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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현실검증력 손상?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의 글은 권력자 일반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기 보다 디제이(정권)에 대한 글이라 보여진다.

 

우선 정혜신이 들고 있는 '이중구속(double bind)'란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 보자면

 

미국에서 활동한 영국태생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1904∼1980)이 정신분열증에 관해서 '50년대에 제시한 이론으로 주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 가설에서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이는 임상병리학적 대상으로서 양자 공히 문제를 지닌 존재이다. 어머니 스스로 자신의 메시지(전갈)가 아이에게 혼란을 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아이 또한 어머니의 메시지를 제대로 수용할 능력이 없는 병리적 관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정혜신은 여기서 디제이를 어머니역할로 국정원인력을 아이역할로 출연시킨다. 디제이이든 국정원이든 모두 자기책임의 능력과 소임을 인식할 수 있는 개체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적절한 연출이 아니다. 정혜신이 연출자라면 실패한 연출이요, 의사라면 오진인 셈이다.

 

정혜신의 괴상한 진단에 의하면 디제이를 선택한 주권자인 국민은 흠결있는 지도자를 선택했던 셈이거나 디제이가 위선자라는 말이 된다. 나아가 디제이나 국정원-그들 조직의 생리가 어떻든- 은 정해신의 관점에서 보면 책임을 묻기가 곤란한 임상병리학적 대상이 되는 셈이다.


정혜신의 무리한 설정을 보도록 하자.

 

이른 바 이중구속의 한 당사자인 '정신분열증세를 가진 아이'에 해당하는 김은성 전 차장이 "‘불법 도·감청에 의존하지 말고 발로 뛰는 정보 수집을 독려했다’며 직원들에게 도청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는 것은 그 아이(국정원 또는 김은성 전 차장)가 혼란에 처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나아가 정혜신이 거론하는 당시 정황인 "...불법으로 통신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라는 대국민 광고를 보면 디제이정권의 의지를 국정원이 헤아리고 각인했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혜신의 무리한 '이중구속 사례 만들기'는 감행된다. "그(김은성)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권력자(디제이)의 이중구속 메시지가 전달됐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국정원과 김은성)가 어머니(권력자인 디제이)의 메시지들에 의해 혼란을 겪지 않았음이 <사실>인데 어떻게 이중구속의 개연성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아래는 정혜신이 지난 탄핵파동때 쓴 "당신들은 미쳤다"란 제하의 일부 내용이다.
"...정신병은 현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능력인 ‘현실 검증력’에 손상이 온 경우를 말하는데 이것이 정상인과 정신질환자의 변별 포인트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지금 정혜신에게 타당하다.


 

정혜신의 편집증적 편애

 

"‘어떤 경우에도 불법으로 통신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라는 대국민 광고까지 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 도청사건"이라는 발언을 보면 그렇다.

 

앞 부분은 디제이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반감을 가진 자들이 흔히 보여주는 태도이고 뒷 부분은 권력의 시녀역할을 했던 검찰의 수사내용을 맹신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살아있는 권력(노무현)과 은퇴한 권력(디제이)에 대해서 <더욱> 냉정하고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할 곳은 전자이다.  국정원과 검찰 또한 인적쇄신이나 과거사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 비판적 안목으로 봐야 할 기관이다. 그러나 정혜신은 정치10단이 이끄는 참여정부의 수장 노무현과 국정원 검찰에 대해서는 한 점 불신도 없는 맹목적 태도를 보여준다.

 

필자는 노무현정권의 개혁실패와 대국민 신뢰추락은 맹목적 노빠들이 부추겼다고 생각한다. 정혜신에 관련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친노인물이라고 레떼르가 붙어있다. 전공의로서 전문용어를 거론하며 우스꽝스러운 논리전개를 보면 가히 편집증적 편애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요즘 모 사이트를 일별하면 '디제이격하'관련 소재가 심심찮게 게시 돼 있다. 디제이가 언제 우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불굴의 민주화운동가였을 때는 독재권력에 의해 탄압받았으며, 국정을 맡았을 때나 퇴임 후 항상  끊임없이 비판의 도마위에 올려진 인물이다. 80노구의 노정객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해 주는 전향적인 평가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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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이의 ‘이중구속’
정혜신칼럼
 
 
검찰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에서 조직적인 불법 도청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은 이미 구속 기소되었고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은 김 차장의 공소장에 ‘공모범’으로 적시된 상태다. 국정원은 정치인 등 주요 인사에 대한 휴대전화 도청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했다고 알려진다. 김 전 차장은 ‘국가통치권 보존의 차원에서 관행적으로 도청했을 뿐’이라고 진술하지만 그 중에는 특정인의 금전 관계, 여자관계, 자기과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검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단다. 국정원이 도청으로 수집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수집한 정보와 뒤섞어서 종합적으로 보고하기 때문에 보고받는 사람은 도청자료가 들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검찰의 전략적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정원의 한 직원은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안기부, 중앙정보부가 수행한 업무의 70% 이상은 ‘반김대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국정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도 부당한 지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품성과 삶의 이력을 감안할 때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이중구속(double bind) 현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조금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다. ‘이중구속’이란 상대방에게 서로 상이한 언어적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동시에 부과되는 상황, 즉 서로 모순된 말과 행동이 동시에 전달되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엄마가 평소에 ‘말’로는 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연연하지 말라면서도 결과가 좋지 않은 성적표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다. ‘이중구속’의 메시지를 받은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란을 느낀다. 심하면 병적인 상태로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이 자신으로 인해 생긴 문제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평소 자신은 성적 따위가 제일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해왔던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욕망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권력자 주변에서는 이런 ‘이중구속’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리더의 심중을 읽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에게 이중구속의 모호한 메시지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김은성 전 차장은 ‘불법 도·감청에 의존하지 말고 발로 뛰는 정보 수집을 독려했다’며 직원들에게 도청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과정에서 이중구속의 메시지가 직원들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걔 때문에 골치아파’라는 보스의 짜증 섞인 혼잣말에 행동대원은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보스는 ‘죽이라고 한 적 없다’고 항변하겠지만 이중구속의 메시지에 이미 포함된 말이다. 리더가 이중구속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차단해 주지 않으면 주변인들은 인정욕과 질책의 불안감에 휩싸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권력자는 늘 자신의 말에 깃들 수 있는 이중구속 메시지를 경계하고 통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불법으로 통신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라는 대국민 광고까지 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 도청사건을 접하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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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교수의 문제있는 인식

이단적인 자유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무차별하게 모든 이데올로기에 관용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른 바 볼테르의 <관용>을 잘못 이해하여 사상의 자유시장에 아무런 진입장벽이 없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잘못된 관용론이요 볼테르의 진의의 와전이다.  볼테르는 파시즘이나 나찌즘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공중도덕등 관용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다. 국민의 결단 혹은 총의인 대한민국 헌법에도 무채색민주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소제목의 "이단"은 우리헌법과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관에 이단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썼다.)

 

미분화된 관념들의 파편들

 

김정란은 강정구나 조갑제의 관련 발언들을 보면 마치 자유가 부정된 것인양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자유의 본질은 공동체 구성원간의 상호의존성에서 그 한계를 또한 인식할 수 있으며 일정한 절차에 의해 제정된 규범-이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일반)의사이기도 함-에 의해 혹은 다른 기본권주체의 자유와의 경쟁으로 자유가 조정되는 경우가 있다.  조정의 근거로서 우리 헌법이 들고 있는 것은 질서유지, 공공복리, 국가안전등이다. 그럼에도 김정란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어떤 발언이라도 관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얘기한다. <김정란표 헌법>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김정란='유태인인 파시스트', 필자=나찌스, 갑돌이='공산주의자'인 단순한 공동체가 있다 할 때 누가 헤게모니를 잡느냐에 따라 가스실로 가거나 입에 재갈이 물리거나 타율적인 세계변혁의 대상이 될 것임은 속성상 운명이요 필연이다. 이들 이데올로기는 애초에 똘레랑스친화적인 것들이 아니다. - 노파심에서 여기서 상정하는 공산주의자는 폭력노선을 맹종하는 유형의 공산주의에 한정한다. - 이들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사상의 주체는 반사회적일게 명백하다.

 

관용뒤에 은폐된 김정란의 차별의식

 

김정란은 마치 스스로가 모든 사상에 무차별적인 관용은 베푼다는 듯 치장한다. 정말 그러한 지 인용하여 살펴보자.

 

"강정구 교수의 정치적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조갑제...지만원...한승조 교수 등...어처구니가 없고 가슴이 턱턱 막히.."
"학문적인 견해조차 개진할 수 없다면"/"아무리 험한 말이라도" "허무맹랑한 정치 공세..."
/ 앞은 강정구관련된 표현이고 / 뒤는 극우세력관련 발언이다.

 

이런 발언의 이면에는 등거리가 아닌 가치우열이라는 위계가 전제되어 있다. 똘레랑스뒤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이 입장은 결국은 이데올로기차별 혹은 사상차별로서 결과적으로 맹목적 관용이 아니라는 자기 고백인 셈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인류역사에서 검증된 앵똘레랑스(예; 파시즘, 나찌즘, 공산주의)를 배제하는 진입장벽있는 사상의 자유시장론이 일관된 인식임을 알 수 있다.

