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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문학" 개념: 내재적인 재역사화를 통한 탈현대적 전망?

전리군 선생은 <20세기 중국문학 3인담三人談>(1988)에서 황자평黃子平, 진평원陳平原 등과 함께 "20세기 중국 문학"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가 이후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특정하게 제약된 역사적 시기 구분과 그 인식틀 안에 갇히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듯 하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근대 문학'과 '현대문학' 그리고 '당대 문학'이라는 틀을 서로 교차 관통시킴으로써 20세기를 유기적 총체로 인식하는 이론적 모델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역사적 시기구분이 우리와 좀 다른데, 근대의 시작을 아편전쟁으로 보고, 현대의 시작을 5.4운동으로 보며, 특히 1949년 혁명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를 당대로 본다는 점이 그렇다. 영문으로 번역한다면, 근대는 early modern, 현대는 modern, 당대는 contemporary가 된다. 물론 이러한 시기 구분 자체에는 분명히 보편화된 특수적 요인을 기준으로 한 진화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이를 비판하면서도 보편/특수의 이원론에 갇히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오히려 핵심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시기 구분 배후의 대중의 공통적 인식/이데올로기인 듯 하다. 적어도 중국 혁명에 참여한 지식인은 중국 사회가 5.4 운동을 통해 현대에 진입했고, 1949년 혁명을 통해 '현대'라는 시기를 건너 온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 현대 또는 근대 나아가 봉건으로 퇴보하는 듯 한 모순적 사회 현상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현대 극복의 실험의 담론과 실천을 담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적 현실에서 문학사 영역에서 이 세 시기를 상호 교차시키는 작업은 일정하게 문학사의 체제화 및 인식론적 경직화에 저항하는 시도로서, 그 배후의 억압되고 망각된 흐름을 복원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음을 예상해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긴장이 90년대 이후 전리군 선생의 정신사 연구와 그에 이은 당대 역사 연구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남한의 경우 분단으로 인한 식민극복의 유산과 편향적으로 이식된 반공주의적 자유주의 정치체제 및 발전주의적 근대화의 제약 안에서 미완의 근대를 완성하는 과제를 부여 받고 현대에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본래 early modern의 특징을 표현해야 할 근대성이 modernity의 역어가 되고, 현대는 오히려 contemporary적인 최근 시기를 명명하는데 사용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발전주의적 담론 속에서 스스로를 전근대적으로 인식하면서 자신의 '현대성'을 성찰적으로 대상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구에서 modernity가 일정하게 자기 성찰적 계기를 포함하는 대상화된 개념이라면, 남한에서 이는 상당기간 동안 추구해야할 가치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핵심은 근대성이라는 modernity의 또 다른 역어는 우리가 현대 속에서 살면서도 현대를 대상화하지 못하는 어떤 심리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대만에서는 명에서 청말까지를 근대로, 청말 이후 현재까지를 현대로 보는 것이 다수라고 한다.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각자 재구성된 역사로서의 한계를 가지지만, 이를 남한과 대조해볼 때, 남한의 어떤 특징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공산당의 것과 비교할 때, 현대 극복의 전망이 부재하며, 국민당의 것과 비교해 볼 때,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고, 국민당과 남한 모두 현대 자체를 역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일정하게 탈현대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즉 반공주의와 닿아 있는 것 같다.

 

전리군 선생의 "20세기 중국문학"과 관련한 글이 일부 임춘성 교수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

http://blog.daum.net/csyim2938/11315643

 

나는 중국의 '근대'를 '진다이', '현대'를 '센다이', '당대'를 '당다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물론 이의를 갖는데, 이는 한자가 갖는 역사적 초국적성을 살리지 못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또 중국어를 한자와 관련 없는 것으로 타자화하고 본질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같은 한자어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거나, 또는 의미의 분화가 나타나는 것은 상호참조를 통해 한자어의 의미를 풍부화하는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여러번 지적했듯이, 원음주의 번역은 언중의 언어문화생활 및 지식의 보편화에서 갖는 한자의 의미와 역할을 무시하는 한글전용의 맥락과 닿아 있고, 중국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있어 제약으로 기능하면서, 일종의 지식인 중심주의에 복무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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