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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

1949년 9월 7일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1883-1949) 가 영면했다.  오로스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 꼽힌다. 오로스코 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듯 싶어 오로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두 이름을 나열해본다. 그 이름들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 이 3인은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서 전세게를 휩쓸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들 보다 더 일찍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힙합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그래피티 또한 이들의 벽화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고 바스키야를 비롯한 현대 미술들도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 또한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그렇다면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멕시코 벽화운동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에 닿는다. 멕시코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보다 오히려 더 앞선 것으로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불린다.

 

사파타와 판쵸비야는 결국 혁명 이후 죽임을 당하고 오브레곤이라는 정치지도자가 통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브레곤 또한 사파타의 농업개혁-무상 농지 분배, 이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투쟁하고 있다.-을 자신의 혁명정부에서 받아들였고 곧이어 그 혁명정부는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멕시코는 알고 보면 뜨거운 전통을 지닌 나라다. 멕시코의 대표적 대학인 UNAM대학 또한 전세계 대학중에 투쟁 순위로 따지자면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하다.)

 

뿐만 아니라 정교의 분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메스티조와 인디언의 지위 향상등에서 볼때 금세기 전반부 멕시코는 눈부셨다. 트로츠키가 왜 뜬금없이 멕시코로 망명해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뒤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튼 멕시코 혁명을 마무리 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적 국가 교육안을 실행했으니 문맹, 무학에 시달리는 농민과 자녀들을 위해 많은 교사들은 하방시켰다. 국가차원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 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 농장주들의 짓인 것이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대부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이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된것이니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며 민중들을 자극했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전 이 시대를 다뤘던 영화도 나오지 않았던가?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 칼로'( 사실 이런거 보면 유명하고 대단했던 넘들도 여성들한테 대하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근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들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 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년을 장기집권 해버린 것이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아시엔다(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짜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비판적 지지 뭐 이딴거 생각나지 않나?)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제도 혁명당이 배반해버린)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사파티스타는 NAFTA(북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며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1994년 1월 1일 봉기g했다.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이다. (몇년전에 어떤 학생운동 그룹이 이걸 따와서 쓰기도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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