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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만... 그리고 전리군 관련 논의에 대한 간단한 논평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기 직전 노트북 자판이 고장나서 지금까지 수리를 기다리는 중이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한참 지나 도서관에 와서 쓰게 되니 그 흥이 살지 않는다. 홍콩에서의 전리군 선생 신작 관련 회의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한글판 초고 번역 세미나를 두 차례 진행했다. 연세대에서 열린 비판잡지 회의에 가서 구경도 하고, 외대에서는 지난 2년간 공을 들인 박현채와 전리군에 대한 사상 연구의 초보적 결과물을 발표하기도 했고, 시립대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이 불러줘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도 가졌다.

 

대만으로 돌아와서 먼저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전리군 선생 초청 토론회 관련 자료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홍콩 회의 자료집을 다시 살펴보았다. 한편 홍콩에 가기 전에 읽던 아리프 딜릭의 중국 관련 글들도 마저 좀 읽었다. 관련한 글을 쓰려는데 마침 메모를 해둔 한국 쪽 자료집 두 권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일단 기억에 근거한 '인상적 비평'으로 간단한 논평만 해둔다. 다소 과도한 요약이 있을 수 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성근제 선생의 '문혁의 기원'에 논의와 류준필 선생의 사상적 비판과 현실적 타협이라는 아포리아에 관한 논의, 그리고 이현정 선생의 엘리트주의 또는 지식인중심주의 비판 등이었다. 한편 왕휘와의 비교를 도입하는 글들이 다수였는데, 이를 통해 왕휘가 국내 중국 담론에 자리잡고 있는 무게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정말 왕휘를 인용하거나 그와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특히 나로서는 왕휘의 노신 연구와 그 이후의 중국적 현대성 연구가 선형적 발전이었는지 의심스러운데, 상관적이지만 복잡한 그 과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고점복 선생의 글에 관련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생각을 덧붙이자면 실존주의/현상학적 '개체'에 대한 논의는 '사회'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전체'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노신에 대한 니체주의적 해석과 맞닿아 있다는 의심이 든다. 전리군 선생은 오히려 노신과 마르크스를 연결시키는 '사회 속의 개체'를 중심으로 개체성을 논의하는데, 이러한 인간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이가 전리군 선생과 왕휘의 차이를 낳지 않았는지 검토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차이를 '절망에 저항하라'와 '망각을 거부하라'라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상징적 대비를 중심으로 잡글을 써서 논의해본 적도 있다. 따라서 둘의 역사적 중간물은 대상과 주체로 나눠지기 보다는 여전히 주체에 관한 것이고, 다소 도식적 위험을 감수하여 말하자면, 전리군의 역사적 중간물은 인식론적 전제 하에 도입된 사회적 개체를 말한다면, 왕휘는 존재론적으로 정향된 국가적 개체 또는 국가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성근제 선생의 전리군 선생 비판은 이전에 조금 읽은 바가 있었는데, 이번의 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전리군 선생의 글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거두고, 오히려 서로 다른 문혁관을 대비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논의를 확장하는데 아주 필요하고 적절한 작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울러 이현정 선생의 엘리트주의 비판 역시 내용적으로 보면 비슷한 맥락에 놓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기존의 입장으로부터 연역된 서술이 일정한 '사회사적 성과'를 희생시키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아마도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가 출판되면 이 부분에 대해 보충이 이루어질 것이고, 논의는 좀더 풍부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연역적 서술은 기본적으로 반관료주의 계보를 통해 재구성된 모택동의 문혁을 통해 그 기원을 1956년의 백화제방으로 끌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문혁이 모택동과 당의 반관료주의적 문혁이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인민'을 대표하는 모택동과 당을 중심으로 한 역사서사이다. 반면, 전리군 선생은 '인민'이 갖는 추상성을 여러번 비판하면서, 그 추상성이 '대리주의', '포퓰리즘', '엘리트주의', '관료주의' 등을 배태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전리군 선생은 오히려 '사회'와 '당국체제' 사이의 긴장에 먼저 주목하고, 이로부터 당국체제의 발전주의적 동원과 사회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1957년 체제를 도출하고 있다.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노트>의 서술 방식, 그리고 <모택동~>의 서술방식을 보면 매우 명확하다. 내가 보기에 모택동은 분명 이중성을 가지며, 당-대중의 모순을 표현해주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화의 작업에 서기 위해서는 '사회'(또는 '민간')를 통해 모택동과 당을 상대화할 필요가 있어 보이고, 그렇게 당국체제 바깥에 재발견된 사회 속의 '공백'과 '망각'에 역사적 지위를 부여함을 통해서 역사의 다른 가능성을 소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류준필 선생이 지적한 전리군 선생의 아포리아는 아마도 사상적 비판과 현실적 타협의 모순을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왕휘의 입장을 다시 읽는 가능성을 제시 하고, 이를 전리군 선생에게 반문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읽기에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의미 있는 차이를 갖는 정치적 입장을 무차별화하는 강력한 반정치적 사유로 나아갈 수있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류준필 선생이 그런 위험성을 알면서 '반문'을 했을 수도 있겠다. 이 문제는 사실 이론과 운동의 관계에 관한 고전적 문제이기도 하고,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알튀세르가 특히 집중했지만 동요 속에서 풀지 못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시도를 진행하는 중인데, 나는 궁극적으로 '이론적 작업'의 대상은 '민족적인 것'이라고 보고, 이는 역사화를 통해서 발견되며, 이러한 이론적 작업은 궁극적으로 '민중'적 공간으로 되돌아와 사상적 비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보기에 이 아포리아는 어떤 의미에서 '계급투쟁' 또는 정치에 의해서 계속 조건 지어지면서도 그 안에 공간을 차지하기 보다는 그 공간의 변형이라는 효과를 냄으로써 자기 몫을 다하고 사라지는 어떤 촉매적인 것으로서의 '이론'의 위상을 확인함을 통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는 노신과 전리군의 '역사적 중간물'의 일반적 층위와도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적인 것'에 대한 연구로서의 전리군 선생의 이론적 연구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정치'로 돌아와 매개적 심급으로서 작동하면서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리군 선생에 대한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는 비난은 오해일 수 있는데, 전리군 선생이 노신의 현대성 비판을 니체가 아닌 마르크스와 연결시켜 이해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리군 선생이 궁극적으로  교육/계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체성의 '자유', 즉 주체성이 '평등'의 전제임을 강조한다는 점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측면은 전리군 선생의 독창성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 곳인 듯 하고, 중국적 또는 제3세계적 사상자원으로 발전될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내가 보기에, 전리군 선생의 비판이 진정한 이론적 비판일 수록 그 자체로 진정한 정치적 효과를 가질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운동과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사이비 '이론'적 비판일 수록 그 정치적 효과는 난망한 것이 될 것이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역시 '민족적인 것'의 내용이 된다. 이 부분은 부분적으로 논의되었지만, 종합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특히, <모택동~>을 통해서 이를 본격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홍콩에서의 논의 가운데 나의 오랜 공부 친구인 胡清雅의 글이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나와 매우 근접함을 다시 확인하였다. 내용적 측면에서 상해대학의 王翔이 나와 가장 근접해 있다면, 清雅는 '냉전'을 재사유하면서 나와 유사한 문제설정을 제시한다. 탈냉전적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대만적 시각이라 할 수 있는데, 읽어볼 만한 글이라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탈냉전의 문제의식은 상호간의 인식 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데, '내재적 타자'를 역사적으로 사유함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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