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과 '사는 곳'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라는 말. 반대할 이유도 없고, 주거권 교육을 할 때 나 역시 쓰던 수사지만, 나는 이 말을 상당히 경계하는 편이다. 집을 '사는 곳'으로 주목하는 흐름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집을 '사는 것이 아니'게 할 정책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면 이 말은 착시를 낳을 뿐이다. 마치 집이 '사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는 곳'의 문제를 발생시켜서, 마치 '사는 것'에 대한 정책이 '사는 곳'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청와대를 시작으로 다주택 처분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사는 것'을 '사는 곳'에 넘기라는 제안이다. 마치 다주택 보유 자체가 주거안정을 해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오늘자 한겨레 사설은 다주택자가 얼마나 많은 주택을 보유 중인지 언급하면서 "만약 이들이 살지 않는 집을 판다고 가정하면 약 60만채가 새로 공급되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보유자가 '살지 않는 집'도 이미 누군가 '사는 곳'이라는 점은 손쉽게 지워진다. 
주택 공급 효과? 이 말은 현재 다주택자가 보유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주택을 살 수 있는 조건일 때 가능한 말이다. 다주택자가 보유한 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한 종류는 투자 가치가 이미 확인된 번듯한 아파트 류일 것이고, 한 종류는 아직 투자 가치가 잠재해있을 뿐인 낙후한 동네의 낡은 집-자신은 살 생각이 없지만 남한테 빌려주는 데는 거리낌없는 집-이다. 전자는 누군가 '사는 곳'을 위해 사기보다 투자 가치를 보고 '사는 것'이 될 가능성이 더욱 높으며, 후자는 누군가 '사는 곳'을 위해 산다면 살기 위해서 위험부담을 안고 돈을 써서 손을 봐야 하는 집들이다. 전자나 후자나 '사는 것'으로서만 주택이 거래되며 '사는 곳'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아마도 청와대나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집을 판다면 그것은 다시 '사는 것'으로 부동산시장에 등장하는 전자일 것이고, 부동산 거품 역시 걱정해야 할 때이고 보면 그들은 미래의 기대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이미 형성된 차익을 챙기고 폭망하지 않는 현명한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다주택 보유를 지양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지금 '사는 곳'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방향인 것처럼 속이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다주택 처분이 집값 안정을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에 대한 정책일 뿐이다. '사는 곳'을 위해서는 다주택 보유자들의 주택을 임차해 살고 있는 세입자들의 임대료 부담을 낮추고 점유의 안정성-즉 임대기간을 보장할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청와대나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사람들의 '사는 곳'을 위해 무언가 기여하고 싶다면, 살지 않는 주택의 임대료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세입자가 제발로 나가기 전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서약한 후 그것이 해당 지역의 평범한 임대차계약이 될 때까지 제도를 바꾸는 노력을 기울이라. 집을 파는 것보다 훨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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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1 14:32 2019/12/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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