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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해체나 유물론, 또는 그러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해체나 유물론의 대상은 사회과학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사회과학이 닫히면서 현실성을 갖는 구조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고 하면 그렇다.
구조의 열림을 향하는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여는 행위' 자체 보다는 여는 행위를 통해 구조분석이 더욱 현실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는 행위'가 실제로 열고 있는지 어떤지 그 행위에 대해 알 수 없다.
알튀세르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정의할 때 바로 이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따라 예술의 무기와 무기의 예술을 구분하며 노신이 문학을 실천으로 규정할 때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나는 본다.
전리군(첸리췬) 선생님의 작업에 나타나는 유물론적 특성, 비판성에 대한 연구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들이다. 현재로서는 포스트모택동시기의 비판사상궤적에서의 전리군선생의 위치, 1957년학의 역사해석에서의 비판성, 비판성의 요소로서의 노신과 모택동, '노신좌익'과 '1957년학'을 통해 본 정치와 역사의 관계 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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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는 해탈로 향하는 것을 본다. 중생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어여삐 여기는 해탈한자. 과학을 떠난 인문학이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해탈한 자들의 천상인 것 처럼 보이곤 한다. 그런데 저 많은 무수한 중생을 남기고 혼자만의 해탈이 정말 해탈인가. 나의 해방이 타인의 해방의 조건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타인의 해방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다면... 차라리 중생으로 살다가 죽는게 떳떳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