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쯤이었나,
더듬더듬 불어를 읽기 시작하고, 영어를 조금 읽을 수 있게 됐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의 영역본을 보았는데,
그러다 국역본 관련 대목에서 꽤 중요한 오역을 발견했다.
공부 삼아서 그 오역 전후의 문장이 왜 그렇게 나오게 되었을까 에 관해서
개인 미니홈피에 적어 두었다가
아는 사람들이 그 글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참고하라고 내 글을 그 클럽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그 글을 번역하신 분이
내가 그의 번역이 오역 투성이라고 비난했다고 말했다는데
그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 하나 있다면 위의 사례인데,
글쎄, 내가 그 글을 다시 읽어 보았지만 별로 비난은 아니었고,
또 그를 욕보이려고 여기저기 퍼뜨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역에 관해서 지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폭력/비폭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따라서 큰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이런 논변에 관한 오역 지적은, 다시 생각해 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대단한 권위자도 실수를 할 수 있고
따라서, 적어도 중요한 대목의 경우에는, 원문을 직접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는 교훈을 남긴 경험이었다. 뭐 이런 태도를 '이론주의'라고 부른다거나,
'활동가의 본분'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평가의 타당성 여부에 관해서는 보는 이들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얘기가 나온 김에, 그 때 내가 쓴 글을 다시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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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를 하신다니,
제가 전에 이 글 마지막(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각주 오역에 관해 써둔 게 생각나네요.
이거 세미나할 땐 항상 이 문구가 문제가 됐지만 대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었는데
혹시 그곳에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적어봅니다.
별로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니, 그냥 적어둔 영문판을 참고하시는 용도로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참고로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balibar1.htm
에 가시면 영문판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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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별도로 검토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제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들 전체를 내포한다. 그것은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무덤이며 또한 그것들의 추상적 전도이다. 부의 불비례성이 적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의 불비례성과 전에 없이 짝을 이루는 세계에서, 그 주된 경계(남-북이라고 불리우는 것, 또는 달리 불리우기도 하는 것 ― 왜냐하면 '남'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가 인류를 폭력을 항상적으로 감수하는 인류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인류라는 두 개의 인류로 분리시키는 경향을 갖는 세계에서, 인권의 정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제 그것은 그 유명한 귀절에서처럼 폭력(대중의, 피지배자의)은 "새로운 사회를 배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라는 관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영역본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I will have to come back to this question: in a sense it contains, in its turn, the totality of the aporias of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It is the tomb of moralism and legalism as well as of their abstract reversals. In a world in which the disproportion of wealth goes hand in hand, now more than ever, with that of the capability of annihilating the adversary, a world in which the principal frontier (whether it is called North/South or otherwise, for the "South" is everywhere) tends to separate two humanities, one which is constantly subjected to violence and one which is constantly girding itself against it,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cannot be "nonviolent" in principle. Nor however can it fail to go beyond the idea that, according to the famous saying, (the) violence (of the masses, of the oppressed) is "the midwife of every old society which is pregnant with a new one" (Capital, vol. I, 916)..."
(영역본이 맞다고 가정할 때)
국역본은 세 부분을 오역함으로써
위 문구 전체를 수수께끼로 만든다.
1. 영역본에 따르면 the tomb에 걸리는 것은
'(of) moralism and legalism'일 뿐만 아니라
'(as well as of) their abstract reversals'이다.
반면 국역본은 이 대목을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무덤이며 또한 그것들의 추상적 전도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가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추상적 전도라는 의미를 낳는다. 하지만 원문은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가 도덕주의, 법률주의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전도[곧 '대항폭력주의' - 이번에 추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이 첫 문장의 구조는 이후 논변 전반의 구조를 집약하는 것인데
첫 문장을 오역함으로써 이후 논변도 오역의 위험을 안게 된다.
아래서 이를 살펴볼 것이다.
2. 가장 결정적인 오역은 역시
"인권의 정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는 대목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cannot be "nonviolent" in principle",
즉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 없다"이다.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ne peut être "nonviolent"
즉 영역본과 같다.
이런 오역은 사후적으로 앞 문구에 대한 해석을 규정한다.
국역본은 부의 불비례성이 절멸능력의 불비례성
을 동반하는 한에서 현재의 대항폭력은 어떻게 하더라도
기존 폭력과 겨룰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전술적' 가치가 없고
오히려 저 비대칭적인 폭력 사용의 빌미만을 제공함으로써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거둘 뿐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그리고 여기에 분명 얼마간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오역도 가능했고 그 수용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번역은
폭력의 과잉이 계급투쟁을 점점더 깊이 규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압도함으로써
'인권의 정치'가 벌어지는 지형을 바꿔놓는다는 뉘앙스이며
이는 결국 '도덕주의, 법률주의'적 방식으로 대항폭력을 불법화
하려는 부르주아의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스피노자적인 노선,
즉 대중들의 폭력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국가 또는 제도와 연결시켜 사고하려는 노선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앞 문장에서 제시한 테제('무덤')를
현 정세와 연결시켜 전개시키는 것이다.
반면 국역본은 발리바르의 이전/이후 사고와 대립될 뿐만 아니라
도덕주의, 법률주의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사실 국역본의 뉘앙스야말로
대항폭력을 비판하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이 매양 말하는
'현실적 근거'가 아니던가?)
3. 국역본은 이 문장 다음을 '이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잇는다.
반면 영역본은 'Nor however'라고 하면서 역접을 사용한다.
원문은 여기서 'cependant'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렇지만'이란 뜻으로 '이 때문에'의 의미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그러므로 우선 자구적인 오역이다.
(그러니까 'however'를 'so'라고 오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오역이 생겨났을까?
그건 물론 앞 문장을 '비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라고 번역했고,
뒷 문장이 나이브한 '대항폭력'론을 비판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반면 원래 문단의 논변 구조는
1)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는 도덕주의/대항폭력론 모두의 무덤
2) 도덕주의 비판
3) 나이브한 대항폭력론 비판(이 문장 이하에서 본격화될)
이며, 그런 한에서 2)와 3)이 'cependant'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전반부 문장을 오역한 것이 'cependant'의 오역이라는
'사후복수'로 나타난 셈이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