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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거부하라』와 『내 정신의 자서전』 한글 번역판 목차 검토

이 블로그를 통해서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중국어로 원서를 읽을 정도의 유창한 원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들에게 번역서의 출판은 그 자체로 얼마간의 결함을 가진다고 해도 지식의 공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는 것임을 밝히고 글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 번역서의 내용을 검토하지는 못했지만, 전리군 선생의 스타일이 문장을 어렵게 쓰는 경우는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 표현의 문제를 바로 잡는다면 이번에 소개된 책들은 모두 충분히 구매하고 소장해서 읽을만한 책이라 예상한다.

 

내가 여기에서 번역서를 검토하는 것은 물론 아직 전문가로서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리군 선생의 강의를 수강한 바 있고, 관련 저작들을 비교적 많이 소장하고 읽고 있으며,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1949~2009): 또 하나의 역사서사>를 번역하여 출판사에서 편집 중인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일부 문제들을 검토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조만간 번역서를 입수하면 다시 전체적인 검토를 하고, 우선은 목차에서 보이는 몇 가지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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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군 선생의 책이 번역되어 출판됨에 따라 올해 관련된 논의가 여러 방면에서 진행될 것 같다. 우선은 번역 자체에 대해서 중국정치/사상/문화/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일정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번역본을 아직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미리보기 서비스를 통해서 간단히 목차를 원문과 대조하여 검토해 보았다. 이하의 내용은 알라딘 미리보기 서비스에 근거하기 때문에 실제 출판에서 있었을 수 있는 변경은 감안하지 못했다.

 

<망각을 거부하라>는 중문판으로 500여 쪽 되는데, 800쪽으로 완역되어 출판되었고, <내 정신의 자서전>은 본래 중국 대륙판에 대만판을 참고하여 약 218쪽(대만판 기준)정도의 부분을 번역하여 한글판 370쪽 정도의 분량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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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거부하라>는 <또 하나의 역사서사>와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 매우 관심을 갖고 기다리던 번역본인데, 실제로 목차만 검토했음에도 여러 표현들을 참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용에도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서 앞으로 원고 편집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목차에서 발견된 몇 가지 의문이 있는데, 대체로 내가 선택한 역어와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주목하게 된 듯 싶다. 내가 보기에 오역이나 누락으로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戰略部署

"전략 부서"로 번역하였는데, '부서'라는 표현의 의미가 한국어에서 전혀 다르게 쓰이기 때문에, 이를 '전략적 포석(조치)'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다.

 

2) 一個人的命運及其背後的社會體制的整體運動

"한 사람의 운명과 그 배후의 사회 체제" 뒤의 “전체의 운동”이 누락됨

 

그리고 번역에 있어서 논의할 만한 몇 가지 부분이 있다.

 

1) 群眾專政

중국어에서 大眾, 群眾의 용법이 한국과 좀 다르고, 또 중국어 내에서도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인데, 상당수의 용례에서 群眾은 우리말의 '대중'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대중'으로 번역할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군중전제정치"라고 번역되었는데, 나는 "대중독재"라고 번역하고 싶다.

 

2) 領袖/領導

'영도자/지도자'로 번역하였는데, 領袖는 정치 집단의 최고지도자를 표현하는 우리말의 ‘영수’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예) 영수 회담. 領導는 나 역시 '지도자'로 번역하였다.

 

3) 史前期

‘역사 이전 시기’라고 번역되었는데, 본래 이 단어는 '선사시대'의 의미를 가지며, 顧準의 문맥에서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원시축적에 비유하여 사회주의 ‘원시’ 축적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원시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한다.

 

<망각을 거부하라>는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고, 문학적 표현도 많고 분위기도 학술논문과 달라서, 번역의 유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일부 개념들은 앞으로 국내에서의 정착을 위해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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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의 자서전>의 목차에서도 몇 가지 오역으로 보이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우선 비교적 확실한 오역이나 누락으로 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有缺陷的價值

"결손의 가치"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이는 "결손"이 가치를 갖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본래 뜻은 "결함을 갖는 가치"라고 판단된다.

 

2) 소제목 누락

在處理知識分子與人民關係問題上所發生的迷誤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문제를 처리하는데 발생한 오해”

 

3) 知識分子在體制中扮演了什麼角色?

"맡아야 하는가?"라고 번역되었는데, "맡았는가?"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4) 學術新貴

"학계의 새로운 권력자"라고 번역되었는데, 新貴에 권력자의 의미는 없으며, "학술 신귀족"으로 번역해야 한다.

 

5) 拒絕遺忘

"망각을 거절하다"라고 번역되었는데, "망각을 거부하다"이다. 중국어의 拒絕에는 우리말의 '거절'과 '거부'가 모두 들어 있는데, 우리 말의 '거절'은 우리 말의 '거부'와 구분되는 표현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거부'의 의미로 쓰였다.

 

6) 革命意識形態

"혁명의식 형태"로 번역하였는데, 意識形態는 본래 "이데올로기"의 중국어 번역이다. '이데올로기'로 번역해야 한다.

 

7) 還思想予思想者

‘사상환원주의’라고 번역하였는데, 비판성이 생명인 사상이 체제 유지에 동원되어 지식인의 독립성 상실의 문제를 낳음을 지적하면서, '사상'을 '사상가'에게 되돌릴 것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사상을 사상가에게 (돌려주기)" 정도의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 이를 '환원주의'(reductionalism)로 번역해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사상의 자율성과 완결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상과 사상가의 체제 의존성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몇 가지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을 것 같다.

 

1) 迷誤

"오류"라고 번역되었는데, "오해, misunderstading" 또는 "오인, misrecognition"의 뜻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주관적 이해의 측면에서 발생한 착오를 의미하는 것인데, '오류'는 논리적으로 검증된 객관적 착오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2) 心靈

"심령"으로 그대로 옮겼는데, "영혼"이 더 낫지 않은가 싶다.

 

3)學霸

"학계의 보스"라고 옮겼는데, "학술패권"이 나을 것 같다.

 

4)為何寫作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라고 옮겼는데, 본래 "為何"는 분해해서 해석하면 그런 의미를 갖지만, 이미 굳어진 표현으로 읽으면 "왜"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為什麼와 같은 뜻이다. 나는 為什麼를 "무엇을 위해"라고 번역하지 않듯이, 為何 역시 그렇게 번역하지 않는다. 특별한 다른 이유가 없다면 "왜 글을 쓰는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4) 內心的疑慮,以至恐懼

"내면의 의심이 공포에 이르다"라고 옮겼는데, "내면의 의심 그리고 (나아가) 공포" 정도로 옮겨도 무방하다. 以至를 풀어내면 "이르다"라는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심화되는 병렬 관계를 이어주는 용법이기 때문이다.

 

5) 志願者 

"자원봉사자"로 옮겼는데,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우리 말에서 '자원봉사자'가 매우 탈정치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다른 역어를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리군 선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志願者에는 우리 말의 '자원봉사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를 넘어서는 민간 사회운동가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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