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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1학점 씩 3학기동안 들어야 하는 '개별연구'라는 과목은 교수와 1대1 세미나를 진행하는 수업인데, 이번 학기도 Liu교수와 함께 스피노자 관련해서 공부를 해오다가 발리바르를 만나면서 남은 학기를 발리바르에 쏟기로 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결정인데, 이는 다른 과목 수업에서 바디우를 다루면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프랑스철학 연구자도 아니면서 그쪽 이야기를 왈가왈부하기가 뭐한데, 중국 사상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입장에서 유럽 현대철학은 외부이지만 나는 그 일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깊이가 좀 없긴 하지만...
아무튼, 여러가지 정황적인 것들을 동원해서 초보적으로 판단을 해나가는 중이다. 결국은 역사이론의 문제인데, 역사유물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바디우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철학적으로 아주 다르면서도 사카이 나오키에게 받았던 유사한 역사의 부재를 떠올렸다. 바디우가 그런 것(수학적 존재론, '공산주의'도 그렇고, 네가지 진리의 조건들도 그렇고)은 라깡 때문이다라고 '무식한' 결론을 내려보기도 하고, 나오키가 그런 것은 데리다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형식이나 범주의 체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다보니 역사 속의 주체와 역사 동력을 이루는 우연성/독특성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나오키와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의 근대성(일본어, 일본인, 일본) 등에 대한 '해체'의 작업을 진행하는 젊은 연구자에게 내가 일전에 던졌던 질문도 동일한 맥락이었는데, 근대성 자체를 역사화하지 못한다는 문제 즉, 근대성의 출현과 확립의 역사과정 속에 주체는 어디로 갔는지라는 문제가 왜 이항대립이라는 형식적 필연적 틀에 그 설명이 갇히는지 말이다. 여기에서 천꽝씽 교수와 맞닿은 지점이 있는데, 천교수는 내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포스트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의 전환이 나오키에서 천꽝씽으로의 전환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 전환은 내가 보기에는 또한 아시아를 '방법'으로 삼으면서도 결국 본질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댓가를 치르면서이다. 이는 정확히 나오키가 과녁으로 삼고 있는 파농이 지적한 거울유희의 전통적인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결국 역사의 동력을 존재론적 질문을 통해서 풀려고 하다보면 결국 본질주의에 갇히게 되는 듯 하다.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론도 일정하게 그런 느낌을 준다. 또 아주 다르게 형성되어 온 아시아의 탈식민주의나 제3세계론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의 '비존재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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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휘(왕후이), 진광흥(천꽝씽) 등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해 점점 무감해지는 것도 나오키 등의 논의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어쩌면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 처럼 보이는 나오키가 오히려 존재론적 질문의 수렁에 빠지는 진광흥, 왕휘 등에 비해 현실적 비판성의 가능성에 열려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