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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최신글 두 편

Le genre du parti. Féminisme et communisme : un recours utopique? (2010)

(http://www.ciepfc.fr/spip.php?article202)

Remarques de circonstance sur le communisme, Actuel Marx, n° 48 (septembre 2010)

(http://socio13.wordpress.com/2010/10/07/etienne-balibar-remarques-de-circonstance-sur-le-communisme/)

 

며칠 전 첫 번째 글을 발견하고, 해야 할 일을 내팽긴 채 하루종일 저 글만 읽었는데

오늘은 아래 글을 찾았다. 학교에 Actuel Marx가 들어오지 않아 어떻게 저 글을 구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어떤 의인이 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았다.

왠지 오늘도 다른 일을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읽고 싶은 글이나 주제는 정말 너무 많다.

발리바르의 첫 번째 글이 다루는 주제이거니와,

최근 새삼 관심이 가는 문제가 70년대 말 유로공산주의 논쟁이다.

대략 뭐를 읽으면 될 것 같다는 목록도 어렴풋이나마 잡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좋은 글 찾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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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0 15:28 2010/10/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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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의 알튀세르와 정세의 알튀세르

구조와 정세.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알튀세르가 양자를 중요 개념으로 제시할 때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요소를 평가할 때,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고립시켜 보지 말라는 것.

요새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관점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한 요소는 그것을 초과하는 구조 속에서 보아야 한다.

한 요소는 그것을 초과하는 정세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양자 사이의 거리가 의외로 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는 거리가 아주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구조 역시 사건,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돌발'(surgissement)

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구조를 '과잉결정'으로 사고한 한에서,

그것은 구조주의의 속류적 판본보다 애초부터 훨씬 불안정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원용하는 시몽동의 개념을 빌자면 '준안정적'(metastable)인 것.)

이 때문에 정세, 마주침, 또는 '과소결정' 개념 등과 긴장적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기원에서부터 발생한 후 차근히 단계를 밟아 숙명적으로 오늘에 이른 구조가 아니라

돌발한 사건이라는 불안정한 심연 위에 있는 구조.

구조 개념의 통상적 용법에 비추어 볼 때, 참 특이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임의로 조작가능한(manipulable) 것은 아니되, 고정되거나 불변적인 것도 아닌 구조.

유물론적이지만 변증법적인 구조.

그리고 또는...

 

일단 오늘 든 생각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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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8 20:29 2010/10/08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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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 Folds, 'Still fighting it'

 

 

알바하는 동안 접근하지 못한 인터넷이 되니

그동안 듣고 싶으나 못 들었던 몇 곡을 들을 수 있어 좀 행복하다.

 

많이들 알겠지만 이 곡은

<무한도전> 215회(예능프로그램 횟수를 외우게 될 줄이야!)

레슬링 경기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유재석이 3단로프에서 '파이브스타 프로그 스플레쉬'

로 게임을 마무리지은 후 정형돈을 껴안는 장면

을 전후해서 흐르던 노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바 때문에 무도 215회를 보지 못해 애태우다가

인터넷으로 어렵게 동영상을 구했는데

동영상과 추석 재방송까지 해서 너댓 번은 본 것 같다.

예능을 보고 이런 느낌을 받은 건 거의 처음이다.

(<무도> 여자권투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 편은 이렇게 반복을 부르는 강도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싸이의 <연예인>이 그렇게 슬프게 들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카메라를 통해 가깝게 다가오는 정형돈 이하 멤버들의 신체적 고통과

그를 보고 기뻐하고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이 교차편집되면서

뭐랄까, 연예인이 하나의 환유인, 대중들 앞에 서야 하는 이들이 겪는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 앞에 선다)

비극 같은 걸 느꼈다고 할까.

사실 이런 서사는 흔한 것이고, 많은 경우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우리를 몰라주고 비난하느냐

따위의 반(反)비판적인 투정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내내 들었던 그 유치한 어리광!)

WM7에 대한 이런저런 비난에 대해 김태호 PD가 보인 반응도 좀 비슷했기에

탐탁치 않은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그 경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형돈의

그 강렬하지만 묵묵한 신체적 고통이 일종의 진정성을 느끼게 했다.

