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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항아리 블로그의 <나의 정신 자서전> 소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kpot&logNo=130134673197
오늘 <또 하나의 역사서사>를 편집 중인 출판사 편집부로부터 전리군 선생의 저작이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 책의 구성에 대해서 인터넷 상의 설명이 좀 부족한 듯 하다. 우선 한글판은 중문판 대륙판을 저본으로 삼되,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편 <나의 반성과 회고> 부분은 번역되지 않았고, 하편인 <나의 정신 자서전>을 따로 책 한권으로 엮은 것 같다. 출판사의 설명과 같이 역자는 대만판을 참고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대만판에 추가된 <나의 정신 성장 배경>은 번역에서 빠졌다. 이 부분이 빠진 것은 사실 조금 많이 아쉬운데,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전리군 선생은 자신의 정신적 성장 배경이자 기지로서 청년 시절의 귀주 안순이라는 변경 지역과 대학원 이후 학술 활동을 진행해온 북경의 상호 연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을 <내 정신의 자서전>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내가 보기에 <我的精神自傳>이 의미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나의 자서전>이지 <정신의 자서전>은 아니며, '정신'은 여러 자서전의 형식들 가운데 선택된 저자 나름의 강조점와 그에 따른 형식을 표현해주는 형용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는 대만판의 영문 제목이 My mental-spiritual autobiography라고 붙여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용법은 '정신사' 연구와 같이 전리군 선생이 독특하게 구사하는 '정신'이라는 범주에 대한 천착과 일관성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번역에 조금더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리군 선생의 첫 번째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고, 곧 두 번째 저작인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필기>도 그린비에서 나온다고 하니(최근에 백승욱 교수님으로부터 해제를 입수했다), 일단 정신사 연구와 관련한 3부작 가운데 <1948 천지현황>을 제외하고는 일단 대략적으로 소개가 되는 셈이다. 그 바탕에서 당대 역사를 새롭게 쓰는 <또 하나의 역사 서사>가 출판되게 된 것은 잘 된 일이기도 하다. 가을에 전리군 선생을 초청할 계획도 있는데, 한국의 독자들도 만나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3월 29일 추기>
다시 확인해 보니, 첫번째 저작은 <망각을 거부하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글항아리에서는 <내 정신의 자서전>을 한국에 소개된 전리군 선생의 첫번째 단독저작이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출판됨으로 인해 서로 확인하지 못한 듯 하다. <내 정신의 자서전>이 언론에 먼저 알려진 부분도 이유가 될 것 같다. 확인해 보니, <망각을 거부하라>는 3월 25일자 출판이고, <내 정신의 자서전>은 4월 2일 출판이다. 엄밀히 말하면 <망각을 거부하라>가 조금 앞서지만, 거의 동시출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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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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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의 자서전(我的精神自傳)>을 번역한 역자입니다. 좋은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我的精神自傳>을 번역할 때 매우 고심하였습니다. 우선 사람들의 입에 익은 것처럼 <나의 정신 자전>이라고 번역하는 경우, 이는 중국어의 용법에는 충실한 번역이지만, 한국어 용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정신 자서전>이라고 번역하는 경우, 이는 "자전"을 "자서전"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시 한국어 표현으로는 어색합니다. 그리고 이는 몇 가지 애매모호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첫째, 나에 관한 정신 자서전인지? 둘째, 나의 정신에 관한 자서전인지? 셋째,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정신 자서전인지? 넷째, 나의 정신과 자서전에 관한 것인지? <我的精神自傳>은 나의 자서전도 아니요, 정신의 자서전도 아니요, "나의 정신의 자서전"입니다. 첸리췬 선생님도 <후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쓴 것은 나 자신의 인생 경력이나 일상생활이 아니라 정신 역정과 학술 생애에 편향된 것이며, 실록체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 자아 해부와 자아 분석에 편향된 저술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我的精神自傳>은 <나의 정신 자서전>이라고 애매모호한 중국식 표현으로 번역되어서는 안되며, <나의 정신의 자서전>, 즉 <내 정신의 자서전>이라고 명확하게 의미를 한정하여 번역해야 합니다. 중국어 표현법과 한국어 표현법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중국어의 문법과 용어를 축자역으로 번역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오역이란 말은 지나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번역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국어를 우리말 답게 표현하기 위해 매우 고심해야 하겠지요.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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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글이 역자님께까지 전달될 줄은 몰랐네요. 번역하시느라 고생하셨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말씀하신 한국어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와닿지 않는데요. 