 

신연좌제거론하면서 연좌제적 비난 자행


 

김정란은 강정구교수 청강생들에 대한 경제단체 인사의 발언을 신연좌제라고 규정하고 비난한다.  그리고는 바로 박근혜를 "그녀 아버지(박정희)"와 관련시켜 비난한다. 이것 또한  바로 연좌제로서 형사상의 개인책임의 원칙에 반하는 전근대적인 잔재이다.  

 

박근혜의 자유민주주의관의 문제점을 친절하게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이라야 제대로이다. 필자 안목으로 보아,  김정란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곡해하는 마당에 박근혜를 비판하는 관점이 바를 리가 없다.


 

김정란의 부당한 성차별의 편린


 

"남성들의 투쟁 일색의 정치와 달리 사랑과 관용을 덕목으로 삼고 정치해야 할 여성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이라는 문장을 보자.
이것은 부당한 일반화이며 지성인이라면 피해야할 금기이다.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 녀에 대한 고정관념에 입각해 있거나 여성우월적인 차별의식이 내재해 있다 할 수 있다.  여권(남여평등)을 위한 글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있는 인식들이 흔하다.

 

이오십보 오백보

 

김정란은 "지구상에 이데올로기 투쟁을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인을 가진 나라는 이제 거의 하나도 없다"라고 한다. 친노세력의 수구딱지붙이기  일상화는  '민주화운동'의 위상을 그들의 입장을 제고하기 위해 부당하게 독점.참칭하고 있음은 주지사실이다. 과거에 한나라당이 색깔론으로 민주인사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라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이며 맹목적인 수구딱지붙이기는 우리사회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새로운 부정적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다른 입장에 대한 배타적 태도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동급인 이념사냥인 것이다. 

 

이번 참여정부의 국정운영미숙은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교훈을 준다. 사회운동가로서의 역량과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은 별개라는 점이다.

 

노빠인 김정란은 국민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중 하나가 권력자를 맹목적으로 비호하는 먹물들의 해악이다.  우리 헌법은  부정적권력관을 토대로 하는  권력분립제도를 채택하였다.  김정란이 노무현의 대연정제안을 "상상적 정치행위"라는 둥 살아있는 권력을 미화한 것은 국민의 (일반)의지인 헌법과는 어울릴 수 않는 행태라는 것을 인식했으면 한다. 


조갑제나 강정구나 ‘말할 권리’ 있다
강정구 견해 온당하지 않으면 합리적 논쟁 통해 부당함 밝히면 그만
이에 일전을 치르려는 박근혜는 혹시 박정희시대를 자유민주체제로 아나?
세설

나는 강정구 교수의 정치적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발언할 수 있는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선일보>의 조갑제씨나 시스템 클럽의 지만원씨, 고려대학교 한승조 교수 등 극우세력의 발언에 어처구니가 없고 가슴이 턱턱 막히지만, 그들을 법적으로 억압하는 데는 반대한다. 조갑제씨는 국군을 상대로 쿠데타를 선동하는 발언마저 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는 한, 그를 구속할 수 없으며, 논리도 이치도 닿지 않는 말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정구 교수 역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사상과 발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다. 조갑제씨 등에게 말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강 교수에게도 말할 권리가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말이라도 해도 괜찮고, 다른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은 학문적인 견해조차 개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다.

그런데 강정구 교수의 발언을 둘러싸고 최근에 한나라당은 나라가 절단이라도 날 것처럼 요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 교수의 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며, 대중은 물론 학계의 호응도 받지 못하는 특이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아무도 북한체제를 동경하지 않는다. 나는 구속이고 불구속이고 학문적 견해가 수사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견해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그 견해의 부당함을 밝히면 그만이다.

강정구 교수의 구속수사에 반대하는 열린우리당이나 정부가 강 교수를 옹호하고 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정치 공세에 지나지 않는다. 천정배 장관의 지휘권 행사도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법적 절차일 뿐이다. 가능하면 인신을 구속하지 말고 수사하라는 원칙적 입장 천명에 불과한 것이다. 공안사범의 경우, 일반 사범의 거의 6배에 가까운 구속율을 보인다고 한다. 이것이 온당한 일인가? 우리 나라가 혐의만 있으면 무조건 잡아 가두고 보는 인권 후진국인가? 대학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대체 어디로 도망을 갈 것이며, 엄연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어떤 증거를 어떻게 인멸한다고 반드시 잡아 가두어야겠다는 것인가? 천정배 장관의 지휘권 행사에 집단 항명 움직임마저 보이는 검찰 역시 이해할 수 없다. 검찰은 오히려 구속수사를 지휘받았다 하더라도 불구속 입장을 견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인권을 가볍게 보는 검찰이라면 그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강 교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은 취업시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공식석상에서 내뱉는 경제관련 단체 인사의 멘털리티는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 중세인가? 어떻게 취업을 빌미로 실제적으로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신연좌제일 뿐만 아니라, 돈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겠다는 지극히 천박한 태도다.

박근혜 대표는 강 교수 건을 재보선 선거에 알뜰히 이용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나라가 붉은 세력에게 점령당하기라도 한 듯, 노골적인 선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방문해서 단독 면담을 한 적도 있고, 그에게 선물도 했으며, 그에 관해 호의적인 발언도 한 바 있다. 이건 박 대표가 몸을 던져 막겠다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박 대표는 여러 차례 방북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적성국가의 우두머리를 만나 비밀회합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만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박 대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 아닌가? 박 대표는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박근혜 대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가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던 시대였다. 박 대표는 아버지가 유지했던 독재체제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독재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던 시대의 정치제도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툭하면 정체성을 들고 나와 정통성 100%의 현정권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박 대표의 확신인 것 같다. 박 대표 아버님이 운영하셨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일인독재체제이며,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시행하고 있는 정치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을 앞세운 전체주의였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어떤 발언이라도 관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시민의 인신을 구속할 수 없다. 조갑제씨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를 구속 수사하겠다고 검찰이 나선다면, 나는 강정구 교수의 구속에 반대하는 것과 똑같이 반대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나라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 숱한 세월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지새우며 좌/우 공히 숱한 상처를 입었던 공동체 안에 다시 이데올로기 망령을 불러들이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다. 남성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나서서 말려야 하는 것이 남성들의 투쟁 일색의 정치와 달리 사랑과 관용을 덕목으로 삼고 정치해야 할 여성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

▲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그런데 박 대표는 앞장서서 증오에 기반한 철지난 색깔논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 박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버지 시절처럼 다시 사상을 빌미로 한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이것이 그간 박 대표가 부르짖어 왔던 상생의 정치이며,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인가? 이제 제발 메뉴 바꾸고 미래로 걸어가자. 지구상에 이데올로기 투쟁을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인을 가진 나라는 이제 거의 하나도 없다. 한나라당이 그토록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좀 유지하자. 21세기 복판에 아직도 색깔통을 들고 난리법석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김정란 상지대학교 교수(문화콘텐츠학과)가 ‘세설’의 새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깊고 날카로운 글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문화평론가 남재일씨는 여러 사정으로 잠시 글쓰기를 쉬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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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폐장유치경쟁-당근에 휘둘리는 그들

방폐장 유치전이 이른 바 지역감정차원의 대립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 모습을 일별하며 머리에 스치는 리영희교수의 유행에 대한 부정적인 글이 생각이 난다.

 

소비주체인 대중들은 자본권력의 노리개가 되어  시시때때로 유행을 좇아 경제력비용을 쏟아 붓는다.  특히 비싼 옷에 붙은 브랜드가치나 유행의 순환이  영악한 대중심리를 이용한 탐욕스런 자본권력의 음모의 산물이라는 취지의 글이다. 그들은 자본권력의 영악한 상술에 현혹되어 자신이 기만당한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과시욕을 충족하려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 * *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방폐장유치경쟁도 한수원이라는 자본권력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듯 보여진다. 원자력발전의 타당성여부에 대한 교통정리도 안 된 상황에서 말이다.

 

어떤 자는 삭발을 하며 유치에 단호한 의지를 과시하고, 어떤 자는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유치경쟁심리를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막대한 자금지원이라는 당근이 지역주민의 눈 앞에서 흔들리며 현혹하고 있다.

 

방폐장이 정말 좋은 시설이라면 막대한 자금지원이 뒤 따를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수적인 지원이 불공정하다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방폐장유치지역에 뒤따르는 개발자금, 정책들은 혐오시설에 대한  배상금이다. 

 

즉, 혐오시설유치에 따른 비효용(고통, 지역위상에 대한 부정적평가등)에 대한 상응한 배상이 초과했다는 자의적 판단에 기인하여 경쟁이 유발되었거나,  발등에 떨어진 민생문제때문에 유치하는 것이거나이다.

 

이 때 비효용은 해당지역과 인접지역에서 또 다른 그들(자손)이 장래에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계량하기가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 이기적이며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하리라는 것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즉  당장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민들의 비효용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역민의 투표만에 의해 단순하게 결정될 문제가 아닌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민주적인 부안방폐장강행기도가 주민들의 결사반대에 의해 무산되고, 이어 진행되는 작금의 유치경쟁의 과열 양상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희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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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글이긴 하지만....

