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9.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에도 언제나 반복해서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자리가 어디인지 확인해야 한다. - 보증은 더 이상 외부에서, 공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 보증은 말하자면 사유화되었다. - 우리는 매일매일 나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해야 한다. - 우리와 우리의 정체성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144. 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159. 인식되지 못하는,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형태 중 가장 흔한 것이 차별이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개별성을 배제하는 일이다. 이 불평등한 행동은 개인의 구체적인 개별성을 부정하는데, 한 개인을 출신, 종교, 성별로 축소하기 때문이다.
182-183. 더 흥미로운 점은 '아래로부터'의 참여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개인은 단지 지지자로 존재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결되고 다른 지지자들과 '접속'된다. - 그것은 참여가 아니라 배당 - 성공에 대한 배당, 운동의 성공에 대한 배당, 특히 한 스타의 성공에 대한 배당.
186. 우파 포퓰리즘이 개입하는 상황은 '포퓰리즘적 국면'이다. - 포퓰리즘적 국면은 포퓰리즘과 같은 게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어떤 것이다. 포퓰리즘저거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189. 정치 영역에서는 사적 영역과는 달리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감정이 없다. 감정들은 고정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199. 당시 주체성이 새로 출현했다는 것, 사회적 권리가 있는 시민의 주체성이 먼저 생산되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 주체성은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구에서 만들어졌다. 사회 국가는 사람들에게 돈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가 있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도 제공했다.
200-201. 사회적 권리는 점점 더 주체라는 지위 대신 능력과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능력을 통한 통합은 동시에 권리에 의한 통합의 해체를 재촉한다. - 이 경제와 상징이 다시 "분열된 정치 전략"에 따라 "분리된 요소"가 되었을 때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포퓰리즘적 국면'이 생겨난다.
246-247. 옛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는 둘 다 르상티망이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아니 서로 반대다. 유대인은 온전하지 않은 주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배제되었다. - 반대로 무슬림 거부는 이들에게 100퍼센트 분명한 정체성이 있다는 상상에서 나온다. - 다양한 정체성들의 전선이 아니라, 정체성의 다양한 방식들이 싸우는 전선이다.
256.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감소된 자아의 방어로 전도된다. 정체성에 방호벽을 쌓고, 정체성만의 영토를 구축하면서, 바로 이 방어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완전한 정체성에 도달하게 된다. 과잉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완전한 정체성을 다시 얻으려는 시도로, 더 좋게 표현하면 완전한 정체성을 정복하려는 시도로 전도된다.
263. 우파 담론의 논리에서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 즉 모든 종류의 르상티망, 고삐 풀린 감정들이 '허락된다.' 그것은 금지된 것으로 경험될 때, 더 정확히 말하면 금지된 것으로 표현될 때 허락된다. 왜냐하면 금지된 것이기 때문이다.
281. 노동 담론은 권한과 권리를 부여하는 과정이었다. - 정보화와 자동화의 현 시대에는 더 이상 생산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권한과 권리 부여 과정이 없다. 이것이 모든 좌파 담론들이 싸워야 하는 결손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우파 포퓰리즘이 채우겠다고 제안하는 빈자리다.
290. 만남 구역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감소가 추가되는 존재'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감소의 추가는 자기 정체성이 타인의 정체성에 의해 제한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함께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함께에 본질이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체'로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 다원환 사회는 함께하는 하나의 사회를 약속하지 않는다. 감소가 유일한 '약속'이다. 즉 사회는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들의 감소를 통한 결합을 의미한다.
293.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훨씬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오스트리아인, 터키인, 체첸인으로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는 그리스도교인, 유대교인, 무슬림 혹은 무신론자로서 어떻게 사는가? 이것이 다원화 사회의 질문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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