저는 번역할 수 없는 고유한 '차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원의와 명백하게 다르게 번역한 것을 문제 제기했을 뿐입니다. 제기하신 '오해'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어도 동일하게 갖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정확히 '해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구요.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그 해석을 다른 어떤 것으로 하는 것은 충분히 선택가능한 것이지만, 역자는 적어도 그것 자체를 열린 채로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대만판 영문제목 My mental-spiritual autobiography는 그런 맥락을 보여준다고 보입니다. 중국어 어법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제가 보기에 的의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입니다. 번역하신 책은 <我的精神自傳>이지 <我精神的自傳>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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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할 때는 <歷史的另一種書寫>를 <또 하나의 역사 서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오역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서사(書寫)는 "글쓰기"이지 한국에서 쓰이는 서사(敍事)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서사(書寫)는 "글씨 베끼기"입니다. 서사(書寫)가 서사(敍事)로 오해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므로 <歷史的另一種書寫>는 <역사에 관한 또 다른 글쓰기>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또 하나의 역사 서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공부하는 입장에서 작은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늘 건승하시고 좋은 성과 많이 내시기길 기원합니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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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서사의 한자어를 병기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일까요? '서사'가 '敘事'로 독점적으로 오해되어 해석된다는 논리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요? 한국어의 한자어는 그 한자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의미가 불분명해질 수 있는 소지가 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맥락을 통해서 이해해 왔고, 모호할 경우 한자를 병기해왔습니다. 그리고 <歷史的另一種書寫>라는 표현은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리군 선생의 중문판 신간의 부제로 쓰인 표현은 그것이 아니라 <另一種歷史書寫>입니다. 영문 제목은 An alternative writing of history입니다. 여기에서 alternative의 경우 한국에서 '또 하나의'라고 번역하는 용례가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착된 번역어라고 보이구요. '서사書寫'의 경우 '글쓰기'로 풀어 쓸 수도 있지만, '서사書寫' 역시 하나의 선택가능한 번역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국어의 우리말 번역어는 순한글이 될 수도 있지만, 한자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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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문제를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하는 건 좀 편의적인 입장 같습니다. <我的精神自傳>을 <내 정신의 자서전>으로 번역한 건 첸리췬 선생님이 후기에서 말씀하신 의미를 존중한 해석입니다. 한국어로 "서사"라고 쓰면 당연히 '敘事'를 연상하지 않을까요? 그걸 해석의 입장이라고 하면서 <내 정신의 자서전>은 왜 해석의 입장이 아닌지 궁금한데요? <歷史的另一種書寫>는 며칠 전 첸리췬 선생님이 제게 보내주신 편지에서 쓰신 제목입니다. <另一種歷史書寫>를 <歷史的另一種書寫>로 표현하시는 것처럼 <我的精神自傳>도 <我的精神的自傳>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그건 전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감안한 해석의 입장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독자에게 오해를 줄 수 있는 건 書寫를 그냥 서사로 써서 敍事로 읽히게 하는 것이 더 심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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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문제제기의 요지는 왜 "我的精神自傳"을 "我精神的自傳"으로 잘못 읽고 번역했느냐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저자의 후기를 말씀하시지만, 필연적 연관이 없다고 저는 봅니다. '나의 정신의 자서전'이라고 이해를 하더라도, '내 정신의 자서전'인지 '나의 정신 자서전'인지는 的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 정신의 자서전'을 의미하고자 했다면, 저자 역시 我精神的自傳이라고 제목을 붙였겠지요.<또 하나의 역사서사>와 관련한 문제제기는 편집 과정 중에 검토해보겠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와 관련해서 저는 책의 부제를 이야기한 것이고, 그것을 저자가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저자의 자유라고 봅니다. 역자는 그것이 다르게 표현될 때 다르게 번역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서사'가 敘事로만 읽힌다는 것의 근거는 여전히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것이 중대한 오해를 낳는다면 한자를 병기하면 그만입니다.