 

어쨌든 예능이나 레슬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214~215회는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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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16:43 2010/09/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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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폴, '고등어'

 

 

작년 말이었던가, 루시드폴 4집 <레미제라블>이 잔잔한 돌풍을 일으켰었다.

당시 극빈 상태였고, 집 오디오가 고장난지라 음반을 사지 못했다.

오늘 문득 그가 기억났고, 뮤비 하나를 듣는다.

 

몇년 전 처음 선배의 소개로 루시드폴을 들었을 땐

그가 나중에 3집 <국경의 밤>의 '사람이었네' 같은 노래를 만들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말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양탄자와 고등어의 목소리를 듣고

그걸로 우리에게 분노와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과

한 시대에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알바비를 타면 음반 가게에 꼭 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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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15:43 2010/09/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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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에, 학교

광폭한 추석 알바가 일단락됐다.

다음 주에도 일부 있긴 하지만, 이번만은 못하다.

한편으로 보면 여유가 생긴 거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큰 경제적 난관이기도 하다. ㅠ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에다 정기적으로 돈을 부치고 있는데

그래서 불안정하나마 버는 데도 전이랑 다를 것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지난 주에 알바 외 모든 일에 손을 놓는 바람에

밀린 일들 때문에 이번 주는 정말 정신없게 생겼다.

오늘까지 글 하나는 초벌번역 마치겠지만

그거 손보는 데도 시간이 만만치 않을 테고

이번 주에 해야 하는 수업 발제,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려워지는 일본어 수업,

어쨌든 주중 밤시간을 앗아갈 깨알 같은 알바까지,

쉽지 않다.

 

그러니 오늘부터 다시 작업 모드로 전환해서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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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10:25 2010/09/2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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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해 둘 말

읽기만 하는 게으른 정신을 경멸한다.

- 니체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무한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잊지 말고 새길 말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번역하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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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0 20:26 2010/09/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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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까지 딱 열흘!

글 두 편을 번역해야 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일해도 한 편을 끝낼까 말까다.

초벌 번역이라 사실 거의 처음부터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더욱이 내일부터 나흘간은 죽었다 생각하고 알바만 해야 한다.

다음 주에 발제도 하나 해야 하고, 아마 그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오늘까지는 무조건 한 편에 대한 1차 번역을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략 두 장에 70분 정도 걸리니까

490분. 8시간. 밥 안 먹고 해도 밤 10시나 되어야 마칠 수 있다...

 

뭐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번역하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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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0 13:53 2010/09/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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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학기 초라 정신이 없고

그 외로도 할 일 및 알바가 꽤 많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학기가 가면 허무감이 엄습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최소한의 목표를 세우는 것에서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수업 및 번역, 그리고 알바 이외의 시간에는

저 책을 손에서 떼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공부할 문제와도 관련되고, 또 수업이나 번역에도

도움이 될 책이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10월까지 저 책을 읽는 게 목표다.

설마 이것도 못 하진 않겠지? --

다행히 어떤 이가 저걸 pdf로 만들어 주어서

항상 휴대하고 읽기 좋게 되었다.

 

그러면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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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1:34 2010/09/1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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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구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또 하루가 갔다.

내일 오전 알바가 끝나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것도 같지만

담주부터 몰아칠 또 다른 알바를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늦어도 월요일까진 일 하나를 끝마쳐야 한다.

사실 그렇더라도 이미 늦다...

 

새로운 생활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신이 없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시간을 요령 있게 쓰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꽤 크지만.

내가 멀티플레이어가 못 된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하나씩 일을 마무리짓는 것이다.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낼 알바 준비를 해야 하는데

밤이 되니 조금 진이 빠지긴 한다.

그래도 정신을 좀 차리고.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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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6 22:33 2010/09/1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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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uring Reality

 

 

 

"We will begin with the following observation: what we have called Althusser’s most productive period coincided with a new-found interest in contemporary painting and literature, particularly drama. (...) The argument emerging here would become explicit in an unfinished piece from 1968, “Sur Brecht et Marx,” in which Althusser acknowledges that far from Marxist theory helping him understand theater, it was rather that “El Nost Mila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y research. Seeing El Nost Milan I was better able to understand certain important things in Marx’s thought” (Althusser 1994b, 524)."

