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영상은 어디로든 간다. 용산에서 강남에서 부산에서 또 먼 나라에서 어떤 남성들이 플레이버튼을 누른다. 그때마다 영상에서는 어떤 여성이 옷을 벗고 또 무언가를 한다.
벗고 벗고 또 벗는다. 남성들은 그녀가 벗기 때문에 영상을 볼 '뿐'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당신들이 봄으로써 그녀가 벗겨진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그러나 알 수도 있는- 사람이 볼 때마다 벗겨지고 벗겨지고 또 벗겨진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한다. 그래서 폭력이다.
촬영과 유포가 폭력을 개시한다면 보는 행위가 폭력을 유지시킨다. 유포가 협박이 될 수 있는 건 보여지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유포는 협박이 되기 어렵다. 지금 이순간 누구도 보지 않을지라도 언제든 보여질 수 있는 상태에 갇히는 것. 영상 안에서의 폭력과 별개로 구성되는 영상 밖의 폭력.
유포협박죄를 다루는 판사가 영상을 봤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영상의 내용은 폭력의 성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보여질만한? 찍힐만한? 두려울만한? 당신이 본 이유가 무엇이든 그걸 평가하며 보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폭력을 구성한다. 게다가 보통의 사람들은 옷을 벗겼을 뿐이라면 당신은 판관이라는 공식적 지위를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마저 벗겨버렸다.
최근 몇 년간 문제가 짚어지고 있었는데... 판사가 이 지경이라면 보는 행위도 처벌하라는 싸움을 해야 하는 건 아닐지. 처벌은 폭력의 해결책이 못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폭력을 인지시키는 효과는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싸움을 다짐하는 일은 애도의 한 방법일 수도 있으나, 언제나, 참담한 일이다. 애도의 또다른 말을 보탤 엄두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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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2019/12/01 12: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피해로부터의 생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질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