛불을 들고 모였다. 그들은 ‘우리 쌀’을 지키는 것이 농민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이 짓는 양식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명붙이들로서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땅과 농촌,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는 것이 ‘땅과 자유’의 생각이었다. 마이크와 앰프도 없이 “쌀 포기, 농업 포기 국회비준 규탄한다”며 목청껏 외쳤다. ‘땅과 자유’ 회원들끼리 시작된 작은 함성은 지역의 모든 단체들과 함께하는 연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월의 칼바람, 연말연시의 소란함, 거기다 설 연휴까지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대구백화점 앞 광장의 느티나무들이 겨울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그 잎이 무성해지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1만 7천 명 가까운 시민들로부터 지지 서명도 받았다. 기홍 씨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에 했던 대답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오,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200일 투쟁’ 기간 동안 평택 황새울과 새만금, 천성산과 함께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법안 날치기 처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 상업화에 저항하여 파업을 벌인 철도노동자들의 호소를 이 촛불집회에서 공유했다. 또 39일째를 맞던 2006년 1월 1일에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농민군 봉기 12주년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11일,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는 장장 200일의 투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기홍 씨는 이렇게 말한다.

“200일 동안 이어져왔던 그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요. 이제 촛불이 새로운 투쟁의 불씨로 옮겨 가기 시작한 거죠.”

이제 ‘땅과 자유’는 땅으로 돌아가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뿌리가 도시로 뻗어나가 서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소비적인 삶에서 벗어나, 생활이 곧 운동이고 운동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기홍 씨는 숨막히는 도시가 아닌 흙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권정생 선생님의 말처럼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거죠.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잖아요.”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  57호에 실린 글이다. 술자리에서 얼떨결에 인터뷰에 응했는데, '땡' 잡았다고 해야하나^^;; 함께 만들었고, 함께 하고 있는 "땅과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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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이주연대회의 결성 토론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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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걷다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첫 구절인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처럼 혼자 앉아 있지 못해서 매일 걷는다. 도착할 곳이 없는 발걸음을 제일 싫어하고 힘들지만 무작정 걸을 때도 있다. 근데 지금처럼 쉼터에서 당직 설때면 걷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다. 감옥에 있는 동지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군대있을 때도 걷도 싶어 별 짓을 다했는데.

 

지하철과 버스는 답답해서 요즘 거의 안 탄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음주 운전으로 며칠 동안은 자제하기로 했다. 오늘도 한 시간 반을 걸었다. 골목길을 걸으며 조용해서 좋지만 또 혼자인 것 같아 매연 가득한 대로를 걷는다. 효목시장을 나와 큰고개 오거리쯤이면 속도에 탄력이 붙는다. 완만한 고개를 넘어가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평화시장쯤이면 혼자가 아님을 느끼며 사람 구경을 한다. 반 쯤 온 것 같은 공고네거리에 서면 왜 이렇게 걸을까 싶다. 원래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지하철을 타면 짬을 내어 책이라도 볼 수 있을텐데. 난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강남약국을 지나치며 이런저런 기억을 되살려 보기도 했다. 칠성시장에서 신천변으로 빠졌다.

 

개나리를 보고싶어서 신천을 끼고 걸었지만 마침 어스름이 깔릴 때라서 그랬는지 우울해졌다. 예전에는 걸으면서 머릿속에 복잡했던 것들이 단순해지며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근데 요즘은 꼭 그렇게 뭔가를 얻어려고 하기 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많이 걷는다. 다리가 묵직해져오며 아플 때까지 그래서 집에 도착하면 잠이 올거라 바로 누웠지만 정신은 더 말똥말똥 또렷해진다. 제길~

 

신천에서 삼덕동으로 빠졌다. 쉼터에 도착해서 영화 <사랑할때 이야기하는 것들> 봤다. 억지스럽지 않았다. 담백했다. 혹자는 '미열'로 표현했는데 그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여전히 왈칵 쏟아내지는 못했다. 그 많은 눈물은 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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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주 마시러 간다

백수의 하루는 너무 염치없다ㅋㅋ

 

엊그제는 존경하는 활동가 선배와 이주동지와 소주 한잔했다.

어제는 2900원 짜리 포도주 마시고 술친구인 형집에서 잤다.

오늘은 한 3년을 넘게 같이 하루가 멀다고 만나서 마시니

그만 보자고 농담하는 형한테 소주 한잔 사달라고 메일 날렸다.

 

이러다 속이 빵구날 것 같지만

해마다 한 번은 꼭 봄앓이를 앓는 나에겐

소주가 약이다^^

 

봄은 빨리 안 지나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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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싶은데

잠이 오질 않는다.

몇 주 동안 거의 술로 기절해서 잔 탓에 맨정신으로는 잠이 오지 않나보다.