님으로 하여금 필자의 원문에 대한 최초의 트랙백에 걸린 사실관계를 보면

 

"피고인들(조승수와 주민 이모씨등)은 음식물자원화시설 설치 문제로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어 있던 중산동 주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이미 시행될 계획으로 있던 시설 설치계획의 시행을 막거나 재검토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가 판결문에 나온 사실관계입니다.

 

대법원에서 검토할 사안은 대법원변호인단의 변론은 위의 사실관계가 사전선거운동인지의 여부에 있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사전선거운동이라고 아래 판결문에서 판시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임박한 시점에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아니고 선거구민인 위 중산동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점, (다른) 피고인 이모씨가 조승수의 득표 활동의 일환으로 음식물자원화시설 설치 문제에 관한 조승수측 입장 해명에 노력해온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승수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지를 수반하는 행위로서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보아햐 하고, 통상적인 정당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님은 조승수가 글을 썼을 뿐 복사 배포는 타인이 했으므로 사전선거운동이 아니므로 1,2심에서 사전선거운동으로 판단한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입니다.

 

재차 언급하지만 님은 우선 법률문제와 사실문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법원은 이 사안을 이렇게 판단하게 됩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재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1,2심에서 확정된 사실관계인 쌍따옴표 내 "피고인들(조승수와 주민 이모씨등)은 음식물자원화시설 설치 문제로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어 있던 중산동 주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이미 시행될 계획으로 있던 시설 설치계획의 시행을 막거나 재검토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 이 부분을 기초로 이게 사전선거운동인지 아닌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률문제이지 사실문제가 아닙니다.  즉 변호인단측 주장은 그 사실관계가 사전선거운동이 아니라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쌍따옴표로 인용된 부분-사실관계-이 부당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우나 양형문제란 구성요건해당성-위법-유책단계를 넘은 단계이므로 그것은 오로지 법률문제입니다. 양형은 국가기관인 법관의 '법과 양심'을 기준으로 하는 기속재량영역이므로 대법원이라 할 지라도 대법원규칙등에 규정된 양형관련하여 참작할 사항을 누락했다든가 하는 경우에 대법원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역시 법률적용의 누락등으로 법률문제입니다.

 

님은 필자가 형평에 관련하여 단순히 금품여부에 따라 단순비교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트집잡고 있습니다.

 

* * *

"비판자(행인)를 필자(시민25)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똑같이 비판한다면 대립당사자인 법률전문가들인 변호인과 재판관들의 권위를 구체적 관계를 언급함이 없이 자신의 개인적 권위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불합리한 주장인 것이다. - 물론 개인의 권위가 변호사나 공공기관의 권위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무리한 주장을 토대로 필자의 주장이 신뢰성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비난한다면, 비판자의 주장이나 논리에 대해서도 필자 또한 신뢰성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는 독선이지 토론이 아니다. 비판자의 필자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자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위 문단은 재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필자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글을 쓰려고 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고 다만 여러 정황(강금실이란 변호인, 의원 100여명의 탄원서)을 비추어 보건데 위법임이 필시 분명하다라고 한 것은 님과 다른 인식을 토대로 글을 쓰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님이 '사실관계'라며 링크시켜 놓은 것등을 종합해서 사실관계를 꿰맞추어 보니 위에 언급한 '사실관계'로군요.

 

만약 여전히 님의 생각과 같은 법리오해(사전선거운동이 아니다라는)를 법원이 범했다면 민노당이나 조승수는 정의를 위해서 마지막 권리구제절차인 헌법재판소에 문의해 봐야 합니다. 그들이 그런 구제절차로 나아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승소가능성이 없으니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님과 민노당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는 조승수의원면직건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고 진보의 싹을 잘랐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인식임에도 최후의 구제수단을 밟지조차 않는다면 그 자체가 불의한 일이 될 것입니다.

 

"통상의 정당활동이 될뿐인가?"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도 위에 언급한 '사실관계'가 사전선거운동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즉, 통상의 정당활동과 비정상적 정당활동을 구별하여 위법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소립니다. 사전에 선거운동이 있으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 위반양태가 조승수의 건처럼 외형상 통상의 정당활동인 경우와 외형상으로도 불법정당활동으로 나눌 수는 있습니다. 필자는 두 양태가 동질적 비난가능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님은 형식논리학에서 or의 접속사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필자가 세 경우를 or로 연결하여 언급한 취지는 세가지 모두에 해당하거나 셋 중 하나만 해당해도 되는 경우로 사용했습니다.

 

이제 원문으로 되돌아가 필자가 조승수는 범죄자이지 영웅이 아니라란 제하의 각각의 내용을 재음미하시고 님이 딴죽을 건 사안들이 바른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님은 대법원이 매우 보수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업무처리방식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까지 구구하게 설명할 이유까지 없지만,  법원은 본래 제기된 사안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소극적입장에 있고, 법을 형성하는 역할이 아니라 구체적 사안에 대해 법이 무엇이다라고 선언하는 기관입니다. 당연히 보수적일 수 밖에 없지요. 다만 각각의 법관들이 재량영역에서 그들 가치관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에 따라 판결의 결과가 나뉠 지언정 역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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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외눈박이식 인권관

아래는 노회찬의원(이하 경칭 생략)이 언론매체에 그 권위를 인용하며 국보법의 폐지당위성을 주장한 UN인권위 사무국의 북한인권에 대한 문서-아래 참조-이다.

 

필자는 노회찬이 인권보장이라는 존엄한 가치에 지배되어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운위하는 진정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노회찬이 모든 방면에 관여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불가능을 간과하여 형평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당의원에 대한 대법원의 의원직상실에 해당하는 판단을 형평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는 것을 볼 때,  필자 또한 노회찬에게 국보법폐지주장과 북한당국의 인권유린참상에 대한 침묵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미디어에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소스를 보자면 노회찬이 서울시장후보니 대권주자라느니라는 말이 나돈다.

 

그러나 현재의 노회찬의 외눈박이식 문제제기는 결코 노회찬의 정치적 입지를 제고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노회찬의 대북인권에 대한 부정적 발언은 전혀 없었다.

 

덧붙여 북한당국의 인권유린참상에 침묵하며 특정인의 인권만을 부각하는 여당과 또한 북한의 인권참상만을 부각하는 한나라당의 외눈박이식 현상재단은 난형난제의 정략으로서 바른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노회찬의 북한인권관련 발언 인용
"민노당 노회찬 의원은 “북한 인권을 다루려면 실질적 인권 개선으로 나아가야 하고 여러 가지 인권 침해설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 내부요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의해 가해지는 여러 가지 위력이나 방해 등도 감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아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황

국제연합 인권위원회 사무국

요 약

이 문서는 인권위원회가 인권고등판무관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 포괄적인 대화에 참여시키도록 요구한 2003/10 결의안에 따라 제출되는 것이다. 이는 위원회가 결의안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제시한 광범위한 사안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별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결의안 2003/10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무서명 각서(note verbale)를 담고 있다.

이 각서는 가장 최근의 정보를 담을 수 있도록 늦게 제출된다.


서 론

1. 결의안 2003/10에서, 인권위원회는 인권고등판무관(UNHCHR)이 인권 분야 기술협력 프로그램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포괄적으로 대화를 가질 것과, 다음 60차 인권위에 조사결과들 및 권고사항들을 제출할 것을 요청하였다.

2. 위원회가 고등판무관에게 포괄적인 대화를 가질 것을 요구한 이래로 이 각서는 위원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제시한 광범위한 권고사항들에 관한 정보도 제공한다.


Ⅰ. 기술적 협력

3. 인권분야에 있어서 유엔의 권고 서비스와 기술협력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된 1955년 12월 14일 총회 결의안 926(X)에 따른 표준 정책과 발전된 관행에 따라, 인권분야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은 회원국의 재량에 있으며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 질 수 있다. 1993년 12월 20일 총회 결의안 48/141에 의해 형성된 위임사항에 의해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은 그 창립 이래로 50개국 이상에게 권고 서비스와 기술협력을 제공해 왔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기술협력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다는 관점에서,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제네바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에 접근하였다. 인권고등판무관실 관계자와 대표부 실무자 접촉 후 고등판무관대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 앞으로 2003년 8월 8일 기술협력 사안 논의를 위한 초청장을 보냈다. 그의 편지에서 고등판무관 대리는 관행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잠재적인 협력분야를 제시할 수 있도록 인권판무관실로부터 필요요소평가임무단(a needs assessment mission)을 초청할 수 있다고도 제시하였다. 고등판무관 대리는 그 임무단의 조사결과들을 고려하여 가능한 기술협력 활동에 관해 그의 관찰과 권고 사항들을 위원회에 제시한다.

5. 위의 언급된 편지에 대한 답신 부재와 결의안 틀 외의 것들을 포함하여 다른 협력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고등판무관 대리는 2003년 12월 16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위원회가 그들의 회원국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들간에 2003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차 정기보고서 심사기간 동안에 갖게 된 대화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 후속 편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 앞으로 썼다. 인권고등판무관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협력을 지속하며 강화하는 정신으로 고등판무관 대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태평양 지역의 인권의 증진과 보호를 위한 지역적 협력 틀 아래 인권고등판무관 활동의 맥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협력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6. 고등판무관 대리는 2003년 12월 30일 평양으로 동서신이 전달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인권고등판무관실과의 가까운 협력을 중요시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부로부터 받았다.


