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이란

전통적 의미에서 '존재론'이 아니다.

즉 존재를 결정하는 일차적 원리가 '물질'인지, '정신'인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 등의 철학자가 분명히 한 것처럼,

유물론이란 관념론 비판이다. 그의 제자 발리바르의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빌자면,

"그것[맑스의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2차적인 입장으로서, 즉 개인들의 노동 및 사회적 생산을 결정하는 현실성을 은폐, 기만[신비화], 억압하는 (추상적, 사변적인, 등등의) 관념론적 표상들/환상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시된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pp. 218~219, 도서출판 b, 2007)

 

(물론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가 즉각 덧붙이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로서,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념론적 표상들의 형성 및 현실적 생산의 과정에 대한, 요컨대 관념화 과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이다. (…) 역사유물론은, 역사의 관념화는 그 자체가 결정된 역사의 필연적 결과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성"(같은 책, p. 219)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의 문제이므로,

유물론/관념론이라고 할 때 쟁점이 되는 철학의 문제를 다소 초과하지만,

유물론적 비판이 진리/허위라는 인식론적 대당에 갇히지 않는다

는 점을 말하기 위해 덧붙인다.)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2차적이고, 말하자면 (대체)보충적(supplementary)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물론의 습득을 더 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태는 반대일 수 있다. 자기완결적인 유물론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말하자면 유물론의 '교과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유물론에 접근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유물론에 접근하려면

그것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관념론을 알아야 하며, 더욱이 그 구조와 모순과 아포리아와 분기점

들에 대한 철저한 파악에 입각해 이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관념론에도 역사가 있고, 정세에 따라 관념론의 지배적 형태가 변화하므로,

또한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이 항상-아직 관념론적으로 전유될 수 있으므로,

(한편 역으로 관념론의 어떤 요소가 특정 정세에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으므로)

특정한 정세에서의 유물론(적 효과)이 다른 정세에서도 지속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유물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오늘 이 곳에서 유물론(적 효과)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세적 질문으로 대체된다.

조건이나 관계와 분리된 본질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조건이나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곧 모순을 움켜쥘 수 있는) 분석이 문제이므로

과학이나 정치 따위의 비철학적 사고/실천들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유물론적 철학은 과학이나 정치로 환원할 수 없다.

특히 과학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이란, 주어진 문제에 대한 문제 해결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과학이 다루는 것보다 많은 문제들이 있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한 선택과 해법은 착취 체계를 강화할 수 있고,

다른 문제에 대한 선택과 해법은 그 역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를 '부르주아 과학', 후자를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 부를 순 없다.

또한 과학에 대한 부르주아적 전유가 되풀이되면서 만들어진

현재의 지배적 과학 형태로부터 '과학 일반 = 부르주아적 사고 형태'라는 결론을 추론한 후

과학 일반을 거부하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는 비약이며, 정치적으로는 무장해제일 뿐이다.

 

문제는 부르주아적으로 전유된 과학의 지배적 형태를 해체하고

과학을 해방적으로 전유하면서 개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특정한 문제 안에 걸려 있는 쟁점을 드러내고, 해방에 긴급한 문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과학적 문제 해결 과정 안에 스며들어 있는(따라서 과학의 과학성을 억압하는)

관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이 해법이 산출하는 과학외적 효과를 반성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철학적' 사고를 요청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정치가 과학 쪽에 파견한 사고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을.

 

알튀세르가 굳이 철학을 말하는 것은, 정치와 과학의 외재적 관계가 미치는 효과

(자본주의 안에서 수없이 나타나지만,

'뤼셍코주의'에서 보듯 현실사회주의 역시 비극적으로 체험한)

를 경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철학이란

정치와 과학 사이의 '취해진 내적 거리', 서로가 서로를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긴장적이고 갈등적인 묶음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는 관념론적 철학이 항상-이미 점유하고 있는, 따라서 가득 찬 공간이며

(왜냐하면 정치와 과학 자체가 관념론적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적 정치와 과학에게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쟁취하기 위해

관념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오늘날 유물론을 말한다면, 또는 누가 유물론 철학인가를 판단하려면,

오늘날 해방과 변혁, 연대 등을 위해 가장 긴급히 사고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기존의 정치적/과학적/철학적 사고 안 어떤 요소가 이 같은 사고를 억압하는지,

특정한 입장취함의 노림수와 위험부담은 무엇인지 등을 반성해야 한다.

이견과 갈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진리적 사고 과정의 구성적 요소라면

아마도 이를 묶으면서 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기예와 윤리가

오늘날 유물론의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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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1/13 15:33 2009/01/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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