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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凡人'이 지식인되기

지식의 생산이 사회적인 것이라 할 때, 나 개인의 뇌를 통해서 생산되는 지식, 그리고 그 과정도 사회적인 것일테다. 과연 나의 뇌가 어떤 지식을 생산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지 여전히 사회적 조건에 규정될 것이고, 특히 아마도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나의 지적 실천(자유)의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실천성이 부재한 비생산적인 지적 노동에 머물 수도 있다. 아마 지적능력과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모두 그런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과소평가는 매우 보수적인 지향을 낳을 것이고, 과대평가는 매우 초월관념적인 지향을 낳을 것이다.

 

예전에 어떤 분이 위인전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지적 실천을 '천재적'으로 만드는 자신과 주변의 서술은 '범인'들의 지적실천의 희망과 가능성을 제한하는 작용을 하는 듯 하다. 여기에서 학문함에 있어서의 조급증이 생겨나고, '범인'들은 영원히 자신의 지식을 갖지 못하고 '천재'의 작업들을 조급하게 추종하는 지적노동에 갇히게 되는 것 같다. 지식의 문제, 소위 교육의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서 먼저 '천재'의 신화를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싶고, 우리 사회 내의 엘리트, 특히 진보 학계의 엘리트들이 먼저 자신의 '천재성' 신화를 하나하나 해체하여, 그 '범속성'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식의 대중화와 지적 불평등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한다면, 사실 지식인들이 자신의 '스타'적인 지위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지식의 목적이 콘서트와 같이 대중이 그들의 '지적 쇼'를 보고 즐기며 그 분할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논문을 어떻게 무엇을 쓸 지 고민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나의 지적 실천능력과 조건, 한계, 이런 것들을 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다시 시작하는 수고를 덜지 않을가 싶어서 이다. 동시에 그 '훌륭한' 지식 위인들의 존재가 나같은 '범인'에게는 별 도움이 안된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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