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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오늘(8.29) 영국과 중국 난징조약 체결

아 귀찮아 죽겠다ㅠ.ㅠ 하여튼 가는데 까지 가보자.--;;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이 아편 전쟁 종결을 위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은 극동에서 맺어진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이후 맺어진 수많은 불평등 조약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 해군 제독 페리에 의해 맺어진 자신들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써먹기도 했다.(강화도 조약) 

 

난징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 선상에서(콘월리스라..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나?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귀족적 후까시를 자랑하다가 맨날 멜 깁슨 에게 뒷통수를 맞던 영국 장군의 이름이 바로 콘월리스다.)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과 영국 전구대사 포틴저가 이 조약을 조인했다. 비준서는 1843년 홍콩에서 교환됐다. 주요 내용만 짚어보자면 1) 홍콩의 영국 할양.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5개항의 개항. 3)개항장에 영사 설치 4) 전베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불 영국 지불 5)공행과 같은 독점상인 폐지(공행은 우리나라의 시전상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6) 관세의 제한 7) 청,영 두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이 강제적이고도 불평등한 조약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아편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후 상품시장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는 영국 내의 대표적 인기 사치품이었기에 무역역조 현상은 심각했다. 중상주의 정책이 일반적이던 당시로서는 용인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은의 대거 유입으로 청나라의 인플레이션 현상도 꽤 심각했지만...

 

영국이 인식하기에 이 무역역조의 근본원인은 광동 무역체제였다. 중국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는 광주였고 청의 허가를 얻은 공행이라는 독점적 상인길드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했다. 몇번 사신을 파견해 광동 무역체제를 혁파하고자 애썼으나 답답할 것이 없는 청나라가 그것을 들어줄리는 만무했다. 이 때 영국이 비장의 무기로 삼은 상품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이 아편이었다. 사실 영국에서 아편은 고급 상품이기도 햇다. 쿨리지를 비롯한 19세기 영국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아편에 취해 쓴 작품들이 많고 또한 아편을 찬양하는 작품들도 다수 있을 정도였으니....

 

영국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아편 중독자로 넘쳐났고 1830년대에 들어선 무역역조 현상이 역전되었으니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드디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내의 아편중독자 급증, 관리들의 아편중독등으로 국가가 흔들흔들할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칼을 뺴들었다.

 

흠차대신(전권대신이라는 의미이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를 떠올리라. 위소보가 강희의 흠차대신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임칙서는 청렴, 과감을 무기로 유명무실했던 아편 금지령을 확고히 하고 영국상인의 아편을 몰수 하였는데 영국은 이에 대해 황당하게도 전쟁으로 대항했다. 지리멸렬한 전투 끝에 결국 그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난징조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사실 영국 국내에서도 이 비도덕적인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컸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편 재배가 식민지 인도에서 큰 지위를 차지 하고 있었고 아편을 통해 중국으로 얻어진 은이 영국 중심 세계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상 군사상 근거지 획득이란 요구들을 일거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편전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전쟁이 생각나지 않는지?

 

 

첨언: 19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 때 영국의 마지막 총독 패튼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유니언 잭을 내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슨 의미였는진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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