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페넬로페의 노동?

 

"...아마란타는 자기의 수의를 짜느라고 평생을 보낼 것 같았다. 낮이면 그것을 짜다가 밤이면 다시 풀어버리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는데, 이 뜨개질은 그녀가 고독을 물리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고독을 누리기 위해서 하는 일인 듯 싶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

 

<오뒤세이아>에 나오는 페넬로페 이야기를 변주한 것이 틀림없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문득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을 여기에 유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페넬로페를 둘러싸고 있는 저 귀찮은 구혼자들(이데올로기들?).

그녀는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독을 얻기 위해

아무런 직접적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 노동을 계속한다.

그녀에게 고독이란 근대 자유주의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출발점에서 주어진 인간의 '숙명적' 조건이 아니라

쟁취하고 확보해야 하는 목표였다.

 

가장 성공적일 때조차 무밖에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노동은 무의미의 극치로 보인다.

알다시피 그녀의 노동은 '도래할 왕'의 자리를 비워둔다는

간접적 결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녀가 그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왕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왕은 어디선가 죽었을지도 모르고, 다른 섬에서 이 곳을 잊고 지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면

왕이 도래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두려워하는 귀족들 때문에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유폐됐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넬로페의 무의미한 노동이 왕을, 그리고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은

오뒤세우스, 곧 과학과 무엇보다 (공산주의) 정치를 위해 투쟁하는

페넬로페의 노동이 아닐까?

그가 철학과 과학, 다른 한편으로 철학과 정치를

서로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면서 동시에 내재적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은

철학의 이름으로 과학과 정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페넬로페는 오뒤세우스가 아니었고 오뒤세우스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페넬로페가 없었다면 오뒤세우스는 자신의 부재 중에 왕좌를 노렸던

저 탐욕스러운 귀족 구혼자들에게 왕좌를 빼앗겼을 것이라는 점 역시 잘 알았기에

알튀세르로서는 페넬로페의 노동, 철학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철학은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만드는 노동이라고.

그리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싫어한다고.

그러므로 철학은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끊임없는 도래를 환대하기 위해서 공간을 비워두는 투쟁.

그러므로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위대한 비-지배(non-domination)의 이상이다.

철학의 전통적/관념론적 실천과 철학의 새로운/유물론적 실천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갈라지는 곳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은 최종심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그의 테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의 계급투쟁을 마키아벨리적 의미,

곧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귀족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에 이끌리는 평민 사이의

비대칭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철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거나 도래했더라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귀족 구혼자들에게 핍박당하는

과학과 (공산주의) 정치를 위해, 이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이들의 본성인 무한한 개방성과 확장성을 옹호하고 확대하는 지적 실천이다.

 

그런데 왜 여전히 철학이란 말인가?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이고, 따라서 이를 대상으로 한 물리적 투쟁이 필요한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다만 여기서 철학이 할 수 있는 유한하지만 유효한 역할은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국가-장치로써 작동하지만, 그 결과는 주체들 안에서의 의식 효과로 나타나고

따라서 이 효과에 대한 막대구부리기를 통해 철학이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만들어낼 때

과학과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해방 효과가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 이상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의 전능이라는 계몽주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는 관념이 물질적 실존 및 현실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으며

관념이 이런 물질적 구조의 한 항인 한에서 여기에 작용함으로써

전체 구조를 '변용할 수 있다'(전체 구조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이조차 관념론이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이에게 소박 실재론과 의지주의라는 비판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10/08/05 14:59 2010/08/05 14:5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107

Trackback URL : http://blog.jinbo.net/aporia/trackback/107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83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 176 : Next »

블로그 이미지

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Tag Cloud

Notices

Archives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88666
Today:
143
Yesterday: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