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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1

 아 일 안된다...진행하던 기사 마무리 지을려고 사무실 나왔건만 집중력도 떨어지고 평소같으면 머릿속에서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은 하드도 안 돌아간다. 푹신한 의자 있는 맥줏집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좀 톡쏘는거..국산 같으면 레드락) 노가리나 풀었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자꾸 떨어져서 밥까지 했건만 마찬가지다. (오늘 메뉴는 자장밥이었다. 감자 대2, 당근 대1, 양파 대2, 돼지고기 300g, 춘장 1봉, 레시피 생략)

 

다음까페에서 정은임 방송 다시듣기 찾아서 들으려는데 그것도 잘 안된다. 짜증 이빠이...--;;

 

손노가리나 풀어야겠다. 일전에 자일리톨님에게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도 있고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를 만들기도 했고(정확히는 중화풍이지..) 역사왜곡이 어쩌고 하며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정설송-정률성 부부 이야기나 한 판 해볼란다.

 

정률성은 광주출신으로 조선혁명군정치학교, 중국공산당 산하 노신 예술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 팔로군, 해방이후 북한 인민군 합주단장등을 지낸 음악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그는 김학철, 무정, 석정 윤세주, 주덕해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입각해 반제국주의, 반일 투쟁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싸운 사람이다.

 

정설송은 자녀가 없는 주은래-등영초 부부의 양녀로서 1941년 정률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설송은 그 당시 항일군정학교 여학생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 둘의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반당분자로 처형당한 이후 중국공산당 내의 많은 조선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무정의 적극적 도움으로 결국 결혼에 골인 했단다.)

 

하여튼 정률성과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반일 투쟁에 나섰었다. 결국 태항산 전투에서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조선의용대는 당당한 한 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었고 56개 소수민족중 몇개 민족만 자치주를 건설하는데 포함될 수있었다.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건설의 핵심적 인물이고 초대 자치주 주장을 지냈다.

 

자꾸 이야기가 딴데로 세는데 정률성은 38년 봄 힘든 대장정을 마치고 너무나 초라한 조직으로 연안에 자리잡은 공산당의 기세를 돋구기 위해 연안송(延安頌) 을 발표했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3대 음악가이자 최고의 혁명음악가로 불리는 정률성의 시작이었다.

 

연안송은 공산당 점령지구에서 국민당 점령지구로 화북지방으로 나아가 동남아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나도 이건 못들어봈다--;;)

 

이후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로서 활동하면서 전투중에도 지속적으로 음악들을 발표하였으니 그 중의 대표작이 '조선의용대 행진곡' 인것이다. 이 노래는 라 마르세이예즈가 그랬던 것처럼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마침내 팔로군 행진곡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중국본토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팔로군이 더 이상 국민당군 산하 팔로군이 아니라 인민해방군의 깃발 하에 싸우게 되던때 팔로군 행진곡은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격상된다.(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땐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괜히자랑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통일을 선포한 1949년 이후 인민해방군 행진곡은 중국의 국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가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조국의 대지에서
민족의 희망을 등에 걸머지고
우리들은 백전백승의 역량이다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여
적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모택동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너무 길다 . 짤라서 써야겠다. tobe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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