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1/11/21

민족과 민중의 변증법적 관계로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고민을 진행하는 가운데 '민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얻게 되었다. 사실 늘 그렇듯이 새로움은 모종의 계기를 통해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비로소 말할 수 있게 지각된 것'이다. 본래 전리군 선생이 중국의 민간사상가라는 논의의 한 축을 강조했었고, 진광흥 선생도 미조구치 선생으로부터 이어받아 민간이라는 범주를 계승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궁극적으로 민간 개념은 노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한 바 있듯이, 노신에게 민간은 내가 민족과 민중으로 표현하려는 변증법적 관계를 체현하고 있는 개념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민간은 역사적 함의과 정치적 함의를 동시에 지닌다. 노신의 민간의 역사전통과 문화에 대한 천착과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간의 주체성 강조는 그의 삶과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물론 이러한 초보적 판단은 충분한 연구와 분석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노신 연구의 역사를 다시 검토하면서 21세기에 요구되는 노신에 대한 전면적 재해석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돌고 돌아 다시 노신인가?

 

물론 중국 당대의 역사 속에서의 정치와 사상의 관계을 검토하는 문화/실천적 시좌 구축과 이를 통해 남한과 한반도 나아가 아시아를 새롭게 인식하는 지평을 조금이나마 열어보려는 기존의 시도 역시 과제로 남아 있다. 여러 현실적 조건들을 검토하여 작업의 순서를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월러스틴의 '보편적 보편주의'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창비, 2008)에 내가 근래에 고민하는 문제와 맞닿은 논의들이 전개되어 있다. 월러스틴의 논의는 두 가지 축이 전개되는데, 하나는 기존의 논의를 요약해서 반복하는 것, 즉 세계체계의 역사성과 그 위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세계체계를 구성하는 지식구조에 대한 것이다. 물론 월러스틴은 전자를 전제로 후자를 포섭한다. 탈식민주의적 비판은 이렇게 월러스틴의 논의 안에 자리를 잡는다.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차츰 고민해봐야겠다. 나는 민족과 민중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개별적 특수성과 관계적 보편성의 변증법적 결합을 고민했는데, 물론 역사성으로서의 민족(해체과 구성)과 정치성으로서의 민중(주체)으로 좀더 세밀하게 나아갔고, 민족이 내재성을 근거짓는 역사적이고 인식론적 범주라면 민중은 당대의 모순에 근거하여 역사의 진보의 방향과 당파성을 설정하는 주체의 범주로 보았다. 역사성으로의 우회를 통해 개별적 특수성을 밝히는데 비판적/해체적인 사유(또는 니체적 사유)가 주요하다면, 모순을 중심으로 당대의 구조를 분석함을 통해 주체를 소묘하는데는 과학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또는 헤겔/마르크스적 사유)가 주요하다.

 

비오리엔탈리스트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인식과 분석과 가치진술을 보편화해야 할 필요성과, 보편적인 것을 내놓는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이 특수주의적인 인식과 분석과 가치진술을 잠식하는 것에 맞서 그 특수주의적 뿌리를 지켜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종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교환 속에서 우리의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보편적인 것을 특수화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종합에도 다가갈 수 잇을 것이다. 물론 이 종합에 즉각적으로 이의가 제기될 것이다. 이것은 쉬운 게임이 아닌 것이다. 90쪽.

 

보편적 보편주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이른바 과학적인 것과 인문학적인 것을 단일한 인식론으로 재통합하고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개입'을 위한 모든 정당화 근거들을 고도로 객관적이고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138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 문제의 내부성에 대한 한 마디

앙겔부처님의 [북한을 왜 찬양하냐고] 에 관련된 글.

 

앙겔부처 님 덕분에 요즘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전개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제기하신 북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사파'의 '찬양'이 문제이긴 한데, 자유주의 또는 제국주의와 별 다르지 않은 북한체제 비판도 문제가 아닐까요? 이 문제는 진보 대통합에서 진보신당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던 진보교연에서 제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충분치 않았고 느닷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주사파'를 포함한 엔엘 계열의 북한 '찬양' 또는 '옹호' 그리고 '방어'가 북한 독재 체제의 공고화에 도움이 되는 정도와 그들이 같은 논리적 연관 속에서 제출하는 제국주의 비판이 갖는 사회개혁 및 반전평화 운동에서의 부분적 역할은 조심스럽게 나누어 평가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전자 즉 북한체제 '찬양' 또는 '옹호'는 매우 추상적이고 이념적 차원의 문제이고, 특정한 정세 속에서 남한 운동의 왜곡을 낳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대응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재적 비판으로 머물게 됩니다. 자유주의적 비판과도 다르지 않게 됩니다. 북한 문제를 내부화하는 방식은 바로 이를 남한 사회의 계급 정치와의 관련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사파'가 북한을 찬양한다고 북한 지배계급이 갑자기 큰 힘을 얻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담론이 제기되는 남한에서 그것이 갖는 영향력도 갈수록 약해지고 있구요. 실제로 이념적 전망의 차원에서 보면 북한체제와 남한체제는 동일하게 민주적이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주요하게 관료 독재와 자본 독재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상호 외재적 비판은 오히려 '정치'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습니다. 정치는 내부로부터만 전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제국주의 세력의 반평화적 긴장 유발 및 전쟁 시도는 남한 민중 뿐 아니라 북한 민중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계적 경제위기와 맞물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구요. 실제로 엔엘 그룹이 실천하는 남한에서의 통일운동/민족민주운동을 중심으로 식민과 분단의 유제들을 극복하려는 실천은 일정한 진보성을 갖는 것 같는다고 보입니다.

 

결국 엔엘의 북한 인식의 문제는 오히려 이러한 긍정성을 평가하고 연대하면서, 구체적 정치 속 '왜곡'의 지점에서 토론을 확장해야지, '주사파' 등의 조금은 선정적 표현으로 그들을 분리하는 방식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물론 이념적 전망의 차원에서 북한 사회주의의 전제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운동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제출될 때 대안적 의미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소박하게나마 남한의 반미제국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북한에 대한 '옹호'나 '찬양'을  '주사파' 또는 '종북주의'라고 매도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