Ⅱ. 인권침해에 대한 보고

7. 위원회는 결의안 제1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심각한 인권 침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이는 다음과 같은 사항도 포함한다:

(a) 고문과 기타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 공개 처형, 정치적 이유에 따른 사형, 많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 광범한 강제 노동,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인권 존중의 부족;

(b) 사상·양심·종교·의견·표현·평화적 집회·결사·정보 접근 등의 자유에 대한 광범하고 심각한 제약과 국내외를 자유롭게 여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부과되는 제한;

(c) 장애 아동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차별 그리고 그들의 필요가 충분히 고려되고 있지 않는 사실;

(d) 여성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침해.

8. 결의안 채택 이후, 인권조약기구들과 인권위원회의 특별 절차의 원조 아래 위의 언급된 사안들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개 사항들이 있었다.

9.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03년 11월 제31차 위원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국제규약 (E/1990/6/Add.35)의 실행에 관한 제2차 정기보고서를 고찰했으며 결의안 제1조에 언급된 몇 가지의 사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관찰보고(E/C.12/1/Add.95)를 채택하였다:

(a) 위원회는 장애아동들이 정규적인 학교 체계에 포함(제25항)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깊은 우려를 표명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현재의 체제를 변화시켜서, 이 아동들이 정규 학교 제도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학생들, 교사 그리고 가족들간에 이 아동들의 특별한 필요 요구들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교사들이 정규 수업시간에 효과적으로 그들을 보조 할 수 있도록 훈련(제46항)하는 조치들을 권고하였다.

(b) 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여성에 관해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향유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지배적인 전통적인 사회적 태도와 관행의 지속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여성에 대한 비차별적 국내 입법의 부족과 정치적, 행정적 기관과 전체적으로 산업분야에 있어서의 의사 결정 지위에 지속적인 사실상의 불평등(제13항)에 대해서 우려하였다. 따라서 국내 입법이 여성에 대한 비차별 원칙을 완전하게 실효성을 가질 목적으로 그리고 당국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인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여성의 권리 증진과 촉진을 목적으로 의식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포함하는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실행하도록 위원회가 권고하였다(제33항). 위원회는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가정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조항을 포함시키기 위한 법률 수정을 권고하였다(제39항);

(c) 놀랍게 증가하는 출산사망률에 대해 우려하며 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태아의 건강관리 서비스와 출산 시 의료지원을 포함하여 출산 관리 요건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조치를 권고하였다(제44항).

10. 위의 언급된 사안과 관련하여 결의안 채택 이후, 인권위원회의 특별절차에 의해 행해진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몇 특별절차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관 및 식량권 특별보고관1)은 이전 보고서의 인권 우려 사안을, 그 발생 원인과 결과2)에 대해 다루었다.


Ⅲ. 위원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조치들

11. 아래는 결의안 제2항에서 요구되는 관련 정보이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게 다음의 우려에 대해 응답하라는 것이다:

(a) 아직 당사국이 아닌 인권규약을 승인할 것. 작성 중 결의안에서 명백하게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체결되거나 승인된 인권규약은 없었다.

(b) 위의 언급된 사안들에 대한 관련 정보를 제공할 것. 2004년 1월 21일자 무서명 각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특별히 이 각서의 준비 관계로 정보를 제공하도록 초청되었다. 2004년 2월 4일자 각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은 위원회에 보고하고 싶은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구술서는 이 보고서의 별첨으로 제공된다;

(c) 아동권리위원회와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실행할 것:

(ⅰ) 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기 보고서 심사에 이은 1998년 6월 5일 채택된 결론적인 보고(CRC/c/15/Add.88)에 포함되어 있다. 위원회는 제2차 정기보고서 심사 기간 중 2004년 6월 차기 회의에서 권고의 이행실적을 검토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CRC/C/65/Add.24). 위원회의의 전 회기 실무반은 2004년 2월 36차 회의에서 보고서에 관한 예비 논의를 실시했다. 보고서 심사와 연관하여, 2004년 2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위원회의 의장과 위원 한 명을 2004년 4월 방문하도록 초청하였다;

(ⅱ) 인권위원회의 가장 최근의 권고사항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차 정기보고서(CCPR/C/PRK/2000/2) 심사 후인 2001년 8월 27일 채택된 결론적인 관찰 보고(CCPR/CO/72/PRK)에 포함되어 있다. 위원회는 17년이 더 지난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화를 재개하는 기회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인권상황에 관한 정보의 부족과 규약의 실행에 관한 사실과 데이터의 부재가 유감스러웠다. 결과적으로 위원회의 관심 앞에 놓여진 신뢰할만하며 실제적인 규약의 위반 침해 주장들은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가 없었으며 위원회는 당사국 영토 내의 개인들과 사법권의 대상이 완전하고 효과적으로 규약에 명시된 기본적인 권리들을 누릴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항들을 제외하고 위원회는 우려의 여러 분야를 확인하였으며 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권고를 제공하였다. 위원회의 권고와 관련된 정보는 2004년 1월 1일까지 예정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차 정기보고서에 포함되도록 요구되었다. 작성 기간 중에 이 보고서는 미해결 상태였다;

(d) 특히 인도적인 이유로 다른 국가로 이주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들의 제제를 삼가할 것. 이 각서가 다루고 있는 기간 동안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는 구직과 보다 나은 생활조건을 목적으로 여권 없이 외국으로 이동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 다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면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다는 정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E/C.12/1/add.95, 제15항). 위원회는 구직 또는 보다 나은 생활조건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제거하기 위해 국내법을 검토하도록 권고하였다 (ibid. 제35항). 위원회는 또한 사회적 지출을 위한 예산의 배정을 적절한 때에 증가시키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지원, 그리고 직업을 찾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초청하였다 (ibid, 제38항);

(e) 인권의 분야에 있어서 유엔체계와 협력할 것. 결의안 제2(e)항에서 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제한 없이 국가의 상황과 관련된 주제별 절차, 특히 식량권 특별보고관, 종교적 불관용에 관한 특별보고관, 고문의 문제에 관한 특별보고관, 그리고 자의적 구금과 강제적인 또는 비자발적인 실종에 관한 실무반에 협력하도록 명백히 요청하였다.

(ⅰ) 식량권 특별보고관은 2003년 5월 8일자 편지에서 임무 수행을 위한 허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 후, 총회 앞으로 보내온 보고에서 특별보고관은 그의 요구에 대해 북한 정부가 반응을 하고 임무 수행을 위한 허가를 내도록 촉구하였다 (A/58/330, 제5항). 오늘 현재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의 답신은 없었다;

(ⅱ) 의견과 표현의 자유 권리의 증진과 보호에 관한 현재의 특별보고관은 2002년 10월 7일자 편지에서 그의 전임자가 1996년 3월 18일에 요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을 재차 요청하였다. 특별보고관은 이 요청에 대해 위원회에의 가장 최근의 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E/CN.4/2004/62, 제22항). 아직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의 어떠한 초청도 받지 못하였다;

(ⅲ) 종교적 불관용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1999년 5월 16일자 편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2002년 7월 29일지 편지에서 반복되었다. 이 문제는 특별보고관이 최근 위원회 앞으로 보낸 보고에 언급 되어 있다 (E/CN.4/2004/63, 제5, 6항).

(f) 외국인 납치와 관련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할 것. 일본 정부대표들과 납치된 일본국민의 가족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된 일본국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지원을 요청하고자 인권고등판무관실과 접촉하였다. 강제적인 또는 비자발적인 실종의 실무반은 이 문제에 몰두해 왔었다. 특히 실무반은 몇 년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요원들에 의해 일본 또는 유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된 아홉 명의 일본국민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E/CN.4/2003/70, 제84, 85 그리고 326항; E/CN.4/2004/58, 제96, 98항도 참조);

(g) 국제적으로 인정된 노동 기준에 따를 것. 결의안의 채택 이후, 이 사안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위원회에 의해 다루어졌다. 특히, 위원회는:

(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제노동기구(ILO)의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따라서 주요 국제노동기구의 규약들을 승인하도록 권고하였다. 가입을 촉진하기 위하여 위원회는 국제노동기구의 3자 대표체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필요한 법률개혁을 신속히 단행하도록 권고하였다 (E/C.12/1/Add.95, 제32항);

(ⅱ) 개인이 자유롭게 그/그녀의 직업 또는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반하는 현재의 강제적인 국가의 직장배치 제도로 인해 일할 권리가 완전히 보장되지 못할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든 사람들이 그 또는 그녀의 직업과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입법 조치를 취하도록 장려하였다 (ibid, 제34항);

(ⅲ)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률이 여당에 의해 통제되는 단일한 노동조합 구조를 제정하고 있는 바,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의 실행이 국가안보기관들의 허가에 좌우되는 바, 국내법이 파업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바를 우려와 함께 주목하였다 (ibid., 제16항). 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와 파업할 권리를 포함하여 노동조합의 권리와 관계된 규약의 조항들에 일치하도록 국내 법률을 검토하기를 권고하였다 (ibid., 제36항).


