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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개'

molot님의 [김훈, 글쓰기, 민중언론] 에 관련된 글.

 

김훈이 새 소설을 냈다.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개'. 9,800원짜리 책이지만 장편 소설이라기엔 뭐하고 삽화도 포함되어 있고 옛날 교과서 만한 크기(이걸 4x6배판이라 그러나 국배판이라 그러나 기억이 안나네)에 231페이지 짜리인 걸 감안하면 좀 긴 중편 정도겠다.

 

이 책의 화자는 숫놈 진돗개다. 이름은 이쁘게도 '보리'..보리밥도 잘 먹는다고 주인 할머니가 붙여준 이름이랜다.  김훈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 굳은살 속에는 개들이 제 몸의 무게를 이끌고 이 세상을 싸돌아다닌 만큼의 고통과 기쁨과 꿈이 축적되어 있었다"며 개 발바닥의 굳은 살들은 개들의 '삼국유사'이노라 선언한다.

 

에이^^ 근데 개들의 삼국유사라는 표현은 오버다. 단일자로서 한 마리 한 마리 개들에게 바로 자신의 발바닥 굳은살이 자서전이자 역사라는 점은 이해하지만,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일연이 재구성 하고자 했던 민족구성체의 역사 잖아.

 

따라서 개발바닥 굳은살의 단일성을 삼국유사는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리 표현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선비의 문집, 일기 이런것에 견주기도 뭐하고 명확한 근대의 산물인 일기에 견주기도 덜 적절했으리라. 아마 삼국유사에서 큰 도움을 받은 자신의 이전 소설 '현의 노래'가 기억났겠지 싶다. 

 

최근 김훈은 '정치적 발언'을 몇 가지 했다. 탄핵을 맞아 하릴 없이 청와대에서 개기던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읽는 다는 이야기가 그 측근을 통해 흘러나오고, 칼의 노래가 대중적 인기(사실 칼의 노래는 노무현이 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도 이미 많이 팔렸다)를 얻게 된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근에는 조선일보가 김훈 인터뷰를 했는데 김훈은 이 정권의 중핵에 있는 386들이 '칼의 노래'를 일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감상을 늘어놓는것에 대한 불쾌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김훈은 12척의 배로 죽을 자리에 뛰어들었던 이순신과  '민주사회'의 리더쉽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걸 조선일보 등은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해 먹었고, 데일리 서프 등 친노 언론들은 그 역편향의 극단을 걸었다. 데일리 서프 김훈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는 순간, 간만에 애리스토크래티즘이 나를 지배하더라. 하하하.

 

잡설이 길었다. 김훈의 신작 소설 '개'는 김훈이 그간 보였던 한계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충성이나 의리 같은 전근대적 가치에 대한 경도, 그리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남녀차별의식. 

 

'소품'이라긴 뭐하지만 이 중편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보다 확실히 못하고 이상문학상 수상작 '화장'이 드러낸 그 도저한 밀어붙임에 이르지도 못했단는 것이 내 판단이다.

 

하지만 김훈 특유의 체취는 너무나 잘 드러난다. 별 거 없는 내러티브인데도 나 같이 싸늘한 사람의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문장들의 핍진성은 극진하다. 화자인 진돗개 보리는 태어나자 마자 “내 몸뚱이를 비벼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개가 사람보다 낫다.

 

그리고 곧  “눈, 코, 귀, 입, 혀, 수염, 발바닥, 주둥이, 꼬리, 머리통을 쉴새없이 굴리고 돌려가면서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노리고 물고 뜯고 씹고 핥고 빨고 헤치고 덮치고 쑤시고 뒹굴고 구르고 달리고 쫓기고 엎어지고 일어나면서 이 세상을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지”라며 구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지나간 날들은 개를 사로잡지 못하고 개는 닥쳐올 날들의 추위와 배고픔을 근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한 문장만 더 소개하고 맺을란다. "세상에는 사납고 무례하고 힘센 것과 달려가서 쫓아버려야 할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아흐, 어린 시절 처럼 개들과 함께 뒷산을 뛰어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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