그래도 내일은 여수 집회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위태롭다.

 

다시 겨울이다.

어찌 꽃샘추위가 겨울 추위보다 더 한 것 같다.

마치 지금의 내 상황 같이

그건 아마도 살짝 맛뵈기 보여준 봄기운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찾아온 추위 때문일 거다. 

그 추위가 나에겐 환상에서 현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에 몸살을 앓는 것 같다.

 

긴박한 3월의 일정을 뒤로 하고

결국 잠수 타고 말았다.

쿨하게 어디로 튀어 볼까 했는데,

감옥같은 방에 박혀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오늘 상경집회에, 지역 집회에도 참가하지 하지 않고, 기사로만 보고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런 정세 속에서 개인사에 파묻혀 잠수타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근데 내 몸과 마음이 지금은 감당하기에 혼란스럽다.

 

시간이 나를 살아 숨쉬게 하겠지

결국 버팅겨 내는 것,

견디는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그 관계속에서 교통사고를 칠 것만 같아

먼저 잠수 탔다.

꽃샘추위가 지나가면

좀 나아질까.

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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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연애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 기쁜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고, 그 눈으로 찾아낸 봄.

별꽃, 산수유꽃, 매화..... 망울져 있던 목련

설렘

 

그것도 잠시

이제는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째려본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살해하고 싶은 봄날

내 삶하고는 너무 먼 평행선 같은 봄날

2007년 봄날은 갔다.

 

아프다.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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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요약]아름다운 노.농연대-자급.자치의 관점으로
(천규석/ 녹색평론 통권 91호)

 

-노.농연대의 직거래가 대안이다
1. 도농 직거래: 지역 농민단체 또는 마을 공동체와 도시공장의 노동조합이 연대하여 농어촌마을의 농축수산물로 직거래로 지역적이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차원의 노농연대사업으로서의 직거래
2.학교급식: ‘친환경 우수농산물’에서 ‘친환경 지역농산물의 직거래’로 조례 개정운동.

 

-전북 정농의 실패, 교훈
1. 학교측과 생산자 측의 사전 논의나 통보없이 임의로 이루어짐, 사전계약재배가 아니였다는 사실. (도의 재정지원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며, 재고의 문제, 농산물 때깔의 문제가 있으며, 조례 개정이 된다고 해도 불안정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2. 사후 일들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사전 대비없이 전북도 보조금 3억 5천만원, 농민들의 쌈지돈 1억 5천을 보태어 5억 짜리 물류센터를 지은 것부터 망조. (비근한 예는 많다. 안동가농의 ‘우리농한생명 운동’ : 확고한 비전, 전망도 없이 ‘물량화와 규모화의 경제’에 빠져 단명했다.)
반대로 한 살림은 20년이 다 되어서야 물류센터를 지었다: 오랜 활동기간에 쌓여온 절실한 내부적 요구와 자기능력의 축적에 따라 거의 자력갱생을 이뤄냈다.(일단 ‘하자’가 아니라 ‘하다가 하자’)

 

-재정지원 받는 물량주의 운동은 반드시 망한다
1. 사회문제의 궁극적인 책임을 정부에 묻고 재정보조의 문제해결이 최종 열쇠인냥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재정지원 받는 사회운동은 이미 운동이 아니다.(모든 운동의 총망라, 물론 한계와 결론을 지어 놓고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 라며 자기 스스로 해산한 거의 단체는 없었다. 사업 전환만 있을 뿐이지)
2. 어떤 사회단체는 정부가 마땅희 해야 할 일을 정부가 안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대신 해주고 최소한으로 받는 재정수령이 왜 나쁘냐고 반문할 것이다. 정부에 기생하는 관변단체의 변명 또는 곧 그렇게 될 단체의 자기합리화다.
3. 재정지원이 없다고 우리가 하던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자꾸 정부에게 하나하나씩 떠넘기고 정부가 해주기를 요구 하니까. 우리의 자주와 자치는 사라지고 수탈기구로서의 정부는 날로 막강해진다. 정부에 요구, 의존하는 운동은 국가주의의 체 바퀴를 못 벗어난다.
4.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고 가능한 세금도 안 내는데 있다.

