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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3) 통일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치민 영면

1969년 8월 3일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1890~1969)이 영면했다. 현실 정치인 중에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던 일인자 중에 호치민 만큼 제나라 민중과 세계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뭐 세종대왕이 있다고???

 

호치민은 등소평 처럼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물론 팔자좋게 유학 간건 아니고 고학을 했지)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 회의가 열렸을때 피뜨거운 젊은 프랑스 공산당원 호치민은 호치민은 민족자결 원칙으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한참 헛바람을 불어넣은 우드로 윌슨 앞으로 서한을 띄우기도 하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스탈린, 이립삼들과 교류를 쌓으며 점차 성가를 높이게 된다. 이 와주엥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으니 호치민의 사망설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대형 오보 한 번 했다.) 심지어 1931년 모스크바에선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41년 고국 땅을 밟은 호치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주석직에 오른다. 여러 과정을 거쳐 53년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게 된다. 이 와중에 400킬로키터에 이르는 갱도를 둟어서 주요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갱도 전투는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김일성 또한 이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프랑스가 물러난 후 그 자리는 미국이 메꿨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다. 그 때부터 또 지난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이 시작됐다. 여기서 그 지난한 투쟁의 경과를 풀 필요는 없을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민중의 곁에서 보낸 호치민은 68혁명당시에는 구호로 불리었다. 체와 호는 자유와 저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이었다.(물론 일세계 특유의 오리엔턴리즘도 작용했겠지)

 

결국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 옆에는 가족 하나 없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그에게 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68년 호치민의 전기를 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쟝 라쿠튀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첨언: 호치민은 평소에 목민심서를 항상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레이건한테 눈도장 찍으러 가던 전두환도 기내에서 목민심서(한문본)을 옆자리에 두고 있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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