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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20218-20120223

현실 생활의 조건이 학습과 연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불안은 종종 연구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그안에 모순을 삽입한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나는 늘 어정쩡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 같고, 이는 다시 논문 구상 안에 반영된다. 상호참조라는 미명으로 이 곤란을 지나치고자 했지만, 진광흥 교수와의 논의 중에 이는 거의 불가능함이 밝혀진듯 하다. 참조의 축은 결국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는 내가 알고 있던 결론의 재발견인데, 나의 현실적 불안은 이를 회피하고 두 개의 축을 설정하도록 했던 것 같다.

 

전리군의 비판/해체적 효과는 중국 내부와 남한/서구에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남한의 보편주의적/비판적 중국연구의 식민성의 문제와 닿아 있다. 나는 이를 1980년대 중후반의 인식론적 체계의 전환과 관련짓고자했고, 하나의 징후로서 박현채 선생의 사구체논쟁의 이론주의적 전개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전리군은 하나의 '방법'이 되었던 것인데, 굳이 꼭 전리군이어야 하는지, 꼭 중국(연구)이 방법이 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이는 사실 북조선 및 분단에 대한 맹목을 드러내고 자기문제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배치되었던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과 중국의 역사적 경험의 공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동아시아에서 중국-북한과 남한-일본이라는 대칭적 축을 상정하고, 이 안에서 중국/일본의 쌍을 넘어서는 계기를 분단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사고 안에는 여러가지 공백들이 있는데,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메울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장기적인 연구 계획으로 가져가면서 일단 서랍에 넣어두자. 특히 우선 박현채와 관련한 부분은 땅 속에 묻어 둔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반영될 것 같다. 암튼 화요일 진 교수와 논의를 하고 며칠을 생각하면서 결론을 지었다. 연구는 전리군의 사상적 특징과 방법에 집중될 것이다. 그런데 인물의 사상에 대한 연구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럴 만한 능력이 내게 있는지 자신이 없다.

 

2009년 가을에 입학에서 이제 2012년 2월 봄학기(6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기의 시작과 함께 그동안 오랜 숙원이었던 지도교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편 진광흥 교수는 이번 학기 처음으로 "인터아시아문화연구 입문"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데, 지난 화요일 수업을 듣고 왔다. 외국인 학생이 주로 듣는데, 처음으로 본인의 저작들과 InterAsia Cultural Studies를 교재로 삼아 수업을 진행해서, 더욱 일목요연하게 그의 방법과 개입실천의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그 외에 이번학기에 대금화(戴錦華, 따이진화) 선생님의 수업도 준비되어 있다. 수업은 "포스트-냉전 이후의 사회와 문화, 그 곤경"으로 되어 있다. 종종 청강을 해보려고 한다.

 

인터아시아문화연구 입문(陳光興)

http://www.srcs.nctu.edu.tw/srcs/course_intro/course_1002_06.htm

 

포스트-냉전 이후의 사회와 문화, 그 곤경(戴錦華)

http://www.srcs.nctu.edu.tw/srcs/course_intro/course_1002_0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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