Ⅳ. 인도적 상황

12. 결의안에서 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험한 인도적 상황에 대한 보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며 인도적 기관들, 특히 유엔기관들이 공평하게 인도적 지원 수행을 보장할 수 있도록 자유롭고 방해 받지 않는 출입을 보장하도록 당국에게 요구하였다. 인도적 상황조정실3)이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목표가 정확한 지원은 취약한 사람들의 삶에 즉각적인 반응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으로부터의 실질적인 이득은 질질 끄는 경제적 어려움과 약화된 국제적 반응에 의해 도전에 직면한다.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도적 상황은 계속해서 복합적이며 생존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 위태로운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취약한 수 백 만 명의 시민들의 안녕을 위한 실질적인 국제적 지원을 요구한다. 인도적인 노력이 계속해서 추구되는 반면 인도적 반응 만이 구조 지원과 기본적인 서비스 지원만은 심각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자명해 지고 있다.


부속 문서

2004년 2월 4일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가 인권고등판무관실 앞으로 보내는 무서명 각서

제네바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는 인권고등판무관실에 경의를 표하며 다가오는 위원회를 위한 판무관실의 보고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반영시키고 싶은 정보를 요구하는 2004년 1월 21일 판무관실의 각서에 대하여, 인권위원회의 2003/10 결의안에 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공민들의 독립적인 권리의 실현을 우선순위의 정책으로 택하고 있으며 그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외세에 의한 분단의 고통과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과 압력을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은 다른 어떠한 민족보다도 독립적인 권리들의 향유를 열망하며 외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평화적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정부는 모든 민족들의 주권을 보장하도록 고안된 국제적인 협력과 협동을 이루기를 바라며 “인권”의 구실로 추구되는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도 반대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몇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법률제도에 가입하였으며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인권의 정치화 도전과, 이중적 기준 등에 반대하였으며 진정한 인권위원회와 기타 모든 인권회의를 이루기 위하여 실질적인 논의와 협력을 추구해 왔다.

인권 분야에 있어서 양자협력을 위해 실질적인 노력이 행해졌다. 정부는 2001년 6월 브뤼셀에서 양자인권대화를 위한 유럽연합-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초기 접촉을 시작으로 유럽연합과 몇 차례의 인권 대화를 실시했으며 유럽연합 제국, 특히 독일, 스웨덴, 영국 대사들과 정기적인 연락을 인권에 관해서 평양에서 가졌다.

인권문제는 유럽연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연례 정치적 대화, 유럽연합-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의 전망에 관한 세미나와 다른 양자 형식의 대화의 주요한 사안으로 놓여졌으며 북한의 인권전문가들은 런던과 스톡홀름에서 인권 훈련과정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비록 질문서의 본질이 일방적인 국내간섭이었지만 2001년 10월 유럽연합에 의해 제출된 인권 질문서에 관대하게 답을 하였으며 노동교화소 출입과 전수감자와의 접촉을 2002년에 허용하였다.

유럽연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계가 수립된 후 2년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보여온 협력은 유럽연합의 인권존중 옹호정책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부터 비롯하였으며 상호 이해와 협동을 통해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일방적으로 북한과의 인권분야의 대화와 협력을 폐기하였으며 직접 연관된 당사국과의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급작스럽게 상정된 결의안의 채택을 강요하였다.

유럽연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극하기 위한 2003년 초 미국의 시도와-우연이 아니게-연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와 인민들에게 또 다른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밖에는 그 뜻이 해석될 수 없다.

2003/10 결의안은 유럽연합의 압력 아래 채택이 되었으며 본질적으로는 인권과 무관하며 미국의 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책과 함께 하는 정치적 결탁의 산물을 의미하며 오직 유럽연합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상정과정과 내용에 있어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미지를 인공적으로 훼손하려고 고안된 비문명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2003/10 결의안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결의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의 주권과 진정한 권리를 박탈하려는 명백한 목적을 추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이 반대하는 결의안을 실행시킬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엔의 회원국으로서 헌장의 목적과 원칙에 입각한 주권의 평등에 바탕을 둔 평화, 안보, 독립적인 발전과 모든 나라와 민족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대표한다. 우리는 다른 국가와 민족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어떠한 형태의 움직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제네바 소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는 인권고등판무관실이 위원회 보고에 위의 내용을 반영시키고 이 기회를 활용하여 최고의 고려에 대한 확신들을 판무관실에 재조정하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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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표 헌법과 초헌법적 권위주의

부제 : 문재인 수석의 부당한 인식과 똘레랑스

 

이래 인용부분은 문재인수석(이하 경칭 생략)이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 행사에 관련하여 그 정당성에 관해 웅변한 내용중의 일부이다.(필자가 이 글에서 지칭하는 헌법은 민주적정당성을 가진 '87년 헌법을 가리킨다.)

 

"...검찰도 그런 시대정신을 존중해 나가야 된다. 문제는 그 시대정신을 그러면 누가 해석하는가, 그 시대정신을 물론 검찰도 하고 또 법원도 하고 여러 곳에서 하겠지만 적어도 정부 내에서는 정부기관 간에 이 시대정신에 대한 해석이 다를 경우에 그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

 

문재인이 시대정신(여기서는 법)은 사법부도 해석하고 행정부도 해석하는데 "(행)정부내의 정부기관간에 시대정신(법)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문재인의 이러한 부당한 인식과 유사하게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선거법관련, 권력구조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그 일단을 내 비친 적이 있다.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자연)법다워야 하는 헌법은 일응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 혹은 국민의 결단이라고 일컬어진다. 성문법주의인 우리나라 헌법전은 그 자체가 종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의 의사의 결집(복수의 사상의 주체의 결단 내지 의지)이라 할 수 있다. 이 헌법전에 시대정신이 구현돼 있으며 공동체의 최고규범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선거법개정문제나 사회양극화 해소문제 또한 평등이념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수렴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청산이란 참여정부가 새롭게 안출한 그리하여 신패러다임이 아니라 헌법에서 규정한 당위적 상태로의 복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무현정권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니 뭐니하며 미화. 선전한 것은 포퓰리즘이거나 정치선전인 셈이다.

 

이 헌법전에 정해진 소정 절차에 따라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피선된 것이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도 또한 헌법전에 규정된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노세력(일부 언론매체 포함)들은 탄핵이 부당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가 결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친노세력들과 민노당은 적어도 강정구의 사상의 자유니 뭐니를 운위할 처지가 아니다. 헌법에 체현된 주권자의 (일반)의사이기도 한 탄핵제도를 무시하여 정치적으로 단죄하는 행태를 실질적으로 헌법제정(개정)권력의 주체인 주권자인 국민의 경합적 사상의 무시이거나 유린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삼권분립제도를 채택한 배경은 권력자는 "부패하거나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농후하다"라는 비관적 인성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삼권 중 입법부는 헌법을 구체화하는 법 제정권을 가지며, 사법부는 구체적 사건에 대해 법이 무엇인지를 밝혀 선언하며, 행정부는 법(률)을 일반적으로 집행하는 국가기관이라 이해할 수 있다.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헌법재판소에, 궁극적 권원은 주권자의 (일반)의사

 

위에 인용한 문재인의 발언 "(행)정부내의 정부기관간에 시대정신(법)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을 때 최종적인 해석, 권한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라는 인식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부기관간의 권한에 대해 다툼이 있을 때는 권한쟁의라 하며 최종 유권해석기관은 헌법재판소이다. 이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정한 주권자의 명령이며 (일반)의사이다.

 

법조인이기도 한 문재인이 시대정신을 법률관계가 아닌 것으로 한정하여 개혁 방법론등의 재량영역에서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간의 최근 문제된 사안은 법률관계이다. 대통령이 최종해석권(한)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문재인의 이와 같은 황당한 인식은 주권자인 국민의 권위인 헌법을 참징하며 주권자를 농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반헌법적인 부당한 작태라는 점에서 반민주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당한 인식을 가진 참모가 대통령을 보필하고 있으니 노무현의 초헌법적 발언들이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대통령은 입법기관도 아니요, 사법기관도 아니다.

 


천정배장관의 지휘의 당위적 형태

 

천정배가 행사한 사상 초유의 지휘권은 검찰의 부당한 인신구속 관행 일반에 대한 지휘였어야 했다. 즉 "남용되어 온 관행적 인신구속을 개선하라"라는 형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피의.피고인에 대한 인권보장차원에서 이처럼 일반적 지휘여야 함에도 특정의 구체적 사안인 강정구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독립이 보장되어야 하는 검찰업무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은 국민의 의사의 결집체요 곧 일반의사이다. 그런 까닭에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곧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요, 시대정신을 노무현만이 안다는 식의 노빠들의 궤변은 헌법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초헌법적인 파쇼요 독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헌법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개폐되기 전에는

 

공직에서 봉사하는 자들은 누구나 금과옥조로 존중해야 하는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의지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피선되어 국정을 운영할 때는 '선서'한 바대로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지 문재인의 황당한 인식처럼 헌법위에 군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관용(똘레랑스)개념의 와전

 

이른 바 저명인사들의 글에서 강정구건에 대해 사상의 자유니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즐겨쓰는 볼테르의 말이 있다.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가 그것이다.

