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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먼저 '오늘은' 을 기다리는 극소수의 독자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드디어 빵꾸를 냈다.--;;

변명을 하자면 이사와 결혼식(내 결혼식이 아니다!)을 비롯한 개인적 용무들이 많았다는건데...많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언젠가 또 빵꾸를 내겠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씀 다시 드린다.

 

 1918년 8월 27일 장준하(1918-1975)가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꼿꼿한 대쪽의 그것이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 보통학교를 거쳐(리영희도 삭주 대관 보통 학교출신이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신학교에서 학병으로 징집된후 이른바 '6천리 장정' (장준하의 '돌베게'와 김준엽의 '장정'을  참고하라. 나 개인적으론 돌베게보다 장정을 흥미롭게 읽어싸.)을 통해 광복군에 몸을 담았다.

 

그의 광복군 생활은 일년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준엽과 함께 OSS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OSS- CIA의 전신으로 이차대전 당시 미군 정보기관) OSS교육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군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을 국내진공하고자 하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구가 일본의 빠른 항복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일군의 항복이 좀 늦어졌고 광복군이 진공을 했다면 해방정국의 방향추는 아마도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장준하는 해방정국에서 장준하는 광적이리만큼 반공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을 역임했는데 조선민족청년단은 육이오 와중의 부산정치파동(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해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에 연루되기도 한 조직이다.

 

또한 장준하는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족청 교무처장으로 지낼 당시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고도 전해진다.

 

장준하의 이런 극우성은 어디서 비롯된것일까? 물론 리영희도 통역장교 출신, 문익환도 마찬기지이고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의 배후 조종자 였을정도로 당시 서북출신 기독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특히 우익적 면모를 강하게 보였었다.

 

한가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장준하가 몸담고 있던 광복군이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이나 다니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미군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된데 반해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는 항일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데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런지? 

 

장준하의 반박정희 투쟁은 너무나 잘알려졌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2공화국 당시인 1961년 1월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은 516 쿠테타로 그 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토건설본부의 사업안은 이름만 바뀐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도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실족사로 밝혀졌으나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았고 아직도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정원이 제시판 과거사 과제에도 포함되어있다.

 

첨언: 청년 장준하라는 뮤지컬이 한참 공연중이다. 이부영은 장준하 기념사업회 회장이란 명목으로 자기 선전에 장준하를 잘 써먹고 있고 노무현도 직접 관람했다. 장준하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도 남기면서...그리고 8월 28일 자이툰 부대 본진이 성남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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