제가 지금 대만에 있어서 번역하신 책을 바로 볼 수 없는 상황인데요. 지인을 통해 받아 보기로 했으니, 받게 되면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다시 관련한 글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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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네요. 좀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我的精神自傳>을 번역하였지, <我精神的自傳>을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我的精神”을 “나의 정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自傳”을 연결하여 “나의 정신의 자서전”이 된 것이지요. “나의 정신” 다음에 “의”를 넣은 이유는 첫째, 그냥 “나의 정신 자서전”이라고 할 경우 한국어로서 좀 어색한 표현이고, 앞에서 말씀드린 한국어로서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첸리췬 선생님이 후기에서 이 책의 성격과 관련해서 설명한 부분을 참조해볼 때, “나의 정신”을 강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정신의 자서전”이 된 것이고 “나의”를 줄여서 “내”로 표기하여 “내 정신”이 된 것입니다. “내 정신”에서 “내”는 당연히 “나의”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문법적으로나 표현상으로나 “我的精神”이 정확하게 반영된 번역인 것이지요. 그리고 해석학적 입장에서 첸리췬 선생님의 의도를 강조하여 “내 정신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정신의 자서전”은 중국어 문법과 한국어 문법, 그리고 첸리췬 선생님의 의도까지 반영된 매우 정확하고 적절한 한국어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서사”가 왜 “서사(敍事)”로만 인식되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지금 이곳 한국어 환경에서 “서사(敍事)” 이외의 동음이의어 다른 한자표기는 거의 쓰이지 않거나 특별한 맥락에서만 쓰이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자문을 구해보시면 금방 아실 것이지만, “역사 서사”를 그냥 한글로만 표기하면 거의 대부분 “서사(敍事)”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편집 과정에서 “서사” 뒤에 “서사(書寫)”를 넣어서 쓸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매우 중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환경에서는 “서사(書寫)”가 글씨 베끼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첸리췬 선생님의 저서가 글씨 베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또 하나 지금 타이완에 계시기 때문에 첸리췬 선생님의 저서를 출판한 두 출판사의 사정을 모르시는 듯하여 이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내 정신의 자서전>이나 <망각을 거부하라>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판 기획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다만 출판 막바지에 출판 시기를 놓고 조금 경쟁이 벌어졌고 이에 3월 26일에 동시 출판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듯 합니다. 그러다가 그린비의 출판을 담당하는 인쇄소에 좀 다른 일이 생겨서, 그린비에서는 출판날짜 표기는 3월 25일로 하고 실제 출판은 3월 28일에 했고, 글항아리에서는 출판날짜 표기는 4월 2일로 하고 실제 출판은 3월 26일에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책이 앞이고 어느 책이 뒤라는 사실은 거의 무의미한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올해 첸리췬 선생님의 책이 대거 출판된다는 사실에 매우 고무되어 있습니다. 아마 10월에 첸리췬 선생님 초청 학회를 기획한다고 하는데, 벌써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첸 선생님의 좋은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한국과 중국의 비판적 지성들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아마 이 블로그 주인께서도 절실하게 느끼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많은 고통 속에서 작업을 겨우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간에 “루쉰전집번역위원회”에서 함께 일하시는 유 교수님(한신대)을 통해 다소간의 얘기를 전해듣기도 하였습니다. 동지적 입장에서 성공적으로 번역을 완성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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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문제제기와 관련해서는, 생각이 서로 다른데 토론으로 좁혀지지 않으니 굳이 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이미 충분히 논의된 것 같습니다.'서사'와 관련한 부분은 편집부 쪽과 더 검토를 해서 판단해야겠습니다. 좋은 의견 고맙습니다. 우리말 '서사'의 뜻을 조금 더 세심하게 고려해야할 것 같은데, 우리말에서 '書寫'가 '베껴 쓰기'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것이 '쓰기'와 의미와 완전히 다르지는 않으면서도 또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기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옮겨 적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베껴 쓰기'가 선생님의 용법에서처럼 부정적 어감을 주기 때문에 우선 여기에서는 '옮겨 적기'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역사를 쓴다는 것도 사실상 역사를 옮겨 적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베껴 쓰기'와 다르지는 않습니다. 전리군 선생님이 이 표현을 쓴 것은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서술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첫 번째 두 번째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도 그런 맥락에서 그저 인터넷 소개글에서 첫 번째를 강조하는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확인을 해 본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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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까막눈인 사람이, 전리군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끼어 들어 뭐라고 하면 우습겠지만 그래도 토론이 흥미로워서 한마디 할까 합니다. 우선 헤겔의 "Phänomenologie des Geistes"를 <정신 현상학>으로 번역한 것이 떠 오릅니다. 그리고 <정신현상학> 서설(Vorrede) 뒤에 약간 다른 제목을 단 것 또한 떠 오릅니다. <정신 현상학>이 등장하는 배우, 합창단, 감독, 청중 등 극장의 요소들을 뭉퉁거려 서술하기 때문에 <정신/Geist>이주체인지 객체인지 뭐가 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합니다.