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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의 배치 속에서 철학은 실천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실천의 소화로,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겠다면, 실천의 내면화로 해석하는 것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어디에서 자리를 찾아야 하는가?
내 감각으로는 이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주의의 본래적으로 철학적인 텍스트들 속에서 찾을 수 없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거기서는 이 자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철학에게 이 자리는 사고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맑스주의 철학', 루이 알튀세르(서관모, 백승욱 역),104쪽)
이론의 이중기입을 통해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맥락을 설명한 알튀세르의 설명을 나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투사해 본다. 그 결과, 일정한 부적합성과 맹목성에서 기인한 불안함이 해명되는 듯 하다. 결국 이데올로기 안에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음을, 철학적/유물론적 사고들은 그 아름다운 과거 속에서 사라져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유물론이라는 '존재론'에 대한 사고 속에서 변증법이라는 인식론의 주변화를 비판하고자 했던 나의 비판의 계획 자체가 사실 그 존재론적 테마에 갇혀 있던 것이 아닌가, 결국 현실적 효과를 갇지 못하는 철학적 비판, 반대중적 공허한 담론에 머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비철학' 또는 '유물론' 자체를 넘어설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한 이 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늦은 깨달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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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이 진술하는 이론은 선언에 의해 진술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언에 의해 선언이 개입하고 있고 사유하는 바의 사회적 공간 속에 위치지어져야 합니다. '공산당 선언'으로 이런 경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현존 사회에 관한 이론을 제공한 후,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을 그 사회의 어딘가에, 다른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론들의 영역 속에 위치시킵니다. 왜 이러한 이중화와 이중의 포장이 필요할까요? 분석중인 역사적 국면 속에, 분석되는 세력균형의 공간 속에, 그 이론이 점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화된 의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이론의 예상되는 효력--그럼으로써 사회체계 속에서 이론의 존재조건에 종속되는--의 종류를 명확히 표시하려는 의도와, 계급갈등 속에서 점하는 입장에 의해 이론의 의미를 서술하려는 의도 말입니다."알튀세르, '마카이벨리의 고독'(239-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