 

-기아차 노조와 구례농민회의 연대
1. 05년 11월 11일 광주 기아자동차 노조와 전남 구례농민회 노농연대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자. 더디게 가더라도 그렇게 하자. 쌀 1000포 구입과 설 특판 사업, 노농경작단 출범 등등.
2. 노농연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산업문명체제의 대안을 전망하는 데 있다. 그 전망은 ‘자급적 관점’ 스스로 주인되는 자급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관점은 귀농적 삶뿐이다. 귀농적 비전 없는 노농연대는 성공해봐야 지금의 현상을 유지, 개선 정도이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확실히 하자. 열가지 밍숭맹숭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대구․경북지역 노․농연대 직거래운동의 현주소
1. 센터라는 이름의 집중과 규모의 경제와 효율을 추구하겠다면 기존 시장의 유통에 맡기면 될 것이지 우리가 새삼 직거래 운동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시장 기구를 복제해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학교의 직거래 실무자, 책임자들과 함께 농민의 살림과 그 직거래 의미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 공유의 선행이 먼저다.
2. 학교 또는 사내식당의 짜여진 식단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식단에 따라 식재료를 구입하지 말고 생산 공동체의 공급가능 품목에 따라 식단을 꾸리는 자기 변화, 혁신없이는 직거래 운동의 성공은 어렵다. 노농연대의 진정한 새로운 공동체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철저한 문제 인식과 고민 그리고 대안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는 운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가 묻게 된다.)

 

-‘기구’보다는 사람의 사이의 관계변화가 먼저다
1. 지역물류체계의 구축에서 벗어나 쌀부터 시작해서 축적하여 품목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지역물류체계의 구축이란 지역에 사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구축의 다른 말이다.
2. 물량조절의 어려움→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 당사자 간의 계약으로 생산한 물량은 과부족의 폭은 그리 크지 않다.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다.(소규모화) *계약, 협약은 물량의 계약아 아니라 농산물을 수확한 만큼 소비한다는 ‘소비약속’이다.
3. 지역식량기구의 대안은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넘어서는 민중 스스로의 자치와 자율로 서는 자립적인 지역공동체 세상이다→ 상품에 종속된 소비가 아닌 그러니까 제도로 통한 일방적 계획보다는 협동적 인간관계 변화운동으로 서야 한다. 작은 실천과 동시에 인간관계 변화와 자급자치적 관점에 서지 않고서는 결코 노농연대 운동은 성공을 기약하지 못한다.
4. 권력투쟁이나 계급투쟁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이 운동으로부터 일찌감치 떠나야 한다. 공동체에 그런 기득권은 없다. 만일 없던 기득권이 다시 생기면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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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자 -05.03.16을 회상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왜 그리 당당하게 보이고,부러워보이고,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스스로가 의문이다. ㅋㅋ

 

나의 힘이 뭘까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 했지만,
난 무엇이 힘일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피해의식으로 시작되어서 피해의식으로 끝나는 힘이랄까
그래서 나름의 미화와 적개심이 적당히 힘이겠지

 

설레는 봄날이라서 그런지 조그만한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감정에 있어서 예민한 것도 분명있겠지만, 그것보다 스스로 생각 해보면 신경인 날카로워진 것 같다.

 

각설하고 이야기 하자.
처음이다. 그런 문자메세지를 받은 게.
누군지고 모른다. 번호가 없었다.
"꽃인 그대와 함께 피어 아픈 그늘있어요. 잘자요. 기홍"
몇 날 며칠 밤을 설쳤다.
왠지 가분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오늘만은 설중매를 마셨다.
아껴두었던 설중매였다. 분선할매가 좋아했고, 난 분선할매를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 난 느꼈다.
난,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자라온 환경과 피붙이의 환경과는 다르다고 몸부림치며 도망가고 싶고 잠적하고도 싶은데, 피는 속일 수 없구나를 느꼈다.
이런 나의 장애를 이해한다고 해도 충돌은 당연할 것인데.
어찌 연애를 꿈꾸는가.(그렇다고 완벽주의는 결코 아닌데)

 

결코 그 문자의 주인공이 나의 상상력으로 밝혀지지 않을께 분명하니 괜히 설레고 망상에 젖지 말고,스스로에게 부탁하고 싶다.
현재 삶에 있어 허덕이고 있는 문제에 좀 더 치열하게 살자.
그게 더 현실적이고, 기홍이 답지 않은가ㅋㅋ

 

꼭 그런 기분이다.
윤동주의 시에 보면 침전하는 뭐라고 하는 싯구에 많은 고민했다고 했는데, 기홍주의에 왠지 침몰되는 기분이다.

 

어차피 이 마당이 극히 자기중심인게 당연하겠지.

 

혼자 사무실에서 피켓을 만들면서 생각했다.

 

결국 혼자 살아가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행동 할 것인데,
무엇에 그리 기댈려고 하는가.
그래, 맞다.

 

그래서
술김에 지랄하고 싶다.

 

C발
무슨 내 주제에
어차피, 안 되는 연애를 구질구질하게
껄떡거리지 말고,
내 삶을 제대로나 살아보자.

 

그래서 포기하자.
감히, 이 봄날에

 

포기하며,
더 좋은 세상에서
나의 연애는 이루지리라
믿는다.

 

어떤 이유로도
내 앞에서 연애를 설득하지 마라.

 

이 말이 비록 술김이라도.
C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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