 

위 볼테르의 발언은 파시즘이나 나찌즘이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18세기 초엽에 신앙(신교과 구교)의 자유에 관련된 발언이다. 구교도인 볼테르입장에서 구교의 신교에 대한 배타성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말인 것이다.

 

그런데 항간에서 쓰여지는 형태를 보면 마치 모든 사상들이나 생각들이 무차별하게 가치로워 존중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와전되어 쓰이고 있다. 볼테르의 <관용론>에서 따온 아래 글을 읽어보며 '똘레랑스'와 '자유의 한계'에 대해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시민 개개인은 ...그 이성이 지시하는 것만 고려해도 될 것인가? 그렇다. 단,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믿거나 믿지 말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법과 관습을 존중해야 할 의무는 있기 때문이다. 출전 : 볼테르 저 <관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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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김욱교수

아래는 김욱교수(이하 경칭 생략) "검사님들, 웬만하면 법대로 하시죠"에 대한 부분적 비평이다.

(이런 것을 밝혀야만 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럽지만, 필자가 사법부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리하여 맹목적으로 옹호하려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 아니다. 김욱의 무지함을 지적하기 위한 글이다.)



* * *

김욱의 글에 등장한 아래 내용을 보자.

"만약 집안 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재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사회과학적 추론이라면 유력한 조건들을 매거하여야 타당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강정구가 위 문장을 서술할 때 '실재 겪었던 살상과 파괴'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6.25동란 전과정을 염두에 두고 썼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개입한 참전국은 연합군(미국)과 중공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 문장속에는 아래와 같이 세 개의 문장이 포함 돼 있다.

'1. 미국이 개입하다', '2. 전쟁이 끝나다', '3. 비극은 없다'이다.

여기서 강정구의 가치평가가 개입되는 징후를 살펴보자.

1.문장에서는 부당하게 '중공'이 배제되었다. 이 부분은 사실을 불완전하게 서술한 가치관계적 서술이거나 학자답지 않은 서술이다.
2.문장은 원래 '한 달 이내'라는 부사구를 추가하여 강정구의 주관적 추론이 완성된다.
3.문장에서 "비극"이라는 수사는 가치평가가 개입된 판단이다.  

이를테면 갑,을,병이 싸웠는데 갑을만을 싸웠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화과학적 실험실'을 동원하여 강정구를 변호하는 김욱의 학자적 바닥이 드러나는 셈이다.


또, 머릿속에서 추론형태로 전개되는 픽션을 사실판단이라고 말한다는 무식함이다. 사실판단이란 가치평가가 개입되지 않는 명제이다.

위 문장이 바르게 사실판단이려면 "중공과 미국이 개입해서 전쟁은 3년여를 끌었고 그런 인명과 재산피해가 초래되었다"라는 문장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공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3년여를 끌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인명과 재산피해는 없었을 것이다"가 된다. 이 명제야말로 사화과학적 방법론상의 가언추론이며 사실판단이라 할 것이다.



* * *

김욱은 강정구의 발언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가치의 문제'다. 내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가치판단한 게 아니다. 1950년 10월 1일 남쪽이 38선을 넘어 북진 통일을 위해 밀고 올라갔다. 이것에 대해서도 정당하냐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적 없다. 다만 사실적 차원에서 남과 북이 서로 '통일'을 목표로 나갔다는 이야기다." (<오마이뉴스>, 2005. 10. 12)

그러나 가치의 문제는 당부에 관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안을 재단함에 있어 가치관에 입각해서 조망한다면 가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이라고 할 때는 당부의 가치판단은 아니지만 미학적(aesthetic)인 관점의 가치판단이다.

따라서 김욱이 강정구의 문장을 사실판단이라고 변호하며 전개하는 자체는 무지한 소리이다. 김욱의 엉터리 논리전개는 계속된다

김욱은 "예컨대 기상청의 어떤 통보관이 '이런저런 조건으로 봐서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를 사실판단이라고 말한다. 이게 사실판단인지 보도록 하자.

정확히 '이런저런 조건으로 봐서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에서 예보내용인 전체문장이 사실이며 가언추리(판단)이다. 사실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판단이 수행되는 대상은 "비가 오지 않았다"라는 사실과 예보내용(사실)이라는  둘의 관계이며 그 둘의 부합여부를 따지는 것이 사실판단이다.

* * *
김욱은 인용한 헌재의 결정을 보자.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ㆍ고무 등) 제1항 및 제5항은 각 그 소정 행위가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고 할 것이므로 이와 같은 해석하에서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헌재 1990. 4. 2. 89헌가113)

해당 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를 보면


소정행위가

1.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나
2.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는 경우나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

일 때 이른바 구성요건요소를 충족시키게 된다.

위험성이란 반드시 현실적인 위험의 노정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위험성이 있는 경우이다. 전염병이 퍼질 때 방역이나 예방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 위험성은 사법부가 '법과 양심'에 따라 운용하게 되는 기속재량영역이 된다.  천정배가 개입한 부분이 바로 이 기속재량영역이다.


* * *
김욱의 황당한 해석론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 오로지 믿고 의지한 당신마저도, 나를 버리신 서울이 싫어 싫어졌어요.♬"라는 김수희의 가사를  "자본주의 서울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평양을 찬양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녀는 <서울여자>라는 노래를 통해 '평양남자'와의 '붉은 사랑'을 열망했던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김욱의 뇌리에는 자본주의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라는 2분법적 조망만이 존재한다. 이런 해석론이야말로 빨갱이 마녀사냥식 해석론이다. 왜 비자본주의적 양상은 공상적사회주의, 김수희만의 유토피아, 서구라파의 사회주의, 토마스만의 유토피아, 어떤 주체의 주관적 이상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욱이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랬더라면 마녀사냥의 주범이 됐을 것 같다.



* * *
김욱의 황당한 해석론

김종빈이 떠나면서 남긴 변 "지휘권 행사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검찰총장 스스로 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검찰은 통제되지 않는 권력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을 김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불구속 수사 지휘는 적법하지만 타당하지 않다? 검찰의 수장이었던 그는 지금 아마도 잘못된 법률에 저항했던 '시민불복종 운동'의 기수 소로우의 심정인 모양이다.

필자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된다.

"검찰총장자리는 김종빈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 있다. 형식적 합법성을 갖춘 장관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다면 항명이 되므로 비록 수용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사임한다."

물론 김욱이 국보법과 인권보장이라는 이상에 지배되어 김욱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소위 법학자가 강정구의 사상의 자유니 학문의 자유를 위해 하는 변호치고는 누구의 소신(사상)을 의도적으로 곡해하여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 * *
김욱의 황당한 소리는 계속된다.

"이런 구시대적 글이나 쓰고 있는 나도 정말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라고 한다.  아니 인권보장, 사법부독립만큼 중차대한 이슈 외에 김욱이 한심하지 않게 생각하는 아젠다는 뭘까?  이런 태도야말로  시건방진 아젠다 모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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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진영의 네오매카시즘과 그 폐단

작금에 사상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주장들인 강정구의 의법조처 주장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는 신흥-매카시즘이 부상하고 있다.

 

그런식이라면 친일부역배 관련 과거사 청산이 지지부진하여 세월이 많이 경과한 터라 종이매체에 흔적을 남긴 자들에 집중되고 있는 까닭에 그들에 대한 과거사청산문제도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강정구는 지엄(?)한 교수신분이라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그 사상의 피력은 완전히 보장받아야 되고, 그 외 장삼이사의 사상의 개진은 맹목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신분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천부적인 평등이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양상은 전근대적인 특권의식이라는 부정적 모습이다.


한국판 네오매카시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여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Neo-New)을, 중세의 마녀사냥 범주로 포섭될 수 있는 과거 미국의 매카시즘을 의용하여 네오매카시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국민의 콘센서스(consensus)가 체현된 헌법에 반하는 강정구의 발언들이야 새삼 이 한정된 공간에 적시하여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강정구에 얽힌 문제를 보수vs.진보적 이념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정략적이며 바르지 않는 태도이다.  그런 행태야말로 사상의 자유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주장들은 무차별하게 모든 것이 용인될 수 없다는 사상의 자유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모습이다.

 

색깔론과 신색깔론

 

간단히 빨강색이 아닌데 빨강색이라고 뒤집어 씌워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색깔론이라고 하는데,  신색깔론은 빨강색을 빨갛다고  얘기하는데도, '무고한 사람 잡는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레드콤플렉스의 피해망상증 증세이다.  빨강색을 빨강색이라고 말할 때는 색깔론이 아니다. 

 

무모한 만용과 본질 왜곡 

 

병리적측면에서 한 사람이 조류독감에 감염되었다 하여 '겨우 한사람이니 문제없다'는 식으로 예방조처나 안전조치를 소홀히 해야 할 것인가?   심사숙고할 여지도 없이 사전예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강정구와 같은 자 때문에 우리 사회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체제의 우월성과 자신감을 내세우는 낙관론자들은  불온한 사상들이 건전한 사회공동체라는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이  조그만 쥐구멍(균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이 네오매카시즘의 등장은 이른 바 진보언론매체의 부상, 친좌파적인 시민단체나 NGO의 성장, 친좌파적 성향의 네티즌들의 증가에 힘입은 것이라 진단된다.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은 진리고 그 외의 비우호적인 주장들은 모조리 일고의 가치도 없는 수구.보수라고 몰아부쳐 딱지를 붙인다.