그리고 <정신 현상학>을 루카치에 이어 의식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한 개인의 <교육소설>로 보는 것은 <정신 현상학>의 협소한 독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전리군의 <아적>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리군의 <아적정신자전>이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더 가까운지에 따라서 <아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 질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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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기에서도 주체인지 객체인지 모호한 느낌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我的精神自傳>이라는 제목을 갖는 이 책은 '나'의 자서전이고, '나'에 대한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자서전'의 개별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정신'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일반적 자서전과 달리 '정신'적 측면을 중심으로 서술된 자서전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경제라는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사상이라는 정신적 조건 가운데 후자에 방점을 찍는 것이고, 양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개체 정신의 자유와 해방을 구조의 변혁의 전제로 제기하는 전리군 선생의 독특한 '정신사 연구'의 관점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대만판에서 영문제목을 My mental-spiritual autobiography라고 붙인 것이구요. 만약 <내 정신의 자서전>, 즉 <我精神的自傳>이었다면, An autobiography of my mentality/spirit과 같이 번역되었겠지요.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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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ental-spiritual autobiography“ 번역 관련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적하고 싶네요.„the european idea“란 표현에서 „european“은 형용사 형태지만 명사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이런 명사적인 의미가 우리말로 번역할 때 다시 나타나지 않나 합니다. 보통 „유럽 이념“으로 번역하지 „유럽적인 이념“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유럽이 낳은 이념“ „유럽에 뿌리한 이념“을 선호합니다만.
이런 맥락에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我的精神自傳>에서 <精神>이 형용사인가 명사인가, 형용사라면 앞 „european“과 같이 형용사의 탈을 쓴 명사인가란 질문입니다.
만약, 여기서 <정신>이 형용사의 탈은 쓴 명사라면 „ mental-spiritual“은 잘못된 번역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the european idea“에서의 „european“과 달리 „mental-spiritual“은 형용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european"에서와 같이 소유관계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를 떠나서 <정신>이 실체이며 주체이기 때문에 빗어지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我的精神自傳>에서 <아>와 <정신>이 묘하게 부동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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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가 형용사의 탈을 쓴 명사인지는 해석의 문제이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명확히 소유 주체인 명사로 쓰지 않았는데 그것을 소유 주체인 명사로 번역할 이유는 없지 않나요? "내 정신의 자서전"과 "나의 정신 자서전"은 각각 "我精神的自傳" "我的精神自傳"에 거의 일대일 대응이 됩니다. 이 부분은 중국어 어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的는 소유격 '의' 의미하고, 이 전후로 소유 관계가 분명한 반면 精神과 自傳 사이의 소유 관계는 불분명합니다. 저는 불분명한 것을 분명한 것과 바꾸어서 번역할 자유가 역자에게 허용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열려 있고, 역자도 해제 등을 통해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번역 윤리'에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저자가 남긴 모호함을 과도하게 명확하게 하는 것은 역자의 월권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것은 저자의 일정한 전략적 배치를 역자가 월권하여 단순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그리고 My mental-spritual autobiography는 대만의 편집자가 붙인 영문 제목인데, 저는 그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이 번역이 갖는 근사치가 남기는 공백의 차원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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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정신의>로 번역해서 소유관계를 확정짖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관계를 넘는 관계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말의 한계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고요. 그리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하면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암튼 책의 내용이 궁금하네요.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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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이런 말과 소유관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an und für sich“,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an und für sich“라는 Resultat가 다시 an sich가 되어서 변증법적 운동을 재개하는 복잡한 말을 한 것이 <정신 현상학>이 아닌가 하구요. 암튼 <전개된 서술>의 씨는 소유관계 혹은 소유를 목적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요.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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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die europäische Idee“를 운운한 논지는 님이 지적하셨듯이 „경제라는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사상이라는 정신적 조건 가운데 후자에 방점을 찍는“ 나, 정신, 자전 간의 긴장관계를 „mental-spiritual“이란 형용사가 좀 묽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mental-spiritual“은 „Phänomenologie des Geistes“를 „geistige Phänomenologie“로 만드는 것과 비슷한 형용사 사용이 아닌가 해서 그렇습니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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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我的精神自傳"을 영어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중국어가 같은 표현으로 동사, 형용사, 명사 등을 담당하는 특성 때문입니다. 