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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9
    딱 한곡만 더 듣고
    처절한기타맨
  2. 2008/01/10
    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여전히 가만히 가만히(1)
    처절한기타맨

딱 한곡만 더 듣고

  • 등록일
    2010/06/29 22:30
  • 수정일
    2010/06/29 22:30

딱 한잔만 더 마시고

 

오늘 하루 길을 떠나려 한다.

 

가갸 가다가 거겨 거렁가에
고교 고기 잡아 구규 국을 끓여
나냐 나도 먹고 너녀 너도 먹고
다댜 다 먹었다. 더뎌 뎌 다고 (*옛 동요)

 

오늘 하루 길의 맨 끝에서 들은

개구리 울음

 

눈 물 난다!

 


개구리
     
                               한하운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문둥병 앓던 한하운 시인이

소록도 가는 길에 썻다고 전해지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글 배우던 추억에 관한

그런  애틋한 시인듯...

 

어느 블로그에 가니 위 개구리라는 시에 대해 평이 써져있는데

이 해를 제대로 못한 듯해서...조금 맘이 시렸다능.

 

순수시의 대표적인 작품.
 
서정적, 서사적, 혹은 극형식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시인의 심상만을 담고있는 순수시.
 
왠지 헛소리 -_ -

 

 

또 하나 펌질

 

제비는“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知爲知知 不知爲不知 是知也):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지저귀고, 개구리는“독락악 여중락악 숙락(獨樂樂 與衆樂樂 孰樂):홀로 즐거워하는 것과 여럿이 즐거워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거운가.)”이라 운다

 

조선시대 에『어우야담』지은 문장가 유몽인은 어느 중국인 선비가 자기 나라에서는『오경』을 가지고 공부하는데 조선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공부하느냐고 묻자,『오경』은 물론『사서』까지 다 읽으며 심지어 제비도『논어』를 읽고, 개구리도 『맹자』를 읽는다고 대답했다.

 

유몽인은 애초엔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문장에 특히 뛰어나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젊은 시절 월사 이정구가 자신을 조정에 천거했다는 말을 듣고는 ꡒ지난 해에는 기근이 들어 아이들이 떡을 다투기에 막상 가서 살펴보니 콧물이 끈적끈적하더군요.몽인은 강호에 있으면서 한가하여 일이 없어,지난해에는 `춘추좌씨전'을 읽었고 금년에는 두시를 외우니 이것이 진실로 해를 보내는 벗입니다.이로써 여생을 보내면 그뿐이지요.아이들과 더불어 콧물 묻은 떡을 다투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올시다ꡓ라는 편지를 올린 일이 있다.

그의 호방하고 얽매임 없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이다.

그러나 재주가 지나치게 비상해 경솔하다는 평도 없지 않았고,이런 저런 빌미로 인조반정 직후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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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여전히 가만히 가만히

  • 등록일
    2008/01/10 15:01
  • 수정일
    2008/01/10 15:01
  길의 맨살

내가 사랑한 사람들, 헤어진 그들에게서

향기가 슬핏 뿜어져 나온다

나의 따뜻한 체온, 나의 숨가쁜 사랑, 나의 짧았던 열락

다만 반갑고 슬프다.
 

오랜만에 어릴적 살았던 동네길로 한밤중 너털너털

한짐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걸어 돌아오다.

 

내 어릴적 살던 2층 연립 주택은 허물어진지 오래... 

산 자들의 입구에는 붉은 십자가 하나 들어서있고
고층 아파트는 새로운 묘지처럼 어두컴컴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거의 다 바뀌었지만

골목 골목 작은 구멍가게들 자리에는 또 다른,

이름만 바꿔달은 조그마한 가게가 들어서 있더라.

 
어린 시절 페달 자전거를 타고 올라 가기에는

늘 숨 가팠던 골목길 오래간만이라며

찡끗하고 내게 윙크를 한다.
 

차에 치어 죽어가는 강아지 한마리

그 죽음 한 10여분 동네 아이들과 얌전히 기다렸다가

후미진 길가 언덕 가로수밑에 묻어준 기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연립 주택의 뒷편 가로수 아래 살과 뼈는 삭아

초롱초롱한 나뭇 이파리가 되어 매달렸었겠지.

다시 낙엽이 되어 사람들 발밑을 굴러 다녔겠지.

 
이제 마흔의 나이가 되어 

열 두어살때의 길을 다시 걸어보다.

 
길의 맨살은 거죽만 바뀌어진채

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여전히

가만히 가만히 놓여있더라.




이제는 헤어진 사람의 블로그에서 내가 머물렀던 체취을 가끔 맡게 된다.
내가 그이에게 간접 소개해준 사람들을 통해~
박상륭, 닉드레이크, 김두수와 같이 전혀 몰랐던 이들을
그들이 나를 통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것을 떠올리면
사탕과도 같이 추억은 달디 달아진다.

나는 찜질방을 좋아하게 되고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도자기 보는 눈이 조금 싹을 틔웠고

그랬건 어째건 갑자기 보노보노가 떠올랐다.

보노보노는 정말 좋다. 누가 소개시켜줫는지는
떠올려 보니 그 쉐리하고는 완전 절교했다.
그 놈 내 돈 떼먹고 안갚았다.
그 용도는 낙태비였다. 씨벌놈 현재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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