 

이 딱지붙이기의 대상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며,  과거 독재세력을 추종하며 권력의 시녀로서의 인권유린을 초래했던 색깔론의 폐해를  초과하는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독선적 특징은 나찌스, 파시즘, 공산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징표이다.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두려운 징후이다. 지금 강정구와 얽혀 논란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은 자유의 본질과 범위의 문제이지 이념논쟁이 아니다. 이념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적입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략이고 이에 편승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다.

 

강정구에 우호적인 자들의 자충수

 

작금의 강정구건에 대한 논란은 친미니 반미의 용공이니 반공이니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 되는 자유의 본질과 그 범위에 관련된 헌정수호차원의 사안인 것이다.

 

강정구에 우호적인 자들의 이러한 독선적이며 이그러진 마녀사냥식 딱지붙이기 독선은  결코 좌파 진보주의자의 입지를 제고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진보진영의 이러한 배타적 독선적 태도에 터잡은 네오매카시즘의 부상은 사회적 공감을 얻는데 실패하여 스스로를 위축시키고야 마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존재의의와  그 당위성을 실증하고 있는 셈이며 색깔론의 부정적 모습뿐만 아니라 아울러 체제수호라는 긍정적 측면까지 부상시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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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강단좌파들의 무지한 자유론

필자는 인류역사의 위대한 유산인 인간의 존엄, 평등, 자유의 가치를 결코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취지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근자에 마치 자유 - 특히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 가 절대적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글이다.


자유라는 천부적 기본권의 역사
 
국가이전의 천부적인 인간의 권리의 주체로서의 자유는 일응 역사적 유산임이 명백하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누구나 부정하지 않게 됐지만,  예를 들어 최근세 이전에만 하더라도 노예제도가 공인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인도주의적인 양상이 시대정신에 의해 하나 하나 꺼풀 벗겨져 천부적(생래적)기본권이 된 역사에는 수 많은 투쟁과 희생이 점철돼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위대한 인류문화의 유산에 대해서 오늘 날 일부 식자들과 매체들은 자유가 마치 절대적인 양 호도하는 반사회적인 작태를 뻔뻔하게 자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 본질(범위)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자유와 관련한 절대적. 상대적이란?

우선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확인하는 차원에서 정리하자면 절대적이란 공간적.시간적.관계적으로 타당함을 얘기한다. 부연하자면 자유는 장소에 무관하게, 시간에 무관하게, (타인과의) 관계등에서 무관하게 제약없이 보장되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필자가 부각시켜 논하려는 측면은 이하에서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려 한다.


이른 바 한계와 제한의 개념에 대한 잠정적 약속

흔히 법이론에서 한계와 제한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한계란 국가를 전제하지 않고 법과 무관하게 그 본질상 내재하는 제약(원리)을 논할 때 사용되며, 제한이란 국가를 전제하고 (실정)법체계내에서 제약(원리)을 다룰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필자가 논지를 전개할 때 이렇게 사용할 것이다.


일반론으로서의 자유의 한계는 존재하는가?

평등한 자유향유 주체간의 갈등국면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한계나 제한이 논해질 실익이 있다. 즉, 무인도에서 독거한다면 자유는 아무런 실천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즉 어울려 살아내는 사회적 인간들에서야 비로소 실익이 있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즉 자유의 본질을 궁구하는 전제가 자유의 향유주체간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또, 한 편 평등한 자유의 향유주체간의 갈등국면에서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의 문제가 대두된다. 자유의 범위가 제약없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인도에서 독거하는 입장에서나 가능한 공허한 이상론이다. 유감스럽게도 평등한 자유를 향유하는 주체들인 '나'와 '너'의 그리하여 '우리'의 관계에서는 절대적일 수 없다.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2인석에 여행객 A와 B가 착석한다. A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B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자신의 자유를 주장(행사)한다는 것은 부당하여 방종이라는 것임을 유치원생정도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유는 국가, 법이전에 이미 일정한 본질적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렇듯 본질적 한계가 엄존하는 자유의 본질(속성)로 해서, 역사적으로 수다한 희생을 수반하며 검증된 사상들을 걸러낼 수 있다. 희대의 인종차별적인 나찌즘, 포폴리즘의 광기로 얼룩졌던 파시즘, 현실사회에 자신의 사상을 폭력적으로 구현하려는 '폭력노선을 맹종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와는 다름-'등은 자유의 본질마저 유린하는 사상(경향)들이므로 건전한 가치관이 정착된 사회에서는 용인될 여지가 없으며 용인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사상의 자유경쟁시장은 그 이면에 가치(사상)의 우열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비효율적인 낭비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검증된 세가지 경향(사상)을 예시한 취지는 그 밖의 재고할 가치가 있는 것(사상,경향)은 용인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꽃피울 적격은 참여주체의 평등함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환경을 그 전제로 한다.

역사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판정된 사상들마저 사상의 자유시장에 진입할 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스로가 나찌식으로 가스실로 보내져도, 파시스트에 의해 사회에서 격리되어도, (위에 언급한) 공산주의식으로 폭력으로 배제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로서 그러한 비인도적 나락에 떨어져도 그것을 감내하며 용인한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는 주장하에 이러한 사상들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향유하는 평등한 주체들에 대한 결과론적 가해자 지위에 서고야 말 것이다. 이런 몰상식하고 무지한 자들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실정)법상의 자유의 제한의 존재여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존재하며 제약가능하다. 위에 언급한 한계를 (법)제도적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혹은 공동체의 특수한 환경조건에서 공동체구성원들의 합의로 제도화되었거나 용인되는 제약원리를 든다면...,

대표적인 것으로 미 판례법(불문법)상의 Homes판사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법리가 있다. 다음으로 서독에서 채용된 방어민주주의라는 법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헌법제37조2항에 규정된 일반적 유보조항-공공의 안녕질서, 국가안보, 공공복리-이 있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가 무제약적인 절대적 자유라고 주장하는 자가 이런 법리를 언급하며 원용하는 순간 절대적인 자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가당착을 범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는 법이전에 한계가 존재하며 (실정)법상의 제한도 존재한다는 입장이 자유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 입장이 옳다.


이른 바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사상의 자유를 논의의 편의상 나눠서 고찰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상형성의 단계와 이 단계를 초과하여 외부로 표출되어 발현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사상형성의 단계는 외부에서 인식할 표지(징후)가 없으므로 그 성질상 국가권력(법적 제재)이 간섭할 여지가 없는 영역으로 일응 절대적으로 보장된다.

그러나, 이 영역이 절대적이라고 하여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섣불리 얼룩소를 검정소라고 단정하는 부당한 일반화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성의 다음단계인 다른 평등한 사상의 향유주체인 사회속으로 그 사상이 발현(노출)될 때 - 이 때는 표현의 자유문제도 얽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절대적인가를 따져 비로소 사상의 자유가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판가름해야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상의 자유가 외부로 표출된다는 것은 곧 특정 사상이 체화된 그 자유의 향유주체의 실존적 실천단계이다. 사상의 자유도 자유의 한 갈래이므로 위에 언급한 자유의 본질(범위)에 대한 일반론이 사상의 자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즉 사상의 자유도 절대적인 자유가 아닌 것이다.

혹자는 Homes판사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의 해석을 '명백하고 현존하는 <구체적인> 위험'으로 부당하게 제한을 가한다. 물론 그러한 한정적 수식어를 부가하는 취지가 자유을 존중하는 취지라고 일응 이해할 수 있으나, 이른 바 자유의 적에 대해서 거꾸로 관대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헌정사에서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인권을 유린한 불명예스러운 전례때문에 제도자체를 백안시하는 태도도 또한 문제이다. 그러한 제도만능주의적 사고라면 결코 인권유린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불식될 수 없다. 국민 각자가 잠재적인 인권유린을 범할 수 있는 권력을 감시하며 비판하는 풍토가 보다 보편적이 될 때 수치스러운 역사는 종식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필자의 논의를 이론적으로 논박하지 않고 반공이데올로기에 함몰돤 자라느니 파쇼라느니 하는 이른바 사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의 딱지붙이기가 있음직해서 덧붙이는데, 필자도 사상의 자유의 향유주체로서 이렇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음에도 그런식으로 딱지붙이기를 자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빨갱이 마녀사냥임을 지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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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의원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열린우리당 김부겸의원(이하 경칭 생략)이 최근에 노무현의 연정 군불지피기에 나섰다한다.  이하 김부겸의 지난 글들을 인용하여 김부겸의 정체성을 추적하며 따져 보기로 하자.

 

김부겸은 87년 이후 한국정치를  .'짬뽕', .'꽈배기'정치판으로서 '3김정치인'지역주의 정치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신당으로 둥지를 바꾼 독수리 5형제들의 행위는  긍정적인것으로 정당화되었고, 총선시민연대는 이들을 철새정치인으로 지목하지 않음으로써 박자를 맞춘 적 있다. 

