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인권위에 무언가 조사하라거나 조사하지 말라는 것, 누가 봐도 명백한 인권위 독립성 침해다.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진 일에 지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국가인권위가 조국 장관과 가족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무차별 인권 침해를 조사할 것을 청원합니다." 22만 6,434명이 참여한 국민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은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로 국가인권위에 공문을 송부했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이런 식의 노골적인* 독립성 침해 시도는 없었다. 청와대의 답변 내용처럼 인권위는 진정이 없더라도 직권으로 사건을 조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조사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국가인권위의 판단이어야 하며 그 판단에 대한 책임 역시 국가인권위가 져야 한다. 그게 독립성이다.
청와대가 국가인권위에 보낸 공문은 국가인권위의 조사를 요구하는 청원인들의 청원 내용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달'조차도 명백한 지시적 성격을 가진다는 걸, 몰랐다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알았다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청와대는 국민청원을 운영하면서 나름 이런 선들을 지켜왔다. 재판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청원에 대해서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답변드리기 어렵습니다. 현직 법관의 인사와 징계에 관련된 문제는 청와대가 관여할 수 없으며, 관여해서도 안 됩니다."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여러 입법청원에 대해서도 정부 차원의 노력을 어떻게 기울일지에 대해 답변하지 국회가 뭘 하도록 하겠다는 식의 답변은 하지 않았다. 삼권분립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을 요청하는 청원에 대해 청와대 답변의 결론은 "방송의 제작을 책임진 방송사의 결정을 존중하고자 합니다."였다. 청원인들의 입장에서 모두 불만족스러운 답변이지만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또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분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왜 국가인권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가.
입법부나 사법부만큼 독립성을 존중해야 할 기구로 여기지 않는, 역대 정부들에 늘 있었던 인식과 태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도 답이 보인다. "마음의 빚 크게 졌다" 빚진 느낌, 이해한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문재인이라는 인물의 매력인 듯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진 마음의 빚을 대통령의 권한으로 갚으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발생한다. 청와대의 공문 전달 사건처럼.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국가인권위 독립성에 관한 어록을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었다면 격노하고도 남았을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우려. 청와대 답변에 따르면 인권위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접수된 위 청원 내용이 인권 침해에 관한 사안으로 판단되면 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전해왔"다고 한다. 국가인권위가 할 답변인가 이게? 국민청원의 내용은 청와대가 책임져야지 어디 감히 국가인권위로 공문 보내냐고 항의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권위가 이번 청와대 공문 전달 사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길 바란다.
그리고. 조국 사태 이후 '조국 사수 검찰 개혁'에 여념 없는 세력이, 자신들의 열정이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세우고 있는지 좀 들여다보시면 좋겠다. 어쩌면 개혁세력의 가장 큰 성과이기도 할 것들을 가장 먼저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 국가인권위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 부연 설명합니다. 이명박 정권은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는 시도에 이어 조직을 대폭 축소시켰고 박근혜 정권 역시 부적격 위원들을 임명하는 등 국가인권위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지속해왔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의 독립성 침해 시도는 포괄적인 만큼 더욱 강력했습니다. 이번 공문 전달 사건이 '노골적'인 것은 구체적 사안에 대해 투명하게 의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지, 행여나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보다 더 강력한 침해 시도였다고 이해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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