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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6)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은 이승만--;;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지적하는 거지만 건준의 '인공'과 이북의 '인공'은 줄임말은 같지만 다른거다. 건준의 인공은 말했다시피 조선인민공화국이고 이북의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지.

 

이 디렉토리를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건들은 상호 영향을 받고 있다. 45년 9월 6일 건준이 좀 급작스레 인공을 선언한 것은 4일 전 있었던 일본 항복 조인식(45.9.2) 의 영향이 크다. 미소의 분할점령이 공식화 되자 건준 측에선 마음이 급해졌고 양측 군대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전에 건준의 위상을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좀 급작스럽게 인공을 선언했는데 기정사실화는 커녕 미소양군은 기냥 썡까버렸다.(소련은 약간 다르긴 하다.) 미소양군 뿐인가?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파의 정치지도자들 조차 콧방귀만 뀌어버렸으니...오늘날의 관점에서 볼때 조급한 인공의 선언은 패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공 선언 이후 건준은 착착 인민위원회로 조직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극우반공주의자를 제외한 좌파 부터 중도우파까지 다 참여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대중도...이거 떄문에 빨갱이 소리를 오래 듣긴 했지만.) 그러나 그 인민위원회들을 인공이 제대로 제어 할 수 있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올시다ㅠ.ㅠ

 

물론 인공 선언은 조급했지만 그 주체인 여운형은 일제최말기에 이미 건국동맹을 조직했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로 부터 치안유지를 부탁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직후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친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내 정치지도자는 여운형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자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컸기에 45년 8월 31일에는 건준 지부가 전국적으로 145개에 달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 군정의 통제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승만이 45년 10월 16일에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인공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아버리면서 인공은 점차로 유명무실해졌다. 비극이라기엔 좀 비장미가 떨어지고 소극이라기엔 너무 꿀꿀한 사건이다.

 

그런데.....건준은 뭐가 좋다고 이승만을 인공의 주석으로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을까? 임시정부 주석당시의 공금횡령, 조선의 미국편입 주장 논란등으로 임정라인과 사이가 클어진지가 수십년이고 골수 반공주의자라 좌익계 항일세력과도 친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장인환, 전명운 의사 재판 통역 거부부터 시작된 지속된 스캔들로 악명을 떨쳤는데 말야..

 

여기서 한 에피소드를 들여다 보자.

 

해방 후 첫 여론조사는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 사이에 실시됐다. 그 결과는 당시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펴낸 잡지 《선구》12월호에 게재됐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1위는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이다. 2위는 이승만. 1위와 2위의 차이는 12%로 몽양이 33%의 지지를 받았다.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질문에도 몽양은 단연 1위였다. 그러나 정작 ‘내각이 조직될 경우 대통령감으로 적당한 인물’항목에서는 이승만이 1위를 차지했으며 여운형은 외무부장감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 이유가 뭘까? 내가 추측하기엔 이승만도 일단 항일은 항일인게 확실한데다가 큰 항일 단체 옆에서 좋던 나쁘던 항상 소란을 일으켰기에 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서 민중들에게 확고히 인식되었던게 아닐까? 게다가 초대 임정주석이기도 했을뿐더러 일본의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됨에 따라 미국박사, 영어능통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던것 같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여 이슈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잊혀지는 것보다야 욕먹는게 훨씬 낫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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