 

주지하다시피,  반민주독재정당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은 그러한 과거의 행태에 대해 대국민사죄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김부겸이 87년 이후의 정치를 이렇게 규정하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무차별하게 몰역사적으로 등치시키는 연유를 추론한다면, 그것은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김부겸이 그러한 당에 휩쓸려 몸 담았다는 사실이 어떤 점에서도 간과하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흔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변명을 위해 역사까지 멋대로 재단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나라당에서의 김부겸의 흔적을 확인해 보자.

 

한나라당에 대한 김부겸의 평가

 

한나라당이 점점 더 극우화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영남지역의 지지기반을 꽉 움켜쥔 채 어떠한 변화와 개혁도 거부하고 있습니다...'건곤일척'의 심정으로 당 개혁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엔 결코 적당히 물러서지도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점점 그때의 약속에 대한 책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듯 합니다. (필자주 : 극우란 더 이상 右向할 수 없는 극단으로 한계개념이다.  김부겸은 이 때 극우정당인 한나라당소속 극우의원 혹은 우파였다)

 

...인적 청산을 통한 정치개혁이 과제입니다. 그런데 한 당(필자주:한나라당)은 아예 그럴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고, 한 당(필자주:새천년민주당)은 내부에서 격렬히 저항하고 있습니다.(필자주 : 한나라당소속 김부겸)

 

한나라당은 이렇게 해서 영원히 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는 겁니까? 그만큼 무고한 사람을 짓밟았으면 됐지, 아직도 성이 안차는 겁니까? 도대체가 구제불능입니다.(필자주: 열린우리당소속 김부겸)

 

한나라당은 4.30 재보선 대승 이후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념은 전통적 반공주의와 보수주의로 후퇴하고, 정책은 정부여당의 그것에 반대하는 방향으로만 맞춰지고, 대화와 협상에선 도무지 양보와 타협을 모릅니다.(필자주 :  한나라당의 과거로의 회귀)

 

한나라당에 대한 이러한 김부겸의 인식과 주장이 옳다고 간주하면 노무현의 한나라당과의 연정론을 옹호하는 김부겸의 입장은 비정상이다.  정상적 모습은 소연정 주장이다. 

 

다음에는 김부겸의 이념적 정체성을 그의 발언들을 추적하여 들여다 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제대로 된 보수정당과 개혁정당 (필자주 : 김부겸은 보수주의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간의 이념논쟁은 중도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이념논쟁(필자주 : 김부겸은 중도주의자)

 

양당(필자주 -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의 이념은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  한나라당이 자유주의(자유나 성장)에 더 큰 비중을 둔다면 열린우리당은 두 이념의 균형(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복지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정도의 차이. 그런 차이를 둘러싸고도 활발한 이념논쟁이 전개되어야 함. (필자주 : 김부겸은 중도주의자)

 

위에서 김부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변화가 이념적 층위가 다른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김부겸의 당적변경은 단순한 정치개혁을 위한 것 뿐 아니라, 김부겸자신의 이념적 정체성변화까지 수반했음을 보여 준다.  노무현이 즐겨쓰는 말로 김부겸의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봐선 변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부겸의 이러한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따른다고 할 때, 노무현의 대연정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당이란 정당이념의 추구라는 것이 본질임을 주목할 때,  상생과 타협으로 대연정 와중에서 안출될 정책이란 최선이 중도우파적 그것이요  최악은 보수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이 여당임에도 절대과반수를 만들어 준 취지가 개혁추동력의 부여라는 역사적 소명이라 할  때,  열린 우리당 스스로  실기로 보선에서 여소야대국면을 자초한 후  여소야대라는 추동력상실을 빙자하여 개혁의 후퇴(혹은 연기)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준 지지자들에 대한 민주적정당성의 부정이요,  그런 의미에서 패륜정치이다.

 

그렇다면 김부겸이 노무현(의 대연정론)을 응원하고 나선 것은 김부겸의 본래의 모습인지를 확인해 보자.


김부겸이 말하는 정책의 우선순위 : 경제분야및 정책경쟁

 

온건 합리세력이나 중도세력이 더 커지기 위해서는 우리편은 무조건 이쁘고 남의 편은 무조건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패거리 정치가 없어져야 합니다. 정치보복은 더 이상 안됩니다.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인이 좋은 정치를 만들지 선거법이나 정치자금 제도를 잘 만든다고 해서 좋은 정치가 보장되는 건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필자주 :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김부겸의 결론) 그러러면 좋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정치는 성실한 시민이 봉사정신과 소박한 명예심으로 누구나 참여하는 것일 때 활짝 꽃필 수 있습니다. (2002.9.15) (필자주 : 한나라당 김부겸)


 정치에서 경제로, 이념에서 정책까지 확장해 가자는 겁니다. 굳이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참여정부의 임기가 경과할수록 더 많은 노력을 경제 분야 개혁에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필자주 : 열린우리당 김부겸)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린 가장 중요한 이유...리더십의 실종, 대표성의 부재, 정책적 무능만 노정함...이념, 제도, 세력의 측면에서 민주주의 주체세력을 강화해야 함...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간의 이념논쟁은 중도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이념논쟁으로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서는 민노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주의도 이념의 시장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음...정당을 선거정당에서 정책정당으로 변모시키는 것. 이런 과제는 상당부분 실현되고 있음...점차 국회가 법안 생산의 중심이 되고 있고 정책경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음...특히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회를 이념공세와 정쟁의 장으로 악용하던 한나라당이 최근 들어 그런 구태를 벗고 각종 정책이나 법안을 선도적으로 제기하여 인기를 높이고 있음. 이에 대해 여당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음...건강한 보수와 합리적 개혁진보가 공존하며 정책경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전부터 그려오던 정치발전의 모델임...한나라당이 계속 지금처럼 잘 해주기를 바람.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당에게도, 또 우리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임 (필자주 : 열린우리당 김부겸)

 

확인했다시피 김부겸의 발언을 종합해 본다면 노무현의 대연정을 옹호하는 이유는 김부겸의 정치적 연명을 위한 것 외에는 없는 셈이다.

 

그럼 김부겸이 절개(또는 지조)를 지켰는가를 따져보자.

 

...우리 한나라당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정당’으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저희 이회창 총재가 3김청산과 함께 분명한 원칙과 깨끗한 법치로 나라를 다시 한번 일으켜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저의 혼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각오... (필자주 :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지지)


당(필자주: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겠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열려 있고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당을 만들겠습니다. 저는 출신과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개혁적 자세를 가진 누구와도 함께 정치발전을 도모할 각오입니다. (필자주 :  김부겸은 한나라당 부흥주의자)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각각 제대로 된 보수정당과 개혁정당의 모습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정당이 이념과 노선에 따라 분화되는 것은 정치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필자주 : 김부겸은 보수주의자)

 

...민주당이 기껏 국민참여경선으로 뽑은 노무현 후보를 상대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흔들고 뒤집을 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정몽준 후보가 등장..상한가..단기필마..과연 대통령이 되면 누구와 함께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또 다시 '철새'들의 군무가 시작됐습니다. (필자주 : 김부겸의 이회창지지)


지난 5년 내내 DJ정권은 병풍, 세풍, 북풍 등등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격해댔지만 결국 어쩌지 못했고 거꾸로 DJ정권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만큼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그런 시련을 통과, 단련되면서 반DJ의 중심에 선 반면 노무현 후보는 DJ정권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입만 열면 반창(反昌)을 외치는 건 효력이 떨어진 주문을 계속 외는 것에 불과합니다. (필자주 : 노무현, DJ정권에 비판적이며, 이회창 지지)

 

오늘 현재는 노무현의 연정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전도사로 나선 김부겸,  결국 이제는 당적을 바꿔 '열린우리당 부흥'을 위해 매진하는 속내라고 추단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연명을 위한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지역주의에 대한 김부겸의 인식은 일관되는지 들여다 보자.

 

- 맹목적 지역주의에서 이념적 지역주의로 전화 : 이번 총선을 통해 호남=진보, 영남=보수로 이념성과 지역성이 등식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그 반증의 하나로 수도권 영호남인은 영남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나라당을, 호남인이라고 해서 우리당을 지지한 것 같지 않다.  즉, 이런 수도권의 탈지역주의적 투표 행태는 지역주의가 출신지가 아니라 거주지의 문제라는 걸 의미하고 따라서 이제는 특정 지역 몰표 현상을 지역주의의 결과로 볼 게 아니라 이념성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념은 그 자체로서 형성, 표출되는 게 아니라...지역→세대→이념으로 연동되고 있다는 얘기임

 

혹자는 지역주의가 약화되고 있다, 계급적 균열로 대체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여전히 우리 안에는 여전히 강고한 지역주의가 내장되어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 안의 지역주의’는 아직도 시퍼렇지 않은가요?

 

지역주의가 오로지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적 지지행태를 기준으로 편리하게도 멋대로 재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87년 이후의 정치지형을 짬뽕정치 꽈배기정치라고 규정한 김부겸은 신당에 몸담으며 국민을 향해 이념정당을 외치더니,  다시 짬뽕, 꽈배기정치지형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열린우리당으로 날아 간 김부겸은 철새정치인이 되었고  따라서  뻔뻔스러운 기회주의자가 된 셈이다.

 

필자의 분석에 오류나 이의가 있다면 김부겸은 따갑게 질책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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