- Warren Montag,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2003, p.17, p.35.

 

알튀세르의 스승 바슐라르는 철학자들에게

"과학들의 학교로 가라!"고 외쳤다.

20세기 들어 한층 가속된 자연과학들의 진보에 비해

철학은 사뭇 한심한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더러

추상/구체, 사고/경험 따위의 부당한 대립항을 만들어

자연과학의 활력있고 실험적인 실천을 왜곡하는 표상을

자연과학에 뒤집어 씌우고, 그와 상관적으로 철학을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배척해 더 퇴행적인 상태로 뒷걸음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강조하면서

바슐라르의 이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거기가 어디든, 새로운 사고가 돌발하고 운동하는 곳으로 나아가

듣고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게 그의 진의였으리라.

알튀세르가 과학 개념을 양보하지 않았다 하여

인본주의자들은 그를 스탈린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선험적으로 참칭하지 말고

현대 과학들이 실천하는 과학성의 규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에 비추어 맑스주의가 진정한 과학성에 도달했는지 곰곰이 반성하며

'도래할 과학성'을 위해 힘쓰자고 외친 것이

어찌 스탈린주의일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알튀세르의 '비교조적' 특징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입각해 예술성에 대한 어떤 정상성/규격성(normality)

을 만들겠다고 정색하지 않았다(부르주아 예술 vs 프롤레타리아 예술?).

물론, 그런 유혹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스주의 곧 역사과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기존 과학(성) 개념에 개입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 예술(성) 개념에 개입하려는 생각이 알튀세르에게 있었고

이 때 그 선의와 상관없이 개입이 점령과 이용(exploitation)이 되는 그런 위험,

예컨대 스탈린주의나 인본주의와는 다르지만

자신의 이론적 반인본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전'(canon)을 정립하려는

위험이 항상 출몰하게 되므로.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사이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전통적인 의미의 '미학'이나 '예술론'에 가장 가까운,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를 완성.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예술과 알튀세르가 마주친 지배적 방식은, 위에서 그 스스로 말하듯,

어떤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사고,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정교히 하는 식이었다. 즉 알튀세르에게 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한 예술의 효과다.

예컨대 예술을 다룬 알튀세르의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를 논평하며

워런 몬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알튀세르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The final sentence of the essay, perhaps one of the most powerful Althusser has ever written, (...) suggesting that his essay is the effect of the play, the play pursuing itself, its themes, its passions in him as in so many others: "I return to myself and the question, sudden and irresistible, assails me: whether these few pages in clumsy and blind way are nothing more than this unknown play from a June evening, El Nost Milan, pursuing in me its unfinished meaning, seeking in me, despite me, all the actors gone and the sets cleared away, the beginning of its silent discourse." (For Marx, p.152)"

- 같은 책, p.30(강조는 나).

 

과학들과 예술들, 그리고 또다른 실천들을

평가하고 서열화하고 경우에 따라 작두로 내려치는

'판관'의 자리에 맑스주의를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물질적 실천들 속에서 출현하고 작동하는 사고들에 귀기울이고

그에 힘입어 맑스주의를 반성하고 변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자, 더 넓게는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제 수업 시간에

Capturing Reality: the Art of Documentary란 다큐멘터리 영화와 마주친 후

영화라는 예술적 실천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얻었다.

지금 자신을 엄습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그게 무엇이 됐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한 저 현실을 포착하려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느낀 것처럼 관객들이 체험하게 만들려면

어떤 형식과 기법(이른바 '방법')이 필요할 것인지에 관해

감독들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실험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 하는

이른바 '미학적' 대당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일반적 '방법론' 따위도 마찬가지다.

오직 구체적이고 정세적인 마주침, 독특한 대상을 포착하려는 '적합화' 노력

만이 있을 뿐이다.

 

천의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처럼

혁신적 사고 역시 그렇다. 때로 그 곳은 문학일 수도, 영화일 수도 있고,

생물학일 수도, 정치철학일 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그런 것처럼 (대중)정치일 수도 있다.

어느 곳엔가 뿌리를 두더라도,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놀라운 사고들과 마주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

서랍 속에 간직해 두고 수시로 꺼내 보아야 할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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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14 12:55 2010/09/1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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