게다가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spiritual로 부족해서 mental을 병기했지요. 이 번역어가 대충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대목입니다. 영문 표기는 저자와 편집자가 스스로의 중국어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이러한 번역이 '나, 정신, 자서전'의 긴장관계를 묽게 하는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영어 번역어를 찾은 것이지요. 여기에는 '정신'을 "내 정신의 자서전"과 같이 소유적 명사인 주체로 한정짓는 것 보다는 형용사적으로 쓰는 것이 더 원의에 근접하다는 이해가 깔려 있다고 보입니다.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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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자꾸 반복되는 것 같아서, 다시 글을 쓸 마음은 없지만 제가 없는 틈에 논의를 한곳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제 입장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我的精神自傳"을 번역한 것이지 "我精神的自傳"을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我精神的自傳"이라고 썼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가정에 불과합니다. 기실 현대 중국어에서는 "我精神的", "我頭腦的" 등 이런 식으로 다른 말을 수식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중국어 포털 사이트 Baidu 등에서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我的精神自傳"이 훨씬 자연스러운 중국어 표현이고, 그것을 저는 원문의 문법과 의미 및 저자의 의도를 살려서 정확하게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고심한 것이지요. 그리고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독자에게 쉽고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번역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월권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번역관의 차이이기 때문에 토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따라서 이런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차이를 무시하는 듯한 명백한 오역이니 월권이니 하는 과격한 용어는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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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모르면서, 그리고 <我的精神自傳> 읽어 보지도 않고 말을 많이 했네요. 책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내용이 매우 궁금한 저에겐 부질없는 논쟁이 아니라 책의 윤곽을, 그것이 비록 빙산의 꼭지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좀 볼 수 있는 유용한 논쟁이었습니다.님이 인용문 "그러나 내가 쓴 것은 나 자신의 인생 경력이나 일상생활이 아니라 정신 역정과 학술 생애에 편향된 것이며, 실록체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 자아 해부와 자아 분석에 편향된 저술 방법을 사용하였다."에서 전리군의 <我的精神自傳>이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독)Programmatik과 유사한 점을 발견해서 몇 마디 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번역의 문제를 넘어서 책 내용을 좀 더 파악하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을 정리하면 이렀습니다.
1. 님의 앞 인용문에서 <정신 현상학>에서 철학(헤겔)이 발로 걸었다 머리로 땅을 딛고 걸었다 하는 등 쌩쇼를 하는 의식을 보고 콤멘트하는 것과 유사한 (독) Programmatik을 전리군이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만약 그렇다면 정신이 Agens임과 동시에 Produkt란 것이 전리군의 <我的精神自傳>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입니다.
3. 헤겔적 의미로서의 정신의 이런 관계를 <의>란 한국어의 소유격이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저의 논지입니다.
4. 이와 관련 „Phänomenologie des Geistes“를, 분명 소유격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현상학>으로 번역하지 않고 <정신 현상학>으로 번역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영문 번역 „mental-spiritual“과 관련한 예술인생님과의 논쟁은 저에겐 번역보다는 „critical reading“의 문제였습니다. 큰 맥락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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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그제는 수업 겸 학교에 갔다가 진광흥 교수에게 <我的精神自傳>의 영문제목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진 교수는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당시 상황을 떠올렸는데, 전리군(錢理群, 첸리췬) 선생의 '정신' 개념이 정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편집진과 장시간의 토론 끝에 그렇게 결정하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책 전체를 읽고나서 되돌아와 이해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정신의 자서전'은 역시 월권 또는 오역의 산물이다. 사실 이 월권은 단순히 저자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독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항간에 주체로서의 '정신'의 자서전으로 이해되는 것은 예견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축자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제목'만 보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올바른 번역이다. 본래 책의 제목을 보고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인데, <내 정신의 자서전>은 역자가 과도하게 개입한 사례이다.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사실 '정신현상학'과 가까운 느낌이 없지 않다. "학문 또는 지의 생성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는 헤겔의 정의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전리군 선생의 '정신'도 '사상'과 '이데올로기'적 자원 및 그것이 결합되는 과정을 '나'의 역사적 인식 공간을 통해서 '현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문학적 실천'의 측면이 강한데, '나'라는 개별자를 통해서 인식 과정의 현상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나'를 소유 주체로 표현한 것은 번역에서 쉽게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